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도 마음이 있다 흙이나 돌과 같은 물질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에너지에 따라 반응하고 수용할 뿐이다. 이런 것을 자연적 무위성(無爲性) 또는 자연성(自然性)이라 한다. 즉 물질 자체가 임의로 유위적인 조작을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지상의 돌이나 외계에서 들어오는 운석(隕石) 등을 보아도 돌은 돌로서 특별한 차이가 없이 보편적이다. 그리고 금강산 돌이 잘나고 제주도 돌이 못났다는 차별이 없이 돌은 돌로서 평등하다. 모가 난 돌도 흐르는 강물에 두면 돌들 끼리 서로 부딪치고 마모되면서 둥글둥글 해진다. 그래서 처음 타고난 고유한 정체성이 연속적인 연기 작용을 통해서 사라지면서 이완상태에 이르게 된다. 결국 물질은 무위성, 보편성, 평등성, 이완성을 속성으로 하는 생의(生意) 즉 생명력을 가지게 된다. 물질이 우주 만물을 이루고 있으므로 물질의 생의가 곧 우주심(宇宙心)인 것이다. 별의 마음은 바로 이런 우주심이다.
식물은 광합성을 위해 줄기는 위로 향하고, 뿌리는 수분을 얻기 위해 땅 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꽃가루를 날리며 번식을 한다. 이런 지향성을 가진 것이 식물의 마음이다. 그리고 식물도 물질로 이루어 졌으므로 우주심이 들어 있다. 동물은 움직이며 양식을 구해야 한다. 양식이 될 만한 것을 구별할 줄 아는 분별심이 있으며, 그리고 종족 본능을 가지는 동물심이 있다. 동물도 물질로 이루어졌으므로 우주심이 들어 있으며 또한 지향성의 식물심도 들어 있다. 인간도 물질로 이루어졌으므로 우주심 있고, 또 식물심과 동물심이 들어 있으며 그리고 인간은 창조하고 파괴하는 지혜놀이도 한다. 이것이 인간의 마음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만물이 마음을 가지는 데 우주심이 가장 근본이며, 이를 바탕으로 식물, 동물, 인간에 따라 다양한 마음이 첨가 되는 것이다. 무생물, 식물, 동물, 인간 중에서 우주의 섭리에 가장 어긋나는 마음을 가진 것이 인간임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유의적 지혜놀이를 하며 식물과 동물을 지배하고 인간 마음대로 이용하는 법을 알며 또한 이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끼치기 때문이다.
즉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자연을 마구 훼손하고 파괴하기 때문에 자연의 입장에서 보면 자연에서 가장 필요하지 않는 종이 인간인 것이다. 오늘날 인간은 자연을 가꾸고 돌보아야할 범생태적 책임 윤리를 가져야 한다는 동양의 자연존중 사상은 사라지고, 서양의 합리주의 정신에 의해 물질문명이 발달되면서 자연과 인간이 공존 공생하는 자연친화적인 생명존중 사상이 사라지고 있다.
집착이 없는 무심(無心), 집착하는 생각이 없는 무념(無念)으로 평상심(平常心 :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서로 대립되는 양변을 여읜 중도의 마음)을 지니고 살아가는 하늘의 수많은 별을 볼 때 인간은 어떠한 부끄러움도 느끼지 못하는지? 어쩌면 오늘날 인간은 땅 바닥에 굴러다니는 돌보다 못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돌은 우주심만을 지니고 살아가는 데 비해 인간은 탐욕과 갈애에 속박되어 인간 본래의 청정한 우주심을 발현하지 못한 채 번뇌 망상의 들뜬 불안한 생동심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별의 마음은 청정한 우주심이다. 즉 탐하고, 화내고, 어리석은 탐진치도 없고, 잘 낫다는 자아의식도 없다. 남과 다투며 남을 무시하는 인상도 없고, 다른 별들을 무조건 따라가는 중생상도 없으며 오래 살고자 하는 수자상도 없다. 별은 오직 조상 대대로 물러 받는 화학적 및 물리적 집단무의식만을 지니고 있으며 이것을 다음 세대에 물려줄 뿐이다.
