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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작 뉴턴 세트

아이작 뉴턴 세트

[ 전 4권, 한정판 개별 넘버링 + pet 세트케이스 포함, 양장 ] 알마 에센시아-01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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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학 top100 3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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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6년 06월 07일
판형 양장?
쪽수, 무게, 크기 1504쪽 | 3070g | 153*232*138mm
ISBN13 9791159920073
ISBN10 1159920079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1명)

저자 소개 관련자료 보이기/감추기

역자 : 김한영
서울대학교 미학과를 졸업하고 서울예대에서 문예창작을 공부했다. 오랫동안 전업 번역가로 활동했으며 옮긴 책으로 스티븐 핑커의 《빈 서판》 《본성과 양육》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비롯해, 《알랭 드 보통의 영혼의 미술관》 《무엇이 예술인가》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 등이 있다. 제45회 한국백상출판문화상 번역 부문을 수상했다.
역자 : 김희봉
연세대학교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물리학을 전공했다. 과학서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옮긴 책으로 《위대한 물리학자들》 《사회적 원자》 《천재성의 비밀》 《파인만 씨, 농담도 잘하시네》 등이 있다.
감수 : 이무현
서울대학교 자연대 수학과를 졸업하고 퍼듀대학교 대학원에서 수학과 박사학위를 받았다. 번역서로 뉴턴의 《프린키피아》를 비롯해, 유클리드의 《기하학 원론》,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대화》 《새로운 두 과학》 등이 있다. 《위대한 과학자들의 위대한 실수》를 집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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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신세계를 발견하다
뉴턴은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신세계를 발견했다. 1661년경 자연철학은 과학혁명이라는 이름하에 근본적인 재구성을 충분히 겪은 후였다. 철학자들은 자연의 익숙한 외관 뒤에 숨어 있는 새로운 세계를 실제로 발견했다. 그것은 일상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질적인 세계가 아닌 양적인 세계, 유기적인 세계가 아닌 기계론적인 세계, 유한한 세계가 아닌 무한 범위의 세계였다. 많은 이들을 두렵게 하는 이질적인 세계였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그에 대한 도전이 전율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케임브리지에서 뉴턴은 바로 이러한 세계를 발견했다. --- 1권 p.34

그럼에도 갈릴레오가 대담하게 예언한 역학의 재건은 좀처럼 시작되지 않았다. (…) 실제로 1661년에는 두 명의 주요 인물만이 관성의 법칙을 포용하고 있었다. 르네 데카르트와 크리스티안 하위헌스였다. 사실 관성 운동의 직선적 성격을 주장하면서 현재 우리가 받아들이고 있는 방식으로 관성의 법칙을 말한 사람은 갈릴레오가 아니라 데카르트였다. --- 1권 p.48

16세기와 17세기의 천문학, 역학, 광학에는 20세기의 눈을 즉시 사로잡는 공통의 맥락이 흐른다. 바로 각 분야의 업적들이 수학적 용어로 표현되었던 것이다. 우리의 눈에는 그후 지금까지 자연과학을 점점 더 강하게 지배해온 패턴, 즉 자연을 수식화하는 방식의 확립과정이 보인다. 아마 1661년에는 그런 맥락이 관찰자의 눈에 그리 뚜렷하게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 1권 p.53

연금술이 인간의 약을 올리는 영원한 은밀함을 지녔다면 그 대척점에는 수학이 있었다. 자신을 지식이란 이름으로 불러달라는 수학의 바로 그 요구는 만인에게 공개된 증명들에 기초해 있었다. 전자가 암시와 상징성을 내세워 구불구불 돌아갔다면, 후자는 엄밀한 논리라는 차가운 빛에 의존해 똑바로 나아갔다. 아마 17세기의 지식 세계가 얼마나 다양했는지에 대해 말할 때, 그렇게 대조적인 두 분야의 연구가 둘 다 명백히 번성하는 상태로 공존했다는 사실보다 더 좋은 예는 없을 듯하다. 후세에 가서야 17세기의 연금술은 죽어가는 식물에서 핀 최후의 꽃이었고, 17세기의 수학은 강인한 다년생 식물에서 핀 최초의 꽃이었음이 밝혀질 터였다. 연금술의 상태가 어떠했든, 1661년에 수학은 누가 봐도 번창하는 사업이었다. --- 1권 p.68

