“그 꼴로 감히 폐하를 탐하는 모습이란. 폐하께서 영애에게 눈길이라도 줄 것 같아요? 바랄 걸 바라야지. 아- 저급해.”
라헬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혀를 찼다. 그러나 아이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그녀의 말을 해석하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 내릴 뿐.
“영애를 보자마자 알아챘어요. 그런 눈을 하고 있는데 티가 안 날 수가 없잖아요. 쯧, 넘볼 걸 넘봐야지.”
“그러니까. 무슨 말을 하시는지 모르겠어요. 알아채다뇨? 그런 눈?”
“아니, 이봐요!”
결국, 이 답답한 대화에 화가 난 라헬이 빽 소리를 내지르기에 이르렀다.
“영애가 폐하에게 마음이 있다는 걸 말하고 있는 거잖아요! 어디까지 발뺌할 거예요!”
“……제……가요?”
아이는 제 스스로도 당황한 듯, 말꼬리를 흐리며 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마음이 있다? 내가? 황제에게? 그럴 리가!
“그러니까, 주제를 알라고요. 영애 같은 누더기 여자는 폐하께 어울리지 않으니까.”
라헬은 한껏 비소를 내비치며 아이를 스쳐 지나갔다. 툭, 어깨를 세게 미는 것 또한 잊지 않고.
이러한 독화살이 쏟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그 말에 의해 관통당하지 않았다. 그저, ‘황제에게 마음이 있다’라는 말에 대해 씹고 또 곱씹을 뿐.
마음이 있다는 게 무엇이던가. 상대를 좋아하는 감정이 아니던가? 내가, 내가 황제를 좋아한다고? 고작 사나흘 함께한 남자를?
말도 안 돼. 그럴 리 없잖아.
……실상, 아이오네 그녀는 19년을 탑에 갇혀 지낸 터라, 마주한 타인이라고는 오직 유모와 샤베르, 그리고 부모뿐이었다. 그래. 이는 무엇을 뜻하는가.
타인의 살가운 온기라고는 느껴 본 적 없다는 말이다. 이런 아이오네에게 있어- 황제의 살가운 언사나 매끄러운 눈빛 녹녹한 몸짓은 그녀의 마음을 옭아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황제를 좋아…….’
한다고?
아이는 그 자리에 주저앉기에 이르렀다. 다리에 힘이 풀려 더 이상 서 있을 수 없던 탓이다.
“그럴 리…….”
없어. 나는 그만큼 우둔하지 않아.
아이는 끝없이 부정했지만, 그녀의 격동하는 가슴은 긍정을 표하고 있었다.
맙소사.
그녀는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바들바들 떨리는 그녀의 손끝은 애처롭고 처연해 보이기만 했다.
쪼그리듯 앉은 그녀의 주변으로 서슬 퍼런 바람이 불어쳤다.
바닥을 할퀴듯 흘러오는 바람. 이는 아이의 마음을 거칠게 쓰다듬는 것과도 같은 것이었다.
---「1권」본문 중에서
말 울음소리와 더불어 산새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산을 누비는 짐승들의 포효 소리도 들려왔다.
언어가 없는 공간. 어쩐지, 혼자 있는 것만 같아. 아니, 사실은 원래부터 혼자였지만- 그럼에도 오늘따라 더더욱 혼자 있는 것만 같아. 그래서 아이는 귀를 틀어막았다. 아예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것이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아이는 마구간의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자신에게 자박자박 걸어오는 발걸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 나지막한 한숨 소리 역시 듣지 못하였다. 하지만 그녀의 틀어막은 귀 바로 옆에서 내뱉어지는 소리만큼은 들을 수 있을 터.
“……아이오네.”
때문에 아이는 감고 있던 눈을 번쩍 올려 떴다. 익숙한 목소리, 다시는 들을 수 없다 생각했던 목소리. 서서히 고개를 든다. 천천히 시선을 올림과 동시에 또다시 익숙한 체취가 그녀의 코를 잠식했다.
“폐……하?”
아이는 입술을 뻐끔거리며 눈을 크게 올려 떴다. 손바닥으로 눈을 슥슥 비빈다. 그럼에도 보이는 것은 변함이 없다.
카인. 그는 목 끝까지 차오른 숨을 가쁘게 내뱉으며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화가 난 것처럼 보이진 아니했다. 그저 그의 얼굴에 파인 주름에는…… 환희가 묻어 있었다. 모두가 메말라 버린 화단 한구석에 핀 꽃을 발견했을 때의 그러한 환희가.
“폐하가 여긴 어쩐…….”
“난.”
그는 아이의 말허리를 끊으며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 동시에 그녀의 목덜미를 세게 움켜쥔다. 그 손끝은 가히 날카로워 당장에라도 아이의 숨통을 끊을 듯 보였으나, 뒷머리를 파고드는 손은 상반되어 흐를 듯이 녹녹하였으니.
“널 놓을 생각이 없다.”
순식간이었다. 카인의 손에 의해 아이의 몸이 튕기듯 일어난 것은. 그리고 그들의 입술이 맞부딪쳐 진득한 숨을 만들어 낸 것은. 카인은 아이를 더욱 세게 끌어안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읏, 신음과 함께 벌어진 아이의 잇새로 그의 혀가 탐닉하듯 침입한다. 황급히 손을 들어 그의 가슴팍을 밀쳐 보았지만, 카인은 더욱더 가깝게 아이와 자신의 몸을 밀착할 뿐 그녀의 작은 반항마저 허락해 주지 않았다.
“폐, 폐하…… 그, 그만…….”
그 말에, 카인은 잠시 손을 멈추었다. 그는 아이의 가슴골까지 내려갔던 입술을 슬며시 떼어 냈다. 바르르 몸을 떠는 것이 느껴졌다. 아이의 뺨과 귀를 한 손으로 쓸어 올리며 뒷목을 다시 붙잡는다.
가쁜 숨을 내뱉고 있는 아이의 눈을 바라본다. 저 심연의 어둠 속에 담긴 것은 과연 현 상황에 대한 절망일까 아니면 희열일까. 아니, 그쯤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지금의 카인에게 중요한 것은,
“그러니, 너는 내게 붙잡혀라.”
아이오네를 놓치지 않아야 한다는, 그리고 그녀를 제 몸과 함께 묶어 두어야 한다는, 그러한 다짐뿐.
다시금 집어삼킨 아이의 입술에서는 달큼한 향기가 났다. 결코 잊을 수 없는, 그렇게도 매혹적인 향이.
---「2권」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