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과 춤을 비롯한 공연이 ‘오고 있다’는 말은 글로나 가능한 서술일 뿐, 모든 것은 떠나가고 있다. 이 책이, 사라지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은 한국사회에서 공연예술에 대한 옹호이며, 사라질 수밖에 없는 공연의 자취로 받아들여졌으면 좋겠다.---p.6
정확하게 말하면, 뮤지컬이 빨리 가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뮤지컬의 속도를 빠르게 할 뿐이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정상적인 삶의 궤적을 담아 내지 못하고 있다. 속도감에 빠져 미친 세상은 파멸을 예감한다. 정신없는, 정신이 나간 세상처럼. 뮤지컬의 광포함에 반하는 순수 연극의 정체는 연극 그 자체 탓만은 아니다. 분명한 것은 연극보다 더 빨리 가는 것이 바로 미쳐 날뛰는 세상이라는 점이다. 그 결과 연극은 저 멀리 빠른 속도로 앞서가는 세상을 보지 못하고, 세상은 천천히 뒤따라오는 오다가 멈춘 것으로 보이는 연극을 되돌아보지 못한다.--- p.22
마지막으로 한마디, 공연 포스터는 두 명의 여자 배우가 화사한 옷차림으로 후미진 골목길 계단 가운데에 앉아 있는 모습을 담고 있다. 한 명은 두 다리를 벌린 채, 다른 한 명은 허벅다리를 드러낸 채. 이들 모두는 왼쪽 팔을 얼굴에 대고 앞을 바라보고 있다. “형식과 위선의 낡은 탈을 벗어버리고 처녀비행이 시작됩니다”라는 홍보문구가 그들 머리 위에 씌어져 있다. 이 포스터는 보는 이의 관심을 끌지만 희곡의 내용과는 무관하다. 극중에서 약아빠진 세상사를 터득하지 못한 연극인의 모습과 달리 포스터의 의도는 분명하다. --- p.45
배우 윤석화가 눈물로 연기의 세월을 보내는 이유를 이제 알 만하다. 평면적인 연출과 무대의 빈 곳을 채울 수 있는 것은 그로서는 눈물이었을 것이다. 여섯 번 옷을 갈아입고 다섯 번 구두를 갈아 신고 텅 빈 무대에 선 그는 스스로의 허함을 어찌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막막한 무대와 1950년 전쟁 전의 분위기, 이를 몸에 저장해야 하는 그녀가 대사에 몸을 얹을 수도 없고 연출에 기댈 수도 없다면, 그녀로서는 마지막 숨겨 놓은 카드를 쓰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즉석에서 빼낼 수 있는 눈물이 아니던가. 관객들은 그의 눈물이 상투적인 것이 아니길 바랄 뿐이다. --- p.50
배우들이 고전희곡의 대사들을 술술 외운다. 연극과 배우는 고전을 말할 때 가장 아름답다. 고전작품은 여전히 희망이다. --- p.58
어린이연극들이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러한 연극들을 조금이라도 눈여겨본 사람이라면 그 질적인 무질서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연극들은 어른들을 대상으로 하는 연극보다 그 내용이 쉬운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어린이연극이 어른을 위한 연극보다 보기 쉽다고 생각하는 것은 커다란 잘못이다. 그런데도 어린이연극을 만드는 대다수 극단들은 몇 개의 문장으로 요약 가능한 도덕책 같은 이야기를 늘려서 어린이연극을 양산해내고 있다. 전혀 밀도가 없는 말투, 표현과 언어경제 원칙을 거꾸로 이행하고 있는 듯한 연극들이 어린이연극의 인플레 현상을 빚어내고 있다. --- p.102
배우들의 연기에선 허튼 짓이 보이지 않았다. 필자는 특히 무대 위 배우들의 엄정함을 좋아하는데, ?애벌레?에 등장하는 배우들은 약속한 동작, 공간을 넘어서지 않았을 뿐더러 공연 내내 집중하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그 공덕은 고스란히 관객들에게 전달된다. 1시간 40분가량 관객들이 공연 속으로 빠져들 수 있었던 것은 배우들이 보여준 집중력 덕분이다. --- p.139
작금의 지원형태는 일회성 소모에 치중되어 그 위험이 많다. 마치 2000년이 시작될 때 벌어진 ‘밀레니엄 축제’처럼 일회적이고 소모적인 지원에 불과하다. 운 좋게 지원금을 받은 작가는 품위를 잃어버리고, 그럴수록 작가의 존재와 작품의 수준은 더 추락하는 것 아닌가. 작품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 버젓이 공연된다면 그것은 연극의 미적 가치와 판단을 송두리째 무화시키는 일이다. 그런 식으로 계속된다면 한국연극은 연극의 사회화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끼리끼리 모여 사는 폐쇄회로 속에 갇히고 말 것이다. 작가의 고독, 영원한 고전을 위한 문예지원제도가 절실하다. --- p.141
