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중국 국가계획위원회의 영고성쇠(榮枯盛衰)의 역사를 축으로 삼아 중국 관료제의 구조 및 기능의 동태를 설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중국의 관료제는 사실상 공산당 지배를 위한 도구였으며, 그 본질적 성격은 개혁·개방의 시대인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기본적으로 바뀌지 않고 있다. 중국에서 공산당은 국가와 정부의 상위에 위치하는 지도 기관이며, 권력상에서도 우위에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중국의 경우,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마오쩌둥 시대에는 그 개인이 조직의 정점에서 군림하며 관료제를 정책 과정의 도구로 활용했기 때문에, 아직 형성 과정 중에 있던 관료 기구와 그 간부들은 마오쩌둥 개인의 독재적 권력 앞에서 무력화되었다. 요약하자면 그것은 ‘인치’의 관료제라 할 수 있다. --- p. 20
중국의 관료제를 정치체제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역시 ‘사회주의’의 정치체제를 토대로 삼고 있다. 1950년대에 형성된 마르크스·레닌주의에 기초를 둔 전위로서의 공산당 지도에 의한 관료제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 기본 구조가 바뀌지 않고 있다. 이 부분에 손을 대지 않는 한, 아마도 본질적인 의미에서의 정치체제 개혁은 불가능할 것이다. --- p. 47
이상으로 재경위의 인사 배치에 대해 검토했다. …… 여기에서 흥미를 끄는 것은 중국공산당 이외에도 민주 인사, 여러 지식인, 기업가 등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협력 체제는 신정권이 구상했던 ‘통일전선에 의한 연합정부’를 반영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이 시기 중앙의 경제조직 인사, 특히 재경위를 통해서 보면 광범위한 인재를 추구했던 연합정부의 관료제라고도 부를 수 있는 중국적인 특수 형태가 여기에서 출현했다고 할 수 있다. --- p. 63
중국은 1·5계획기에 철저하게 소련형 사회주의 체제를 모방함으로써 일당 지배하의 정치체제를 확립했다. 그와 동시에 소련형 제도를 도입하는 한편으로 이를 실제로 운용할 때는 사회의 요구에 따라 당 중앙에서 그것을 ‘중국화’하기 시작했다. 요컨대 중국의 관료제는 소련이라는 모델을 통해 그 골격을 형성시켰지만, 오히려 알맹이는 ‘중국적 특색’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 p. 84
그러나 이 과정에서 중국공산당은 심각한 당내 논쟁을 경험하는데, 루산을 무대로 1959년 7월부터 8월에 걸쳐 개최된 정치국확대회의와 중국공산당 8중전회에서 벌어진 이른바 펑더화이 사건이 그것이다. 이것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루산 회의에서 국방부장인 펑더화이가 도를 넘은 대약진운동·인민공사의 심각한 문제점을 의견서로 정리해 마오쩌둥에게 제출했다가 마오쩌둥의 노여움을 사 여기에 동의했던 군 총참모장 황커청, 외교부 부부장 장원톈(張聞天), 후난성 당위원회 제1서기 저우샤오저우(周小舟) 등과 함께 8중전회에서 ‘반당(反黨) 집단’으로 몰려 모든 직무에서 해임된 사건이다. --- p. 138~139
중국은 대약진운동으로 황폐해진 국가를 바로세우고, 새로운 국가주석 류사오치를 중심으로 경제 조정 정책을 단행하며, 공산당의 지도를 강화하고 관료 조직을 재생시키는 등 정치체제의 정비에도 착수했다. 그렇지만 …… 마오쩌둥은 ‘관료주의’에 빠진 당을 재생하는 방법은 권력의 전환밖에 없다고 결단하고, 류사오치 등을 ‘실권파’로 규정한 뒤 문화대혁명을 발동하기에 이른다. 이런 과정을 거쳐 중국의 관료제는 또다시 한 인간에 의해 파괴된다. --- p. 150
이 시기에는 중요한 문제가 잠재되어 있다. 그것은 애초에 ‘전기’에서 끝났으면 좋았을 문혁이 왜 타성에 젖은 것처럼 1976년까지 계속되었는가에 대한 의문이다. 즉, ‘문혁 전기’에서 만들어진 산더미 같은 과제를 왜 ‘문혁 후기’에서 해결할 수 없었는가? 이에 대해서는 중국 정치의 특성이라고도 할 수 있는 역사의 악순환이 또다시 반복된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을 금할 수 없다. --- p. 180
이와 같은 강권화 경향의 조류 속에서 1989년 4월 15일, 갑작스레 후야오방이 사망하고 뒤를 이어 천안문사건에 이르는 비극의 드라마가 막을 열었다. 당국은 후야오방의 명예 회복을 요구하는 학생들의 행동을 ‘동란’이라고 규정했는데, 이에 반발한 학생들이 단식투쟁에 돌입하고 이런 그들을 자오쯔양이 물밑에서 지지하게 되면서 시위는 단번에 100만 명 규모로 팽창했다. 덩샤오핑을 중심으로 한 지도부는 이것에 위협을 느끼고 5월 20일에 베이징시 일부에 계엄령을 시행함으로써 학생을 견제했지만, 학생들의 저항 활동은 지속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6월 4일, 날이 채 밝기도 전부터 당국은 천안문 광장과 그 주변에 대한 진압 활동을 개시했고, 그 결과 학생과 군이 충돌하며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하는 대참사가 벌어졌다. --- p. 267~268
반복해서 말하지만 역사는 우리에게 경제개혁에 보조를 맞춘 정치개혁 도입의 필요성을 알려주고 있다. 이러한 폐해를 시정하는 가장 좋은 방책은 정치체제에 경쟁 원리, 즉 민주주의를 도입하는 것뿐이다. 민주화된 정치체제 아래에서만 특정 개인이나 정치집단에 좌우되지 않는 건전한 관료제를 육성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적어도 이념적으로는 그렇다. 민주주의의 규칙에 따라 약자에게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자리와 권리를 부여하고, 동시에 정책의 투명성을 향상시킴으로써 부의 편중을 시정하는 길을 열며, 의회나 정권에 의해 형성된 정치적 합의에 기초해 적정 규모의 정부 아래에서 전문화되고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안정된 관료 기구가 이를 실행한다. 중국이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것은 이와 같은 평범한 프로세스인 것이다.
--- p. 306~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