2장 침착하고, 말이 없고, 사색적인 소년
뉴턴이 어머니에 대해 애정 어린 회상을 단 한 줄도 남기지 않았다는 사실은 중요한 의미를 띤다. 심지어 어머니의 죽음도 주목받지 못하고 넘어갔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뉴턴은 고통에 시달리는 인간이었고, 적어도 중년기에는 항상 신경쇠약의 문턱을 넘나든 극도로 신경질적인 인물이었다. 남을 잘 믿는 그의 성격을 확대 해석하지 않더라도, 이미 다른 아이들과 달리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당황하고 있었을 아이의 내면적인 고통에 어머니의 재혼과 떠남이 엄청난 영향을 끼쳤으리라고 확신하는 데는 부족함이 없으리라 --- 1권 p.111

평범한 소년들은 그를 보고 당황했을 게 분명하다. 그는 펨브로크 백작에게 그의 첫 번째 실험은 크롬웰이 죽고 거대한 태풍이 영국을 강타하던 날에 한 것이라고 말했다. 바람을 등진 채 한 번, 바람을 안은 채 다시 한 번 점프를 한 뒤 잔잔한 날에 뛴 거리와 비교해서 “태풍의 힘”을 측정한 것이다. 그 태풍은 지금까지 그가 알고 있던 어느 태풍보다 1피트(약 30센티미터?옮긴이) 더 강하다는 말에 아이들이 놀라자, 뉴턴은 비약 거리를 표시한 흔적들을 보여주었다. 이 이야기의 한 판본에 따르면 그는 바람을 교묘히 이용해 멀리뛰기 시합에서 승리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역시 잘난 녀석의 교활한 술수로 여겨져 의심만 증폭시켰다. --- 1권 p.125

해시계는 지적 도전이었다. 뉴턴은 가난한 클라크의 집을 해시계로 가득 채웠는데, 자신의 방은 물론이고 다른 방들과 현관 등 해가 드는 곳은 어디에나 해시계를 만들어놓았다. 그는 이 벽 저 벽에 막대기를 박아 한 시간, 반 시간, 심지어 15분을 표시하게 했고, 그 막대기에 끈을 묶고 둥근 물체를 매달아 하루하루 그림자의 길이를 잴 수 있게 했다. 일종의 책력을 꾸준히 기록한 끝에 그는 태양의 주기들을 구분하게 되었고, 주야평분시(춘분과 추분), 하지와 동지, 그리고 심지어 그 달의 일수도 알아낼 수 있었다. 결국 하숙집의 가족은 물론이고 동네 이웃들도 “아이작의 해시계”를 보게 되었다. 이처럼 천체의 장엄함과 자연의 일정함이 그의 눈앞에 잊지 못할 모습으로 펼쳐졌다. --- 1권 p.126

뉴턴을 이상하고 불가사의하게 여긴 집단은 그랜섬의 학생들만이 아니었다. 울즈소프의 하인들에게도 뉴턴은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존재였다. 한편으로는 주의력이 형편없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끼니를 건너뛰기까지 했으니 그들 눈에는 멍청하고 게으른 소년으로 보이는 게 당연했다. 그들은 “그가 떠난다고 하자 매우 기뻐하면서, 그 아이는 ‘핵교’가 아니면 딱히 맞을 데가 없을 거라 단언했다. --- 1권 p.131

3장 고독한 학생
뉴턴은 이미 그랜섬에서 다른 학생들과 잘 어울리기가 불가능하다는 걸 알았다. 만일 그가 그들에게서 벗어나 케임브리지에서 보다 나은 학생들과 공부하고 있다고 생각했다면, 그건 오산이었다. 이름만 다를 뿐, 똑같은 소년들이 거기에 있었다. 그리고 이제 그는 그들의 빵과 맥주를 매점에서 가져오고 요강을 비워주는, 그들의 하인이었다. --- 1권 p.146

그는 태양만이 아니라 환시도 시신경 내의 혼령들을 흥분시킬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 그는 또한 눈이 망가질 뻔하기도 했고, 며칠 동안 어두운 곳에서 지낸 후에야 색의 환시를 없앨 수 있었다. 그후 뉴턴은 태양은 내버려두었지만 자신의 눈은 그러지 않았다. 약 1년 후 그는 뜨개바늘을 자신의 “눈과 뼈 사이로 눈의 뒷면에 최대한 가까운 곳까지” 밀어넣었는데, 망막의 곡면을 변화시켜 바늘을 누르고 있을 때 나타나는 유색의 원들을 관찰하기 위해서였다. 어떻게 장님이 안 되었을까? 발견에 사로잡힌 뉴턴은 더이상 비용을 셈하지 못했다. --- 1권 p.176

