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루마리의 의미와 중요성을 결정할 때 가장 중요한 열쇠, 곧 그 문서들이 기독교와 관계가 있느냐 없느냐를 결정하는 열쇠가 되는 요인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그 문서의 연대를 측정하는 일이다. 그 문서들은 기독교 이전의 것인가, 이후의 것인가? 그 문서들이 기원후 30년경 전후의 예수의 활동들과 얼마나 가까운 시기의 것인가? 대략 기원후 40년에서 65년 사이에 해당하는 바울의 여행들과 편지들과는 또 얼마나 가까운 시대의 것인가? 기원후 70년에서 95년 사이에 기록되었다는 복음서들의 저작과는 또 얼마나 가까운 시기의 것인가?
그 문서들이 어떤 연대의 것이든, 그 문서들은 기독교계를 난처하게 만들 만한 근거가 될 수 있으며, 난처함의 정도는 연대에 따라서 상당히 폭이 클 수도 있다. 예를 들어보자. 만일 그 두루마리들이 기독교 시대보다 훨씬 앞서 기원했다면, 그것들은 예수의 독창성과 유일무이성을 의심하게 만드는 위협이 될 수도 있다. 곧 예수의 일부 말들과 개념들이 온전히 그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이미 정립되어 있고 ‘공기 중에’ 떠돌던 사상과 가르침과 전통의 흐름에서 나왔음을 밝혀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두루마리들이 예수의 생전이나 그 직후에 기원했다면, 한결 더 난처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 문서들은 그 안에 등장하는 ‘의의 교사’가 예수 자신이라고 주장하는 근거가 될 수 있으며, 따라서 예수는 당대의 사람들에게는 신성한 존재로 인식되지 않았다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그 두루마리들은
‘초기 기독교’ 이후의 이미지들에 위협이 되는 특정한 명제들을 포함하거나 암시한다. 예를 들어 이전의 예수는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라고 말한 비정치적인 인물로만 생각되었으며, 호전적인 메시아적 민족주의란 오로지 열심당과만 연관이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두루마리들에는 ‘초기 기독교’와 관련해 호전적인 메시아적 민족주의에 관한 주장들이 들어 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심지어 예수는 결코 새로운 종교를 만들어낸다거나 유대의 율법을 어긴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고 드러날 수도 있다. ---p.231~232
이런 제안을 한다면 놀라운 일이겠지만, 바울이 모종의 로마 첩보원이었을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아이젠만은 두루마리 자체들을 보고 이런 결론에 이르게 되었고, 이어서 그런 결론을 뒷받침해주는 증거를 신약성서에서 발견했다. 그리고 실제로 만일 쿰란에서 발견된 자료에 사도행전에 나오는 자료를 결합하고, 거기에 바울 서신들에 나오는 불확실한 언급들을 더하여 엮어놓으면, 그런 결론은 아주 분명한 가능성으로 떠오른다.
그러나 앞의 결론보다 덜 놀라운 것이기는 하지만 또 하나의 결론도 가능하다.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혼란스럽고 수수께끼 같은 마지막 사건들, 곧 아슬아슬한 순간에 로마 군인들이 개입했다는 사실, 바울이 많은 병력의 호위를 받으며 성을 빠져나갔다는 사실, 바울이 카에사리아에서 호화스럽게 체류했다는 사실, 그가 역사의 무대에서 묘연하게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는 사실, 이런 모든 일들은 교묘하게도 오늘날 일어나는 일들과 잘 맞물려 들어간다.
이 대목에서 오늘날 미국에서 실행되는 ‘증인 보호 프로그램’의 수혜자들을 떠올릴 수 있다. 또한 북아
일랜드에서 실행되는 소위 ‘정보 제공자 현상’을 생각할 수 있다. 이 두 경우 모두 조직적 범죄 행위나 준군사적인 테러 행위를 일삼는 불법 조직의 한 구성원이 당국자들의 권유로 ‘전향하게’ 된다. 그는 면책과 보호를 받고, 재배치되고 돈을 받는 대가로 그 조직에 대해 증거를 제공하고 증언을 하기로 수락한다. 바울과 마찬가지로 그런 사람은 동료들에게서 원한 깊은 분노를 사게 된다. 바울처럼 그런 사람은 신분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과분하게 경찰이나 군대의 보호를 받는다. 또 바울처럼 그런 사람은 호위를 받으며 밖으로 빠져나간다. 당국자들에게 협력하기 때문에 그에게는 ‘새로운 신분’이 주어지며, 복수심에 불타는 동료들의 손길이 닿지 않는 어디에선가 가족과 함께 정착한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런 사람 역시 바울처럼 역사의 무대에서 자취를 감춘다.
그렇다면 바울은 역사상 ‘비밀 정보원’의 무리에 속하는 인물일까? 밀고자요, ‘정보제공자’일까?
---p.377~3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