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시사막 한가운데서 >
오늘 아침에는 한바탕 개미와의 전쟁이 있었다. 벌써 삼 일째. 푹신한 이불 속에서 이제 막 깨어나려던 찰나, 함께 사는 친구가 냉장고와 가스레인지 사이쯤에서 지르는 비명에 다시 이불을 뒤집어썼다. 굳이 나가 보지 않아도, 사태가 어떠할지 대충 짐작이 간다. 현관문에서부터 벽을 따라 냉장고의 냉동실 문 안까지, 한 줄로 개미들의 행렬이 지나가고 있을 게다. 부모님 집에서 나와 산 지 사 년째. 어지간한 살림과 세금계산, 부동산 거래, 은행 대출 등에는 익숙해졌다. 하지만 이렇게 갑자기 출몰하는 개미떼에는 손을 못 쓰겠다. 나는 스물여덟, 미혼의 독립녀이다. --- p.12
나의 독립은 남자친구와의 동거 생활로 시작되었다. 겉으로 보기에 남과 다를 것 없이 지내 오던 나는 대학 졸업을 한 해 정도 앞두고 본격적으로 독립을 결심했다. 집에서는 몰랐지만 대학 기간 내내 연애를 했었고, 애인과 자유롭게 성생활 하기에 집은 언제나 방해물이었다. 새로 사귄 남자친구가 자취를 하고 있었고 나도 조금씩 돈을 벌기 시작하자 그와 편하게 한집에서 살고 싶었다. 나를 구속할만한 결혼은 절대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연애는 많이 하고 싶고. 제발 마음대로 편히 살아 봤으면……. 원하는 사람과 편안히 섹스하고, 편안히 잠들고, 편안히 깨어나는 일을 왜 그렇게 힘들게 숨어서 해야 하는 것일까. 내 마음대로 살 수 있는 새 집. 그것은 혼자서든, 사랑하는 사람하고든 쉬고 싶을 때에는 음악을 들으며 담배 한 대를 피워 무는 것 정도의 소소한 일상에 대한 꿈이었다. --- p.14
< 내가 선택한 아이 >
삶 속에서 우리는 항상 선택의 순간에 직면한다. 수없이 많은, 피할 수 없는 선택의 상황 속에서 무언가를 꼭 택해야 하고, 그것이 펼쳐보여주는 세상을 만난다. 그렇게 선택을 하고 나면 그 삶을 살아내야 하는 일이 남았을 뿐이다. 내 인생에서도 선택의 문제는 항상 중요하게 다가와 삶을 바꿔 놓았다. 그것이 이끄는, 때로는 잔잔하고 또 때로는 폭풍 같은 세월의 물결을 수없이 빠져나와서도 여전히 선택의 연속과 변화 속에 서 있다. 난 짧다면 짧을 수도 있는 내 나이, 마흔의 선택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다. 어느 순간 방향이 결정된 첫 발자국부터, 그 발걸음을 따라 뒤돌아보지 않고 걸어온 세월의 강 너머, 나이 마흔에 서 있는 새로운 선택의 지점에 대해. --- p.36
아이를 낳기로 선택했던 것과 똑같은 관점에서 난 아이를 키우지 않기로 했다. 아이를 포기한 것은 순전히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내 선택이었다. 아이에 몰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았고, 아이를 키우던 어느 날 아이에게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하는 원망의 말을 단 한 번이라도 하고 싶지 않았다. 아이를 키웠다면 분명 더 포기해야 하는 것들이 많았을 것이고, 다른 평범한 어머니들처럼 보상 심리를 가졌을 것이 분명했다. 어떤 것을 선택해도 불행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였다고, 그때도 역시 소피 같은 상황에 놓였다고 생각했다. --- p.44
< 이 여름이 끝나면 >
이사를 나가던 날 밤은 가슴이 설레 잠도 오지 않았다. 막상 혼자 살게 되면서는 밥부터가 문제였지만 나는 지금도 혼자 지내는 것이 좋다. 처음에는 컵으로 쌀을 붓는 것도 쉽지 않았다. 컵을 발로 잡아서 쌀을 포대에서 밥솥으로 옮기면서 몇 번을 엎질렀다. 얼마만큼 쌀을 넣어야 혼자 두 끼 정도 먹을 수 있을지도 알지 못했다. 쌀을 씻는 문제는 더욱 난이도가 높았다. 물도 엎지르고, 물을 따르면서 쌀도 엎질렀다. 그리고 몇 번을 다시 시도해 모든 것이 다 됐다고 생각했는데, 밥솥을 싱크대에서 바닥으로 옮기다가 밥솥이 발에서 미끄러지면서 떨어져 바닥이 엉망으로 되기도 했다. 그때는 울고 싶긴 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살다 보니까 내가 이런 것도 하네.’라는 생각으로 뿌듯했다. 밥과 간단한 요리지만 스스로 해 본 경험은 감격 그 자체였다. 언제나 남이 해 주는 것만 먹고 살아야 하는 존재가 더는 아닌 것이다. --- pp.64-65
처음에 이 집에 이사를 왔을 때는 대문의 문턱이 높았고, 대문 밑으로 나 있는 계단 때문에 전동휠체어가 들어올 수 없었다. 싱크대도 의자에 앉아 다리를 올려놓기엔 너무 높아서, 처음에 사용할 때는 몸이 거의 눕다시피 한 자세로 물을 받곤 했다. 그래서 직접 동사무소와 복지관에 다니면서 문의를 했더랬다. 처음에 동사무소로 찾아가 사정을 얘기했더니 동사무소 직원은 어이없어했다. 내 딴에는 나름대로 고민을 많이 해서 동사무소에 들어가 ‘가정복지과’ 담당 직원을 찾은 것이었다. 그곳이 지역에 거주하는 장애인들의 생활과 전혀 무관하지 않을 거란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혼자 사는 장애인인데, 집에 문턱이 있고 대문 밖으로 계단이 두세 개 나 있어서 드나들기 어려워요. 혹시 이것을 전동휠체어가 들어갈 수 있도록 개조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곳이 있을까요?”
동사무소 직원은 일언지하 “그런 건 없다.”라고 딱 잘라 말했다. 생뚱맞게 뭐 이런 걸 동사무소에 와서 묻는 여자가 있느냐는 식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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