뉴턴은 일단 어떤 문제에 사로잡히면 결코 제시간에 잠을 잘 줄 몰랐다. 심지어 노년에도 하인들은 저녁식사를 차리기 30분 전에 미리 그를 불러야 했고, 식당에 내려와서도 책이나 논문이 눈에 띄면 음식을 몇 시간 동안 기다리게 했다. 그는 저녁식사로 요리했던 식은 계란에 오트밀이나 우유를 곁들여 아침식사를 했다. 콘듀잇은 창의적인 전성기를 보낸 이후의 뉴턴을 오랫동안 관찰했다. 그의 정신은 1664년과 그 이후의 몇 년 동안 탐구의 긴장으로 소모되었고, 이는 그가 울즈소프에서부터 지녀온 모든 신경증을 극한까지 몰고 갔다. 그는 두 차례 이상 “큰 심신의 장애”를 겪었고, 그 원인은 혜성 관찰만이 아니었다. --- 1권 p.191

4장 운동으로 문제를 풀다
유명 인사가 된 후 뉴턴은 보편중력을 어떻게 발견했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의 대답은 “끊임없이 생각해서”였다. 모험의 중심이 행동보다 사유의 세계에 있었던 인간의 삶을 묘사할 때는 물론이고 그 연구 방식을 묘사할 때에도, 그의 특징을 이보다 더 훌륭히 규정할 수는 없다. --- 1권 p.193

뉴턴의 장대한 모험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결국 그의 모험은 균일한 덩어리라기보다 이질적인 부분들의 혼합체임을 알게 된다. 그의 이력은 삽화적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생각을 사로잡은 대상을 끊임없이 생각했다. 이는 오로지, 혹은 거의 오로지 그것만 생각했음을 의미한다. 1664년에 사실상 다른 모든 것을 몰아내고 그의 관심을 사로잡은 것은 바로 수학이었다. --- 1권 p.194

모든 점을 고려할 때, 뉴턴이 1666년 10월에 운동에 의해 문제를 해결하는 법을 쓴 이 소논문은 걸작이었다. 알려만 졌다면 유럽의 수학자들에게 숨 막힐 정도의 감탄, 부러움, 경외를 자아냈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작 배로를 제외하고 유럽의 어느 수학자도 뉴턴이란 사람의 존재를 몰랐다. 배로마저도 1666년에 뉴턴이 이룬 이 성과를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무명이라는 사실은, 스물네 살이 채 안 된 젊은이가 공식 교육에 의존하지 않고서 이미 유럽의 주요한 수학자가 되었다는 나머지 사실을 바꾸지 못한다. 그리고 정작 중요한 단 한 사람인 뉴턴 본인은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모두가 인정하는 대가들을 연구했다. 그리고 그들이 넘지 못한 한계를 알았다. 뉴턴은 그들을 모두 앞지르고, 훨씬 더 멀리 나아갔다. --- 1권 p.239

1665년에 이룬 수학의 업적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깨달은 뉴턴은 분명 그 천재성의 무게가 자신을 짓누른다고 느낀 듯하다. 이때 이후로는 문법학교와 학부생 시절에 간간이 보인 것처럼 또래들의 환심을 사려는 쓸데없는 노력을 거의 기울이지 않는다. 룸메이트인 위킨스와의 친밀한 관계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기고서, 항상 품고 있던 소망에 따라 진리의 오만한 요구에 자신을 내맡겼다. --- 1권 p.241

5장 경이로운 해들
뉴턴은 중도에 포기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는 어떤 것을 생각할 때 그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했다. 그는 1년 반 동안 수학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한 끝에, 자신의 출발점이자 과거의 수학자들이 그를 위해 마련해준 최초의 문제들을 풀 수 있는 새로운 방법에 도달했다. --- 1권 p.250

뉴턴의 메모와 더불어 사과 이야기는, 뉴턴이 1666년의 어느 순간에 보편중력을 통찰했고 그런 뒤 《프린키피아》를 핼리가 억지로 쥐어짜내 세상에 퍼뜨릴 때까지 20년 동안 기본적으로 완전한 형태로 보존하고 있었다는 대중적인 생각에 기여해왔다. 그러나 완전한 형태로 오래 존재했다는 이야기는 뉴턴이 남긴 초기의 역학 연구와 대조해보면 곧 신빙성을 잃어버린다. 사과 이야기는 보편중력을 하나의 영리한 생각으로 취급해서 그 개념을 속되게 만든다. 하나의 영리한 생각은 과학적 전통을 형성해내지 못한다. --- 1권 p.266