말하는 원숭이의 등장, 추송웅이란 배우가 했던 이 모노드라마는 관객들의 폭발적인 호응에도 불구하고 그 끝은 좋지 않았다. 카프카가 아니라 배우 추송웅이 도드라졌고, 공연은 동물이 인간으로 변할 수밖에 없는 절박함보다는 피이터란 원숭이로 분장한 배우로 더 많이 알려졌었다. 이 작품이 공연되었던 창고극장은 지금 없어졌고, 배우 추송웅는 1985년 마흔넷의 나이로 요절했다. 그 후 20년이 꼬박 지난 지금, 이 작품은 배우 권혁풍에 의해 다시 공연되고 있다. 세월이 흐르고, 배우가 바뀌고, 극장이 달라졌어도 제목은 변하지 않은 채로 있다. 이번 공연에는 관객들이 쉽게 작품에 몰입하도록 마술을 곁들이고 있다. 이는 막다른 골목에 도달한 인간의 위기를 앞질러 말하는 음울한 사색에 사족과 같을 것이다. 20년 동안 이 작품의 공연내력을 보면 변신에 의해서 안으로 향하는 ‘보고’와 바깥으로 향하는 ‘고백’과 눈속임의 ‘마술’이 갈마들었다. --- p.171
신인 연출가를 초대한 배우들의 극단도 지켜야 할 예의는 있는 법. 그러나 이 연극에 연출은 부재하고 연출가는 보이지 않는다. 프로그램에서도 화사한 배우들과 열 명의 스탭들을 담은 사진들을 지나, 작품 배경과 내용을 담은 글을 건너, 초대의 글, 작가의 글, 인도네시아 대사의 인사말, 연극협회 이사장의 글, 국립중앙 극장장의 글, 국립극단장의 인사말과 같은 말과 글의 성찬을 넘어 연출가의 말은 말석에 자리 잡고 있다. 이것도 공연의 상처가 될 것이다. 공연의 상처란 곧 관객의 실망이고 국가예산의 낭비일 터이다. --- p.309
평론가가 극장에 가기가 싫다는 것은 좋은 작품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대개 평론가들은 금요일 오후가 되면 연극평론가로서 보고 글 쓸 작품을 결정해야 한다. 극장에 가기 전에 자료를 통해서 볼 작품을 결정하게 되는데 비평의 대상이 될 만한 작품을 고르는 일이 무척 어렵다. 이름을 대면 알만한 오늘날 한국 연극의 연출가와 희곡작가들은 대학로에 있지 않고 학교에 있다. 그런 통에 대학로에서 볼 수 있는 작품에 관계된 작가들은 대부분 신인인 경우가 많고 극단들도 마찬가지이다. 연령층으로 보면, 한국연극에는 40대와 50대 연출가와 작가 그리고 배우들이 없다. 거칠게 말하면 한국연극에는 은퇴가 없는 노년층과 검증이 안 된 신인들만 있다. --- p.326
연극과 텍스트의 문제는 ?강풀의 순정만화?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만화는 책임이 없다. 있다면 그것은 남루해진 오늘날 한국연극에 있다. 한국 현대연극과 관객들은 ?강풀의 순정만화?를 어떻게 여기고 있을까? ?강풀의 순정만화?를 인터넷에서 볼 수 있었던 것처럼, 이 만화가 연극화된 것을 소개하는 인터넷 글들을 참고하면 좋겠다. “2003년 10월 미디어 다음에 연재돼 하루 평균 조회 수 200만회를 기록하는 등 인터넷 만화의 모든 기록을 갈아 치우며 신드롬을 일으켰던 강풀의 ?순정만화?가 연극으로 선보인다.” 오늘날 한국연극은 이처럼 심심해졌다. 타고난 제 스스로의 모습을 유지하기 어려운 만큼 가볍게 변모했고, 가늘게 흔들리고 있다. 연극이 만화와 만날 수 있었던 큰 이유는 여기에 있다. 목말라 하고 있었던 것은 만화가 아니라 연극이었던 셈이다. --- p.385
「미친 햄릿」을 한 이들도 공연 프로그램에 다음과 같이 셰익스피어를 고발한다고 적어 놓았다. “무대와 객석을 분리, 살아있는 극장을 죽인 죄, 언어중심의 표현을 내세워 배우의 다양한 표현력을 말살시킨 죄, 관객들의 집중과 이해를 교란한 죄, 제의적 요소와 연극의 신성성을 없앤 죄.” 연극은 눈앞에 관객을 앉혀놓고 벌이는 존재에 대한 해석이지, 작가와 작품을 고발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나는 고전을 고발할 것이 아니라 더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마음을 가장 깊이 들여다본 사람, 셰익스피어를 다시 읽고, 그를 마음의 깊은 우물 속에 담아 두어야 한다고 여긴다. 그리고 씌어진 텍스트는 말을 할 줄 모르고 잠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연출은 희곡을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을, 공연은 아무 것도 소유하지 못하는 행위라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고 젊은 연극인들에게 말하고 싶다. 연출가가 느끼는 두려움이란 너무나 친숙한 텍스트가 주는 억압의 흔적일 것이다. 희곡을 모두 안다고 말하는 것은 연출가를 눈멀게 한다고 나는 뒤늦게 배웠다.
--- p.4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