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초반 페미니즘 진영에서는 명칭을 ‘젠더연구’로 바꾸고, 성을 문화적 구성물로 규정하여 남성/여성의 두 성을 뛰어넘는 다양한 형태의 젠더 관계를 구상함으로써 기존의 고정된 성 정체성을 수정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는 『젠더 트러블Gender Trouble』(1990)에서 푸코의 계보학적 권력 분석을 라깡의 정신분석학, 데리다의 해체주의 이론에 연결하여 성 정체성을 본질적으로 태어나거나 주어지는 고정된 주체가 아닌, 언제나 해체 또는 재구성될 수 있는 유동적인 주체 개념으로 규정함으로써 구성주의적 젠더 논의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였다.
버틀러는 가부장제사회에 반기를 들고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는 시몬 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의 명제로부터 더 나아가, 여성/남성의 섹스·젠더·섹슈얼리티 모두 사회문화적 구성물이라 정의하였다. 섹스는 여성/남성의 생물학적 몸의 차이, 젠더는 사회·문화적 차이, 섹슈얼리티는 성적 실행의 근원적 욕망을 나타낸다. ‘성 정체성이 고정되지 않고 유동적’이라는 버틀러의 주장은 그녀의 ‘수행적 젠더정체성’의 개념과 밀접한 연관이 있으며, 이것은 젠더이론에 획기적인 전환점을 제공하고 있다.
버틀러의 ‘수행적 젠더정체성’은 ‘행위의 반복적 수행을 통한 젠더의 재의미화’로 설명될 수 있다. 버틀러에 의하면, 한 사회 내에서 젠더(여성/남성) 정체성은 사회적으로 이미 고정되거나 선천적으로 정해진 것이 아니라, 행위를 통해 반복적으로 구성되는 수행적 특징을 지닌다. 버틀러의 이론에서 ‘수행성’은 핵심개념이다. ‘수행성’은 다시 ‘수행’과 구분된다. ‘수행’, 즉 ‘퍼포먼스Performance’가 일회적 행위라면, ‘수행성Performativity’은 오랜시간 동안 반복되는 행위과정을 뜻한다.
먼저, ‘수행Performance’을 살펴보자. ‘수행’, 즉 ‘퍼포먼스’에는 퍼포먼스를 행하는 ‘수행자Performer’가 있다. 예를 들어, 연극 또는 공연에서 수행자는 퍼포먼스를 행하는 배우와 연기자를 말한다. 이들은 연극과 공연에서 드라마대본 혹은 시나리오에서 이미 고정되고 확정된 주인공을 연기한다. 이를 사회문화적인 맥락으로 확대해보면, ‘수행’이란 일종의 ‘일관된 서사’로서 한 사회 내에서 통용되는 가치관, 정체성, 규범 등을 상징하며, ‘수행자’는 이를 행하는 주체를 나타낸다. 여기서 ‘수행’은 이미 정해진 일관된 서사를 ‘수행자’인 주체(여성/남성)에게 강요하고 꼼짝 못 하도록 고정한다. 이렇듯 주체에 대해 일관된 서사를 강요하고, 주체를 억지로 틀에 맞출 경우 폭력이 작동될 수 있으며, 이것이 바로 고정된 주체설정의 폭력성이다.
반면, ‘수행성Performativity’은 수행자를 전제하거나 고정하지 않는다. 수행성에서 중요한 것은 반복의 과정이다. 즉 수행성은 행위의 반복성과 맞물려 있고, 이 반복은 주체를 가능하게 하며, 그 주체의 일시적 조건을 구성해 준다. 따라서 모든 젠더정체성은 행위의 반복을 통해 만들어진다. 예를 들어 당대 사회가 ‘여성적/남성적’이라고 허용된 행위를 반복적으로 수행하는 자가 바로 ‘여성/남성’이 되는 것이다. 즉 ‘여성/남성’이 된다는 것은 당대 사회의 문화적 규범을 익히고, 사회가 요구하는 젠더정체성을 반복적으로 체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젠더의 수행성은 첫째, 젠더화된 본질에 대한 기대가 젠더 자신을 자기 외부에 가져다 놓게 된다는 메타랩시스(상관관계가 먼 단어를 사용해 다른 의미를 지칭하는 과도한 비유법) 주변을 맴돈다. 둘째, 수행성은 한 번의 행위가 아니라 반복적이고 의례적인 행위이다. 이 행위는 일부 문화적으로 유지된 시간적 지속성으로 이해되는 동시에 몸의 맥락에서 몸의 자연화를 통해 그 효과를 획득한다.
그런데 이러한 젠더정체성은 선험적으로 규정된 것이 아니라, 그 사회가 처한 상황과 문화적 공간의 규범을 반복적으로 수행함으로써 나타나는 결과일 뿐이다. 이러한 반복적인 수행은 젠더주체를 통제하고 규범을 강화할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 새로운 의미로 열릴 미시적 가능성을 내포한다. 즉, 모든 젠더주체는 지배담론을 반복적으로 수행하면서 복종하고 순응도 하지만, 다른 한편 그 담론을 ‘다르게 반복하기’를 통해 지배권력에 저항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기도 한다. 이로 인해, 젠더주체는 권력에 대해 복종도 하는 반면, 저항과 반항도 수행한다는 점에서 양가성을 띠고 있다. 이와 같이 단순반복과 같은 ‘복종적 반복’이 있는가하면, 기존의 권력과 제도에 속하면서도 기존의 권력을 간섭하고 뒤흔드는 ‘전복적 반복’도 존재한다. 이것이 바로 ‘다르게 반복하기’이자 ‘수행성’이 지닌 전복가능성이다. 버틀러는 이 ‘다르게 반복하기’가 기존의 제도와 권력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말한다.
결국 다르게 반복하기를 통한 ‘수행적 젠더 정체성’은, 모든 젠더정체성이야말로 행위 중에 가변적으로 구성되는 일시적이고 잠정적인 양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따라서 선천적으로 ‘고정된 정체성’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진정한 젠더 정체성’에 대한 모든 전제 조건들도 허구로 드러난다. 버틀러는 여성/남성의 진정한 젠더정체성이란 더 이상 불가능하며, 심지어 ‘여성인지/남성인지’의 구분도 규정할 수 없음을 선언함으로써 퀴어이론을 대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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