보편중력은 한 번의 도끼질로 뉴턴에게 넘어오지 않았다. 그는 망설이고 비틀거렸으며, 압도적인 복잡성 때문에 순간순간 좌절했는데, 그 복잡성은 역학 한 분야에서만도 충분히 컸지만 전체적인 맥락에서는 일곱 배로 불어났다. --- 1권 p.266

1666년이 저물 때 뉴턴은 수학에서도, 역학에서도, 광학에서도 불후의 명성을 안겨줄 연구 결과들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세 분야에서 한 일은 다른 사람들보다 약간 더 포괄적인 기초를 쌓은 것이었다. 그 위에 그는 자신 있게 구조물을 올릴 수 있었지만, 1666년 말에는 아무것도 완성하지 못했을 뿐더러 그 대부분은 완성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이런 평가는 뉴턴의 능력을 축소하기는커녕 더욱 높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업적을 신의 계시 이야기가 아니라 고난과 투쟁의 휴먼드라마로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 1권 p.293

6장 루카스 석좌교수
뉴턴은 거의 자신의 방을 나서지 않았고, 방에서 혼자 식사하기를 더 좋아했다. 식당에서 식사할 때에는 동석자들에게 상냥하게 행동하지 않았다. 오히려 말없이 앉아 있었고, 대화를 시작하지도 않았으며, 마치 그 자리에 없는 것처럼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있었다. 잔디밭 볼링장에서 동료들과 어울리지도 않았다. 그는 다른 사람을 거의 방문하지 않았다. 그를 방문한 사람 중에 트리니티의 동료는 없었다. 세 사람 중 뉴턴은 나중에 비가니와 관계를 끊었다. 그가 “수녀에 대해 점잖지 못한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다. --- 2권 p.37

전체적으로 원뿔곡선에 대한 뉴턴의 논문들은 해석기하학 연구를 새로운 일반성의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그는 유율법과 마찬가지로 이 연구도 책상 안에 쑤셔넣었으며, 25년이 지난 후에 먼지를 떨어내고도 10년을 더 끈 후에야 출판에 착수했다. --- 2권 p.49

다시 한 번 케임브리지의 이름 없는 젊은이가 유럽 물리학계의 지도자인 하위헌스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 실험에서 보여준 뉴턴의 능력은 그랜섬 시절에 갈고닦은 것으로 처음부터 하위헌스를 압도했고, 더 정교해진 1670년 실험은 순진한 경쟁자를 한없이 초라해 보이게 만들었다. 뉴턴이 측정에 쏟은 정성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준다. 컴퍼스와 육안뿐이었지만 그는 측정값의 정확도를 0.01인치(약 0.25밀리미터)까지 기대했다. --- 2권 p.72

뉴턴은 “내 이름이 들어가지 않는다면 좋습니다. 행여 공식적인 존경을 얻고 유지할 수 있다 해도, 그것이 무엇 때문에 바람직한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친분이 늘어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걸 줄이기 위해 주로 연구를 합니다.”--- 2권 p.84

7장 출판과 위기
훅은 재능이 뛰어났지만 머리가 좋다기보다는 말주변이 좋았다. 모든 주제에 관한 아이디어가 있었고, 주저 없이 그것을 출판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와 반대로 뉴턴은 엄밀함이라는 이상에 집착했고 자신의 어떤 생각도 출판할 준비가 되었다고 확신하지 못했다. 훅은 훗날 뉴턴의 논문에 관한 평을 서너 시간 만에 작성했다고 고백했다. 물론 그는 자신의 성급함을 후회했다. 뉴턴은 답장을 보내는 데 3개월이 걸렸다. 훅이 폐병을 심하게 앓아 그해 후반에 시한부 선고를 받은 것도 관련이 있을지 모른다. --- 2권 p.113

절박한 재정적 궁핍도 라이프니츠의 활동을 제약했다. 생계수단이 없었기에 그는 뛰어난 지력에 의존해야 했다. 그것은 하찮은 자산이 아니었다. 하지만 마인츠의 후원자가 그를 사실상 궁지에 몰아넣고 사망했을 때 현실적인 사정은 더욱 절박해졌다. 그는 프랑스 아카데미의 회원으로 임명되거나 학문의 중심에 남을 수 있게 해줄 어떤 다른 자리에 채용되기를 절실히 원했다. --- 2권 p.139

