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칠의 인생에서 최상의 순간은 언제였는가?
당시 처칠은 이미 65세를 넘어 노인 연금을 받아도 될 나이였다. 게다가 키도 작고 뚱뚱했으며, 머리는 벗어지고, 등은 굽고, 턱은 앞으로 돌출되어 있었다. 또한 끊임없이 술을 마셨고, 심심하면 울었으며, 그림을 그리는가 하면, 늦도록 잠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고, 아주 작은 격려에도 시를 읊어 댔다. 더욱이 오랜 의원 생활을 하는 동안 천적이 여럿 생겼다. 하지만 5월 9일 소규모로 은밀하게 소집된 회의에서 처칠은 처음으로 히틀러에 대항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 지도자로 인정을 받았다.… 원로 5명으로 구성된 전시 내각을 잠시 쉬는 동안, 처칠은 25명의 일반 각료들을 만났다. 처칠이 각료들 마음에서 솟아오르는 결심을 읽어 낸 듯이 말하자, 그들의 반응은 강렬하였다. 모두들 그를 둘러싸고 환호성을 올렸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싸우겠다는 그의 서약과 내각의 전폭적 지원은 처칠의 의견에 힘을 실었고 핼리팩스도 더는 반대의견을 내놓지 않았다. ---p.54~58
처칠은 고위직에 어울렸는가?
처칠은 실제 책임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기에 실제로 책임자가 아닌 사람들의 의견은 어느 계층의 조언이건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물론 수많은 사람의 의견을 모으면 전쟁을 승리로 이끌 훌륭한 계획을 세울 수 있습니다. 단, 그 계획을 실행에 옮길 필요가 없을 경우에만 그렇습니다.” 또한 1943년 개최된 상·하원 합동회의에선 이런 지적을 하기도 했다. “감히 말씀드리거니와 만일 제가 책임이 무거운 자리에만 있지 않았어도 전 이미 뛰어난 계획을 상당수 생각해 냈을 것입니다.” ---p.62~63
그의 최대 장점은 무엇이었는가?
처칠은 일상적 언어로 평범한 연설을 하는 것도 좋아했다. “짧게 말하는 게 최고지. 그중에서도 오래된 말일수록 좋아.” 화려한 어구의 짧고 간결한 문장은 때로 장황한 문장보다 더 효과적이었다. “저는 피와 수고와 눈물과 땀밖에 드릴 것이 없습니다.”, “런던은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적은 사람이 이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렇게 많은 혜택을 준 적은 없었습니다.” 같은 표현이 그런 경우였다. 간혹 짧은 문장 몇 개로 이루어진 연설로 최고의 감동을 선사했는데, 1941년 2월 9일 미국 국민에게 전한 방송 연설이 그러했다. “여러분이 신뢰와 축복만 보내 준다면 하느님의 섭리 아래 모든 것이 잘될 것입니다. 우리는 실패하지도, 주저하지도 않을 것이고, 약해지거나 지치지도 않을 것입니다.” ---p.70
처칠의 두드러지는 특질은 무엇이었는가?
공작의 손자이자, 빅토리아 시대의 소산이자, 세계적인 정치가였던 그는 동료나 부하들의 편의에 거의 아무런 배려를 하지 않았다. 그의 비서는 크리스마스를 제외하고 매일 일했다. 처칠은 언젠가 수행원과 심한 말다툼을 한 뒤 이렇게 불평했다. “자넨 내게 너무 불손하군.” 그러자 수행원이 대꾸했다. “네, 하지만 장관님도 제게 너무 잔인합니다.” 처칠은 이 말을 곰곰이 생각한 뒤 변명을 했다. “그렇긴 하군. 하지만 난 위대한 사람이지 않은가.” ---p.117
처칠은 어떤 역사관을 가지고 있었는가?
1940년 8월의 어느 날 저녁, 그는 나치군이 바다를 건너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동료들에게 “오늘 저녁 적의 침공 문제를 토의합시다.”라는 말을 전했다. 이때 모든 사람은 그날 저녁 당연히 독일군 침략에 관한 토의를 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그들은 1066년 정복왕 윌리엄이 맞닥뜨린 적의 침략에 대한 진상을 규명하는 데 시간을 보냈다. 또 1944년의 침공 직전에 처칠은 정복왕 윌리엄이 영국 해안에 도달한 때의 날씨와 시간, 상황에 대한 자문을 구하기도 했다. 그 사건이 900년 전에 일어났다는 사실을 잊은 그가 마지막으로 영국 침공에 성공한 사건의 중요 조사 자료를 원했기 때문이다. 물론 때로는 그러한 역사 연구가 다른 사람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사실을 간파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1941년 러시아가 독일의 침략을 견뎌 낼 것이라는 그의 믿음에 동의를 표한 사람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미국에서도 러시아가 기껏 3개월 정도 버틸 것이라고 추정했다. 하지만 처칠만은 2년 뒤에도 러시아가 여전히 싸우고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그때부터 장교들은 나폴레옹이 1812년 모스크바에서 퇴각한 사건의 보고서를 다시 읽어야만 했다. ---p.254~255)
처칠과 히틀러는 어떻게 달랐는가?
처칠과 히틀러가 현격한 차이를 보이는 특징 중 하나는 전쟁과 그 결과에 대한 태도였다. 비록 많은 사람이 처칠을 전쟁광으로 간주했지만, 사실 그는 평화를 보장하기 위한 방법으로 전쟁을 원했을 뿐이었다. 1943년 처칠은 자신의 승인 하에 독일을 폭격한 광경을 담은 영화를 보고는 “우리가 짐승인가? 꼭 이 정도까지 했어야 하는가?”라며 한탄했다. 그는 파괴가 아닌 보존의 열망에 따라 움직였다. “나는 히틀러를 제외한 누구도 미워하지 않으며 또 그것이 나의 본업이다.” 1945년 2월 1일, 처절한 전쟁이 종전을 맞이할 무렵 그는 클레멘타인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나는 육군이 진격하는 서쪽 전선 전방 60여 킬로미터를 따라 독일의 부녀자와 어린이들이 뿔뿔이 도망치더라는 소식을 듣고 마음이 슬퍼졌음을 고백해야겠소. 물론 그들이 그런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은 마땅한 일이겠지만, 그 광경만큼은 보는 이들 시야에서 지워지지 않을 것이오. 전 세계의 비극이 나를 괴롭히고 있소.” ---p.266~267
처칠은 어떻게 죽었는가?
처칠은 누구보다도 자신의 죽음을 알리는 소식이 권력의 정점에 섰던 영웅의 사망으로 전해지기를 바랐을 것이다. 승전일을 얼마 남기지 않고 사망한 루스벨트에 대해서 처칠은 이렇게 말했다. “일하다가 죽다니 … 그의 죽음이 얼마나 부러운지 몰라!” 1945년 서한에서 앨런 브룩 장군은 처칠이 언제라도 목숨을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었고, 전시 중 사망이 그의 대담성과 극적인 운명에 대한 열망을 충족시킬 것으로 보였다고 했다. 처칠의 부인 클레멘타인 역시 전쟁에 두 사람 모두 희생될 것으로 믿고 있었다. 1944년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전 전쟁 이후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윈스턴은 종전과 함께 죽을 테니까요. … 알다시피 그는 70살이고 전 60살인데다가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전쟁에 쏟아 부었기에 이제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빼앗길 것입니다.” 그러나 처칠은 그 후에도 20년 이상 생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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