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링브로크 측은 리처드가 왕관과 홀을 건네고 새로운 왕 헨리를 축복해주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고, 퇴위가 당연하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납득시키기 위해 그와 신하들의 죄상을 기록한 탄핵문을 읽으라고 재촉한다. 리처드는 그것을 거부하고 거울을 가져오게 한다. 자신이 그때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보기 위해서다. 그리고 젊고 아름다운 얼굴을 비추는 ‘아첨꾼 사자’인 거울을 바닥에 내동댕이친다. 슬픔에서 자조까지의 다양한 감정이 그의 가슴속을 오가고, 시인 기질인 그의 자질이 결정된 것 같은 명장면이다. ---「리처드 2세」중에서
부왕에게 호출되어 마음을 고쳐먹으라는 말을 들은 핼은 전장에서 반드시 핫스퍼의 머리를 바쳐 명예를 만회하겠다고 맹세한다. 왕은 왕자에게 전군의 지휘권을 주고 폴스태프도 보병 대장으로 출진한다. 양군이 결전을 벌이는 곳은 슈루즈버리다. 핼은 핫스퍼를 보기 좋게 쳐 죽인다. 옆에서 죽은 척하고 있던 폴스태프는 핫스퍼를 쓰러뜨린 사람은 자신이라고 주장한다. 어디를 가나 폴스태프는 끝까지 변변치 못하다. ---「헨리 4세 제1부」중에서
군을 이끌고 아일랜드에서 돌아온 요크 공작은 정적 서머싯이 수인으로서 런던탑으로 보내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군을 해산한다. 하지만 그 말이 거짓이라는 사실을 알자 요크는 곧바로 헨리와 대면하여 직접 왕위를 요구하고, 끝내 세인트올번스 전투로 장미전쟁이 시작된다. 남자 못지않게 굳세고 억척스러운 왕비 마거릿, 요크 공작과 그의 아들들, 드디어 장미전쟁의 핵심적인 ‘배우’들이 ‘무대’의 중앙으로 뛰쳐나온다. ---「헨리 6세 제2부」중에서
광포한 야심을 품고 왕좌에 오르는 계단을 피투성이로 만들면서 올라가는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 신체적인 열등감을 발판 삼아 야망의 실현에 박차를 가한다. 정평 있는 악당이면서, 아니 악당이기에 그는 셰익스피어 극의 모든 등장인물 중에서 최고의 매력을 발한다. 이 인물의 경우, 악이란 도덕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함의 표현이자 자기 욕망의 충실한 구현이다. 갖고 싶은 것을, 수단을 가리지 않고 손에 넣지 않으면 성에 차지 않는다. 남에게 끼치는 폐가 극심한 일이라 보통 사람을 할 수 없는 일이다. 아울러 한층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연기력. 그의 훌륭한 연기는 앤에게 구혼할 때만이 아니라 곳곳에서 발휘된다. 그리고 에너지, 기지와 블랙 유머, 그가 전형적인 마키아벨리언으로서 악행을 거듭해가는 모습은 상쾌하기조차 하다. 악이 눈부시게 빛난다. ---「리처드 3세」중에서
동서고금의 비극적인 연애의 정수. 그것을 두드러지게 하는 것은 양가의 대립만이 아니다. 늙어가는 부모 세대와 젊은 세대의 대비도 있다. 그리고 두 명의 젊은 주인공을 둘러싸고 있는 난잡하고 희극적인 인물들. 연애라는 것을 항상 하반신으로 끌어내리고야 마는 머큐쇼와 줄리엣의 유모는 그 전형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중에서
크레시다는 연인을 배신하는 바람기 있는 여자의 대명사다. 그녀의 숙부 판다라스의 이름에서는 ‘pander’라는 동사가 생겨나고 이는 남녀 사이를 알선한다는 의미다. ‘뚜쟁이’라는 보통명사가 되어 있기도 하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는 이 극이 분명히 보여준다. ---「트로일로스와 크레시다」중에서
온통 푸르게 우거진 잎들도 시들기 시작하고 거목이 쓰러지는 것 같은 오셀로의 최후이지만, 그보다 더 참혹한 것은 데스데모나의 마지막 외침이다. “오늘 밤에는 살려줘요. 죽일 거라면 내일 죽이세요.” ---「오셀로」중에서
리어 왕이 범한 가장 큰 실수는 애정이라는 계량할 수 없는 것을 재려고 한 일일 것이다. 사람의 진의를 간파하지 못한 점도 있다. ‘보다’ ‘눈’ ‘시력’ 등이 키워드인 『리어 왕』. 그렇게 흐려지는 것이 ‘늙는다는 것’ 자체인지도 모른다. ---「리어 왕」중에서