1676년에 라이프니츠는 그의 미적분학을 출판하지 않았다. 그는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않았다. 뉴턴의 자유롭고 솔직한 편지는 그에게 과분함을 넘어 잔인한 딜레마를 안겨줬을 것이다. 자신의 것이라는 주장을 입증하기 전에, 그는 다른 수학자가 먼저 실질적으로 똑같은 방법을 발명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서신들은 올덴부르크를 거쳐 교환되었기 때문에, 그것도 공개적으로 알게 된 셈이었다. 결과가 어떨지는 단지 추측할 수밖에 없고, 두 사람 모두에게 최종적으로 일어난 일보다 덜 불명예스러운 상황이 벌어지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 2권 p.149

훅은 원래 쉽게 발끈하는 성격이고, 뉴턴에게 피해의식을 가질 이유도 있었다. 〈빛의 가설〉이 그의 상처에 부은 것은 진통제가 아닌 독한 위스키였다. 그 상처 때문에 훅은 더 쓰디쓴 증오를 느꼈다. 훅의 빛에 대한 가설은 데카르트의 가설을 윤색한 것일 뿐이라고 뉴턴은 주장했다. 그 자신의 가설은 완전히 달라서 훅은 아마 그런 실험을 난생 처음 보았을 것이며, 뉴턴이 박막을 취급할 때 기초로 삼았던 실험은 해당 주제에 대한 훅의 모든 말을 의심케 한다고 했다. 글을 쓸수록 흥분의 지수는 올라갔다. --- 2권 p.160

8장 반항
그는 화학을 우연히 만나 그 불합리를 발견하고 나서도, 진지하고 “합리적인” 화학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아니, 출발은 진지한 화학이었지만 연금술이 더 심오하다고 느끼고 상당히 일찍 화학을 포기했다_2권 p.180

그가 연금술이라는 공상적인 세계에 들어선 것처럼 보이지만, 그는 자신의 특별한 재능을 문밖에 놓아두지 않았다. 사실, 그럴 수가 없었다. 그는 수학에서 물려받은 엄밀한 지적 기준을 가지고 와서 실험법에 적용했다. 우리는 이미 앞에서 그 위력을 보았다. 뉴턴은 자연은 수량적이라는 기계론 철학자의 직감을 적용했다. 그래서 당시에나 그후에나 뉴턴의 연금술 실험법은 그가 읽은 수많은 책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수량적인 측정에 우선적인 관심이 있음을 드러낸다. --- 2권 p.193

엄격한 신념을 가진 기계론 철학자들은 운동하는 물질의 입자‘만’이 물리적 사실을 구성한다고 주장한 반면에, 뉴턴은 일찌감치 그런 범주가 너무 제한적이라 자연의 실체를 표현하기에는 부족하다고 느꼈다. 그의 지적 오디세이에서 연금술은 중요하다. 그로 인해 더 넓은 전망이 펼쳐졌고, 좁은 기계론적 전망을 보충하고 완성하는 새 범주들이 더해졌다. 뉴턴의 지속적인 명성은 그의 앞에 펼쳐진 그런 가능성들을 놓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비롯되었다 ---- 2권 p.204

1675년이 되기 훨씬 이전부터 뉴턴은 본질적인 의미에서 아리우스파가 되어 있었다. 그에게 그리스도는 신과 인간의 중보자이고, 그를 창조하신 아버지에게 종속된 자였다. 그리스도는 자신을 겸허히 낮춰 죽음을 받아들여 (비록 성부에게 걸맞은 숭배는 아닐지라도) 숭배받을 권리를 획득했다. 뉴턴에게 그리스도는 인간 예수였다. --- 2권 p.227

9장 침묵의 세월
이런 맥락에서 예루살렘 신전의 정확한 형태가 중요해졌기 때문에 뉴턴은 그 형태를 재구성하는 일에 착수했다. 사실 뉴턴의 해석에서 신전 자체는 결코 두드러지게 부각된 적이 없지만, 그 자체로 의미를 지닌 문제가 되어, 모든 문제가 그렇듯 한동안 뉴턴을 지배했다. 그는 신전의 설계와 치수에 집착했다. --- 2권 p.275

더욱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역할에 대한 암묵적인 경시였다. 이는 아리우스주의자라면 아주 쉽게 넘어설 수 있는 단계였다. 그리스도는 새로운 섭리의 대행자라기보다는 모세와 같은 선지자였고, 신을 원래처럼 참되게 숭배할 것을 인류에게 깨우치기 위해 파견된 예언자였다. --- 2권 p.289

