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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틸 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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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ill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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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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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07년 12월 28일
쪽수, 무게, 크기 214쪽 | 348g | 139*207*20mm
ISBN13 9788990809209
ISBN10 8990809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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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내리던 것이 아니다. 눈송이로 가득 찬 이 우주가 나를 세계의 정상을 향해 데려가고 있던 것이다. 조용히, 미끄러지듯, 쉼없이 나는 이 세계의 정상을 향해 상승하고 있다. 내가 앉은 바위가 올라가고, 바다로 불리는 엄청난 양의 물결이 작은 파동도 없이 나와 함께 올라가고 있다. 눈이 내린다는 생각은 나의 착각이었다. 눈이 내리는 게 아니라 내가 올라가고 있었던 것이다.
얼마나 더 올라가야 눈발이 시작된 하늘에 도착하는 걸까, 눈이 타고 내려온 실이 나를 붙잡아 올리는 걸까, 저 가벼운 눈송이들이 나를 끌어올리는 걸까……. 절반쯤 바위가 된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다만 아주 천천히, 내가 속한, 혹은 나를 집어삼킨 이 세계가 나와 함께 하늘로 올라가고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나는 그렇게 확신했다.”--- 본문 중에서

나와 나를 둘러싼 세계 사이에는 언제나 일정한 거리가 유지되고 있었다. 나는 그 거리를 유지하면서 세계를 관찰할 수 있었다. 사사이도 그 세계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거리만 유지한다면 내가 아무리 가까이 다가가도 세계는 나를 상처 입히지 못한다. 나는 그렇게 자신했다.

“세상이 좋아졌잖아. 뭐든 필요한 게 있으면 편의점에 다 있다구. 편의점이라는 창고에 필요한 물건을 쌓아뒀다고 생각하면 돼. 옷은 길거리에서 파는 걸로 사 입었다가 시즌 끝나면 버리면 되고. 책도 문고판만 읽어. 냄비나 밥그릇 같은 건 꼭 필요한 것만 준비해놓고. 그렇게 하면 가구도 필요없어. 슬리핑백 하나면 충분하지. 이 정도로 충분하다는 생각만 하면 그리 나쁠 것도 없어.”--- 본문 중에서

“특별히 높은 산도 아니고, 유명한 산도 아냐. 그냥 산이야. 그래서 이 사진을 볼 때는 다른 사진을 보듯 바라봐선 안 돼.” 사사이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무 생각도 하지 마. 뜻을 좇아서는 안 돼. 산은 의미가 없어. 의미가 없는 산을 의미가 있다고 보기 때문에 의미가 생기는 거야. 모양은 모양으로만 봐야 해.”

“난 다른 세계를 원했으니까.”
“다른 세계라니?”
“쉽게 말해서 난 투명인간이 된 거야. 인간관계가 지배하는 네트워크 속에서 하나의 이음매로 기능하고, 그에 알맞은 보수를 받으며 살다가 때려치운 셈이지. 이 사회에서 나는 필요할 때마다 아르바이트라는 무명의 노동력을 제공하는 존재에 불과해.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지. 한마디로 투명인간이야.”

“1만 년 전엔 사람들 마음이 별과 직접 닿았어. 손은 영양의 목을 비틀어도 마음은 별을 보고 있었지.”
“지금은?”
“지금은 이도저도 아냐. 모든 게 중거리야. 근접작용도, 원격작용도 없어. 모든 게 애매모호해. 어중간한 위선으로 꾸며진 현실이 전부야.”
“그렇긴 하지만 덕분에 편해졌잖아. 편하게 살려고 사람들은 자신을 위해 현실을 만들었어. 안전한 외계를 쌓아올린 셈이지. 아까도 말했지만 지금은 너 같은 인간이 특별한 취급을 받는다구.”--- 본문 중에서

칸나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무인탐사선의 운명을 헤쳐나가야 한다. 어쩌면 칸나는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칸나는 벌써 오래 전부터 다른 세계를 비행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가끔 그가 모르는 세계에 대해 보고해왔는지도 모른다. 몇 년이라는 시간이 더 흐르면 딸과 자신의 거리는 지금보다 더욱 멀어질 것이다. 전자파가 닿는 데에 몇 시간씩 걸리고, 서로에 대해 궁금해하면서도 마음은 닿지 않는다. 오래지 않아 칸나는 아버지라는 세계에서 벗어날 것이다. 자신이 가보지 못한 세계를, 그래서 아무 말도 해줄 수 없는 세계를 여행하게 될 것이다. 그래도 쓸쓸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세계엔 나름대로 재미있는 별들이 많을 테니까. 도대체 난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저 우주는, 그리고 인간의 세계는 너무나도 넓다. 어쩐지 나는 센티멘털해지고 있다, 라고 후미히코는 졸음이 쏟아지는 머리로 생각했다. --- 본문 중에서

이 세계는 나와 디피, 단둘이 살아가기엔 너무 넓습니다. 디피는 그게 두려웠던 겁니다. 언젠가는 나와 영원히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겁니다. 그래서 디피는 건초를 먹지 않았을 겁니다. 만일 이 세계가 나와 디피, 그리고 초원으로 이루어졌다면 나는 늙어죽을 때까지 디플로도쿠스를 키우며 살아갈 것입니다. 그 세계에서 나는 돈이 없더라도 도둑질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니, 처음부터 나는 늙지 않을 겁니다. 몇십 년이 흐르고, 몇백 년이 흘러도 나와 디피의 하루는 오늘과 똑같을 겁니다. 매주 중국에서 건초를 수입할 것이고, 정해진 시간에 비행기는 우리집 앞마당에 140묶음의 건초를 낙하산에 실어 보낼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의 나는 언제까지나 디플로도쿠스의 주인으로 남을 수는 없습니다.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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