셰익스피어의 극에는 몇 쌍의 부부와 연인이 나오는데, 그중 가장 강력한 유대로 맺어진 이들은 맥베스 부부가 아닐까? 그런 만큼 인생 최대의 위기에 빠졌을 때 아내의 죽음은 엄청난 타격이다. “내일, 또 내일, 또 내일, 이렇게 시간은 종종걸음으로 하루하루를 걸어가 끝내는 역사의 마지막 한순간에 이른다. 어제라는 날은 모두 어리석은 인간이 먼지가 되는 죽음으로 가는 길을 비쳐왔다. 꺼져라, 꺼져라, 한순간의 등불!” 이 독백을 한 뒤 최후의 일전에 임하지만 맥베스의 생명의 등불은 사실상 여기서 꺼진다. ---「맥베스」중에서
안토니가 결혼했다는 사실을 안 클레오파트라의 반응은 과연 아름답고 교만하며 자존심 강한 이 인물답다. 그녀는 심부름꾼을 때리고 그에게 온갖 욕설을 퍼부으며 끌고 다닌다. 그 후 옥타비아의 얼굴, 몸매, 목소리, 머리색, 나이 등을 묻고 ‘대단한 여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자마자 심부름꾼에게 ‘눈이 높다’고 말하며 황금을 내려준다. 여기에는 여자의 경쟁심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중에서
대단원은 세상이 다 아는 대로 일족의 재회이다. 눈앞에 안티폴루스와 드로미오가 둘씩 있기 때문에 모두가 경악을 금치 못한다. 죽었다고 생각한 쌍둥이의 어머니는 이곳에서 수녀원장이 되어 있어 그녀의 말로 이지온도 포승이 풀린다. 포복절도하면서도 눈물이 절로 나고, 게다가 기적을 목격하는 것 같은 지극히 행복한 느낌이 든다. 그 모든 것의 근원이 ‘착각’에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착각의 희극」중에서
이 극에서는 귀족이나 궁정 여성들이 신소리를 비롯한 다양한 언어유희에 뛰어난 머리와 혀를 보여주는 한편 그들과는 계급이 다른 학교 교사나 신부, 색다른 스페인 사람이나 그의 하인, 치안판사에 이르기까지 말을 장난감처럼 다루며 희롱한다. 모두가 말의 힘과 재미에 취해 있다. 『사랑의 헛수고』는 셰익스피어의 ‘말에 대한 열의’가 등장인물 전원에게 감염된 극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사랑의 헛수고」중에서
묘령의 아가씨와 사내가 서로 독설을 퍼붓는 경우, 그들의 독설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진의는 어디에 있는지, 조심해서 ‘그 마음’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헛소동』의 주인공 베아트리체와 베네딕의 경우가 바로 그렇다. ---「헛소동」중에서
사랑이 시작되는 방식은 여러 가지다. 하지만 왕도라고 할 만한 사랑의 시작은 첫눈에 반하는 것이리라. 셰익스피어도 이 극에서 ‘사랑에 빠진 사람치고 첫눈에 반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라고 양치기 여자 피비에게 말하게 한다. 아무튼 셰익스피어가 그린 연인들이 사랑에 빠지는 속도는 말할 수 없이 빠르다. 전광석화. 그 대표가 로미오와 줄리엣이고 『좋으실 대로』의 올랜도와 로절린드다. ---「좋으실 대로」중에서
그 폴스태프가 중세에서 엘리자베스 왕조의 윈저라는 도시로 끌려나온 것이 『윈저의 유쾌한 아낙네들』이다. 이 희극이 쓰인 경위는 하나의 전설이 되어 있다. 『헨리 4세』를 본 여왕 엘리자베스 1세는 이 사랑할 만한 무뢰한이 무척 마음에 들어 폴스태프가 사랑을 하는 연극이 보고 싶다는 분부를 내렸다. 그래서 셰익스피어는 2주 만에 『윈저의 유쾌한 아낙네들』을 썼다는 것이 그 전설이다. ---「윈저의 유쾌한 아낙네들」중에서
질투, 의심, 우정의 결렬, 무고한 죄, 죽음, 천벌 등이 그려지는 전반부의 비극적인 분위기는 16녕의 세월을 거쳐 보헤미아로 옮겨가 밝고 색채가 풍부한 목가적인 세계로 일변한다. 방물장수이자 똘마니 악당인 아우토리쿠스의 노래와 쾌활한 속임수, 퍼디타와 플로리젤의 사랑, 양털 깎기 축제, 그리고 등장인물 전원이 다시 모이는 시칠리아 왕궁에서의 클라이맥스는 헤르미오네 ‘조각상’이 움직이는 순간이다. 재생과 용서와 화해.
『겨울 이야기』는 현실 세계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을 있을 수 있다고 믿게 해주는 극이다. 다양한 시련을 겪으며 결백은 반드시 증명되고, 오해는 반드시 풀리고, 뿔뿔이 헤어진 사람은 꼭 재회한다는 우리의 궁극적인 바람이 여기서는 이루어진다.
---「겨울 이야기」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