뉴턴이 화학물질에 일반적으로 적용한 시험법 중 하나는 맛이었다. 얼얼한 맛은 살 암모니악이 있음을 가리켰다. 과거에 주저함 없이 눈으로 끔찍한 실험을 했던 것처럼, 이제는 중금속과 기타 독성 물질들이 함유된 다양한 화학물질들의 스펙트럼을 맛보았다. 또한 정원에 있는 비좁은 실험실에서 다량의 안티몬과 수은을 포함한 여러 위험 물질들을 증발시켰다. 최근에 뉴턴의 머리카락 샘플에 함유된 중금속과 기타 화학물질의 농도를 최신 기술로 시험한 적이 있다. 그 머리카락은 활발한 실험을 끝낸 후로부터 30년이 지난 노년의 샘플이었다. 따라서 그의 몸에 축적된 문제의 물질들은 자연적 감소를 겪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테스트한 거의 모든 물질이 20세기의 평균치보다 몇 배나 높았다. --- 2권 p.304

10장 프린키피아
“1684년에 핼리 박사가 케임브리지로 그를 찾아왔고, 두 사람은 한동안 함께 머물렀다. 박사는 그에게 태양을 향한 인력이 그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고 가정하면 행성들이 어떤 곡선을 그릴 거라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아이작 경은 즉시 타원일 거라고 대답했다. 기쁨과 놀라움에 사로잡힌 박사가 경에게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고 묻자, 경은 자신이 계산을 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핼리 박사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그 계산을 보여달라고 요청했다. 아이작 경은 논문들을 뒤적이며 찾았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 하지만 다시 계산을 해서 그에게 보내주기로 약속했다.” --- 3권 p.13

《프린키피아》는 뉴턴의 기념비적인 업적일 뿐만 아니라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현존하는 문서상으로 그는 여러 분야에서 비범한 재능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우리도 알고 있듯이 완성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1684년까지 그의 연구는 미완성의 수학 논문들로 어수선했다. 그는 자신의 유망한 통찰력을 역학에는 발휘하지 않고 있었다. 그의 연금술 연구는 정리되지 않은 메모와 쓰다 만 에세이가 뒤섞인 혼돈 그 자체였다. 만일 뉴턴이 1684년에 죽고 그의 논문들이 오늘날까지 전해졌다면, 우리는 그 논문들로부터 어떤 천재가 살았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를 현대의 지성을 빚어낸 인물로 찬양하는 대신 기껏해야 그의 실패를 탄식하는 짧은 언급만 남기고 지나갈 것이다. --- 3권 p.19

뉴턴은 험프리를 케임브리지 곳곳에 보내 지인들과 칼리지 학장들에게 증정본 스무 권을 돌렸다. 그중에 어떤 사람(특히 트리니티의 배빙턴 박사)은 “이 책에서 하나라도 이해하려면 7년은 연구에 전념해야 할지 모른다”고 말했다. 결정적인 말은 한 학생의 입에서 나왔다. 뉴턴이 그 학생을 거리에서 지나칠 때, 그는 왕정복고 시대에 케임브리지에 은신해 있는 이 천재가 바랄 만한 궁극의 ‘축사’를 건넸다. “저기 가는 사람이 남들은 물론이고 자기도 이해하지 못하는 책을 쓴 사람이래.” ---- 3권 p.114

11장 혁명
뉴턴의 《프린키피아》가 잇따라 나오는 동안 에드먼드 핼리는 감탄을 연발했다. 출판과 거의 동시에, 그 핵심 개념인 원격 운동을 부정한 사람들조차 《프린키피아》가 신기원을 여는 책이라는 것을 인정했다. 이는 20년 동안 방치해두었던 연구를 마침내 완성한 뉴턴에게 큰 전환점이 되었고, 《프린키피아》 역시 자연철학에 전환점이 되었다. 뉴턴의 삶이 예전으로 돌아가기란 불가능했다. 뉴턴의 책은 영국을 강타했고, 출간되자마자 지배적인 정통 이론이 되었다. 유럽대륙에서의 승리는 보다 오래 걸렸지만, 그럼에도 그곳에서 《프린키피아》를 모른 체할 수 없었다. --- 3권 p.120

뉴턴은 대다수의 동포들이 그가 가진 견해를 싫어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아니,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라 점잖은 사람들의 코로 들어가는 공기를 오염시키는 배설물인 양 질색을 했다. 뉴턴은 그 사실을 잘 알았기에 지난 15년 동안 숨죽이고 살았다. 의회에서 논쟁을 하든, 어떤 조항이 진지한 반론과 논쟁을 일으키지 않고 통과되든, 그는 다시 한 번 그 사실을 마음에 깊이 새겼을 것이다. --- 3권 p.143