즉 양식을 가지고 태어난 별의 경우는 태어날 때부터 이미 더럽고 탁하며 오염된 염오의 마음이 비워져 있기 때문에 어떠한 집착심도 없이 언제나 평상심으로 여여(如如 : 그렇고 그렇게 있는 것. 자연의 진리를 무위적으로 따르는 것)한 무아(無我 : 여러 화합물로 이루어졌으므로 나라는 실체는 없다는 것)의 경지를 이루고 있다. 그러기에 별은 언제나 가장 낮은 에너지 상태에서 가장 적은 에너지를 쓰면서 외부 반응에 순응하고 적응하며 이웃을 편안하게 해준다. 이것이 남을 널리 이롭게 하는 요익중생(饒益衆生)으로 이타행(利他行)에 해당한다. 태양이란 별이 없다면 어찌 지상의 생물이 양육될 수 있겠는가! 대승사상에서는 보살(깨닫기 위해 수행에 힘쓰는 이)의 행(行)이 별처럼 요익중생의 행인 것이다.
우주심이란 우주 만물이 지니는 물질의 근본 속성으로서 자연적인 무위성(無爲性), 특별한 것이 존재하지 않는 보편성(普遍性), 모두가 동등한 존재가치를 지니는 평등성(平等性), 고유한 정체성이 없는 이완성(弛緩性) 등의 특성을 지닌다. 인간도 이런 우주심을 지니고 있지만 강한 생동심에 둘러싸여 이를 잘 발현하지 못하는 것이 보통이다. 만약 이런 염오(染汚)의 생동심을 여의고 우주심만 발현한다면 우리는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 이런 점에서 인간과 달리 별은 항상 깨달음의 상태에서 우주의 섭리를 따르므로 별들 사이의 인연관계는 조화롭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인간도 별처럼 살고자 한다면 별과 같은 마음을 지녀야 한다. 인간의 특성은 더럽고 탁한 염탁(染濁)의 생동심을 지녔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서 양식을 밖에서 구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양식을 지나치게 욕심내어 많이 구하지 말 것이며, 구하는 과정에서 탐진치를 내지 말고 남을 배려하고 또한 남과 함께 더불어 잘 지나는 올바른 연기관계를 지켜야 한다. 특히 현대와 같이 생존 경쟁이 심한 시대일수록 연기관계가 올바르게 이루어지기가 어렵다. 그래서 진리의 시대가 별과 같은 마음을 지니는 시대라면 오늘날은 별과 같은 마음이 사라진 비진리(非眞理)의 시대에 살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마음속에 빤짝이는 별을 품고 청정한 별과 같은 마음을 이끌어 내도록 노력한다면 우리의 육신이 지닌 우주심이 조금씩 발현될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항상 수행하는 자세로 자신을 안정된 이완의 세계로 이끌어 가야 한다.
세 사람이 한자리에 모이면 그 의견이 모두 각각 다르다. 당신의 의견이 비록 옳다 하더라도 무리하게 남을 설복시키려고 하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니다. 모든 사람들은 설복당하기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의견이란 못질과 같아서 두들기면 두들길수록 자꾸 깊이 들어갈 뿐이다. 진리는 인내와 시간이 밝혀 준다.
[스피노자 : 1632~1677, 네덜란드, 철학자]
여러 사람이 모이면 각기 의견이 달라진다. 자신의 견해와 다르다고 해서 상대방을 무리하게 설득시키려 한다면 상대방은 더욱더 자신의 의견이 옳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래서 두 사람 사이의 의견 차이는 더욱 벌어진다. 이것은 마치 각자가 상대방에게 의견이란 못질을 하면 할수록 더욱 깊은 상처만 주게 된다는 것이다. 남의 틀린 견해를 수용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일단 이것을 받아드릴 아량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상대방을 존중하게 된다. 누가 옳고 그른가는 시간만이 밝혀 줄 것이므로 인내를 가지고 지켜보며 기다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