훅은 귀가 얇은 모든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표절 논란을 퍼뜨렸기 때문에 이 시기에 뉴턴은 《프린키피아》와 관련해 세세한 주의를 기울였다. 1694년 그레고리가 찾아왔을 때 그는 1669년 이전에 쓴 한 원고를 잊지 않고 보여주었다. “그 원고에는 그의 철학의 모든 기초, 즉 달이 지구에 미치는 중력, 행성들이 태양에 미치는 중력이 담겨 있고, 사실 이미 당시에 모든 것에 대해 계산을 마친 상태였다.” (…) 훅에 대해 뉴턴은 단지 경멸을 표했다. --- 3권 p.185

1693년은 《프린키피아》 이후 긴장된 지적 노력이 절정에 도달한 해였으며, 만일 뉴턴이 1693년 이후에 일관된 정신을 온전히 유지했다 해도, 그가 중요한 연구를 새로 시작하지 않은 것은 여전히 사실이다. 그는 더이상 젊은이가 아니었다. 1693년의 위기로 그의 창조적 활동은 마침표를 찍었다. 자연철학과 수학뿐 아니라 신학에서도 그는 34년이라는 남은 생애 동안, 관직 활동을 피난처로 삼아 공무에 시간을 뺏기지 않는 한에서 이전의 성과를 고치고 손질하는 일에 몰두했다. --- 3권 p.234

12장 조폐국
조폐국 내부는 모든 활동이 광란을 방불케 했다. 런던탑 경비대장인 루카스 경은 아침 5시에도 성문을 열기에 이르다고 생각했다. 재무부는 4시에 성문을 열라고 명령했다. 일은 자정까지 계속되었다. 헤인스에 따르면 거의 300명의 직공이 비좁은 조폐국 공간에서 밀치락달치락하며 일했고, 말 50마리가 열 대의 기계를 돌렸다고 한다. 말에 밟혀 죽은 사람도 있었다. 아홉 대의 커다란 프레스가 뉴턴의 계산을 빌리자면 분당 50~55회의 속도로 엄청난 소음을 내며 주화를 찍어냈다. 초인적인 노력으로 조폐국은 1696년의 하절기 동안에 주당 10만 파운드까지 생산량을 끌어올렸고, 연말까지 총 250만 파운드를 주조했다. --- 3권 p.269

버닛 주교는 그가 뉴턴을 존경하는 것은 “그의 모든 자연철학보다 훨씬 더 가치 있는 어떤 것 때문이며, 그가 아는 사람 중 ‘가장 순백한’ 영혼의 소유자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더도 말고 단지 그가 훅과 플램스티드를 어떻게 대했는지 들여다볼 때, 지금까지 가장 순백해 보였던 영혼에 약간의 검은 흔적들이 묻어 있음을 알게 된다. 성적 행위를 다른 도덕적 행동과 구분지어야 할 이유는 없다. 뉴턴의 역사적 역할은 학문적인 것이었지, 도덕적 리더십이 아니었다. --- 3권 p.336

주화 공급의 관리에 대한 뉴턴의 강조는 시대를 앞섰는지는 몰라도, 이 논문이나 다른 논문들을 근거로 그를 주요한 경제사상가의 반열에 올려놓으려 해서는 안 된다. 1690년대에는 전쟁이 유발시킨 재정 위기의 압력하에서 경제 정책에 관한 소책자가 다수 출판되었는데, 역사가들은 이것을 경제학이라는 학문 분야의 기원으로 간주해왔다. 뉴턴은 분명 이 문헌들, 특히 로크가 쓴 글들을 읽었을 것이다. 대체로 뉴턴의 관점은 다들 인정하고 있는 견해들을 되풀이하는 것에 그쳤다. --- 3권 p.362

13장 왕립학회장
뉴턴이 런던 생활을 시작한 초기에 학회의 상황은 열악했다. 1670년대에 처음 몇 년간 200여 명에 달하던 회원 수는 이제 그 절반을 간신히 넘겼고, 매주 회의에 참석하는 회원도 거의 없었다. 회의 내용을 적은 의사록에 비추어볼 때 참석하지 않은 사람들을 비난만 할 수는 없다. 계획도 체계도 없는 회의는 대부분 진지한 과학적 주제에서 벗어난 의미 없는 잡담으로 끝났고, 40년 전에 과학자들을 하나로 불러모은 흥미로운 주제는 거의 다루지 않고 있었다. --- 4권 p.11

뉴턴이 왕립학회장으로 선출된 직후부터 그 모임이 갑자기 철학적 효소가 끓어오르는 심오한 토론으로 바뀐 것처럼 말하기는 도저히 불가능하다. 기괴함에 대한 학회의 욕구는 만족을 몰랐다. 해부를 하던 기간 중에 더글러스 박사는 “약 10일 전에 입 없이 태어났지만 충분히 자란 강아지”를 보여주었고 일주일 후에는 그 두개골을 가져왔다. 1709년에는 “암퇘지가 죽은 후 배에서 꺼내어져 얼마간 저희들끼리 자란 돼지 네 마리를 공개했다. --- 4권 p.22

《광학》의 내부 사정은 수학 논문들의 사정과 어느 정도 동일했다. 뉴턴의 과학적 사고에 대해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한에서 《광학》에는 새로운 내용이 전혀 없었다. 단지 아주 작은 몇 가지를 제외하면 30여 년 전에 완성했던 그대로이며, 그 예외들도 1680년대 초로 거슬러 올라갔다. 그러나 유율법과는 달리 《광학》은 다른 과학자들의 연구와 겹치지 않았다. 1704년에, 뉴턴이 1672년에 발표한 논문의 의미를 소화한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따라서 《광학》의 충격파는 《프린키피아》에 버금갔다. 어쩌면 《프린키피아》를 능가했을지 모른다. --- 4권 p.31

14장 우선권 논쟁
지난 석 달간의 서신 교환은 뉴턴에게는 새로운 경험이었다. 처음에는 탐탁지 않아 했지만, 코츠에게 진지한 과학적 대화를 주도하도록 허락한 것이다. 이는 훗날 코츠와 주고받은 토론을 제외하고는 그의 서신 전체를 통틀어서도 유례를 찾기 어렵다. 처음에 그의 편지들은 무뚝뚝하고 차가웠으며 심지어 말을 퉁명스럽게 자르기까지 했다. 그러나 6월 무렵에는 어느덧 그와의 토론을 즐기고 있었다. --- 4권 p.138

그러는 사이 라이프니츠의 편지가 도착했다. 편지에 내포된 의미를 곱씹어보던 뉴턴은 급기야 다른 모든 주제가 그의 생각에서 거의 지워질 정도로 그 편지를 의식하기 시작했다. 그후 몇 년 동안 모든 종류의 문서는 라이프니츠를 향한 분노의 글로 중단되었고, 뉴턴은 특유의 방식으로 신중함에 무한한 신중함을 더해 분노의 문장들을 면도날처럼 예리하게 갈았다. --- 4권 p.148

한편 라이프니츠는 인정받고자 하는 열망, 그리고 생계 수단인 지적 자산을 쌓고 지키겠다는 욕구에 이끌려 1684년에 치명적 실수를 범했다. 1676년의 서신들을 언급하지 않고서 그 엄청난 발명품의 명예를 독차지하려 했던 것이다. 뉴턴에게 이는 신의 자비로도 용서받을 수 없는 라이프니츠의 원죄였다. --- 4권 p.159

뉴턴 역시 익명의 방패 뒤에 숨거나 다른 사람의 입을 빌려 이야기했다. 미묘한 암시는 존 케일의 어법이 아니었다. 노골적이고 거친 그의 어투는 학계에서 뉴턴의 대의에 큰 손해가 되었고 곧 지식인들의 경멸을 불러일으켰다. 베르누이는 인쇄물에서 그를 “뉴턴의 오늘”이자 고용된 펜이라 묘사하고, 그의 이름을 언급하는 대신 매번 “어떤 스코틀랜드족 사람”이라 칭했다. --- 4권 p.163

15장 쇠락의 세월
왕립학회장일 뿐 아니라 나날이 명성이 치솟고 있는 유럽 최고의 유명 과학자로서 뉴턴은 본의 아니게 이전 어느 때보다도 더 런던을 여행하는 지식인들이 가능하면 만나보고 싶어 하는 인기 관광 상품이 되었다. 콘듀잇이 들은 바에 따르면, 교황의 비서실장인 브란키니 예하는 뉴턴을 보겠다는 특별한 목적으로 런던까지 먼 거리를 여행했고, 마르실리 백작도 그랬으며, 드 로피탈 후작(유명한 수학자였다)도 같은 것을 바랐지만 그 전에 눈을 감았다고 한다. --- 4권 p.339

캐서린의 말대로 거품이 붕괴했을 때 뉴턴이 2만 파운드를 잃었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는 분명 남해회사에 큰돈을 투자했으니 손해를 피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후에 스펜스는 래드너 경의 회고를 인용했다. 투기 열풍이 한창일 때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구치던 남해회사의 주가에 대해 뉴턴이 이렇게 평했다는 것이다. “사람들의 광기는 계산할 수 없었다네.”
--- 4권 p.3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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