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도 자신의 모든 연구를 시작하기 전까지는 아직 이런 판단을 내리기 위한 철학적인 최종 근거를 댈 수 없었다. 그 자신도 그럴듯하게 들리는 해명으로 만족한다. 즉 그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형이상학에 대해 일반적으로 인정될 만한 대답을 해주는 것은 지금까지도 성공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형이상학은 끊임없는 논란의 싸움터였고, 그것도 오랫동안 승리를 누릴 수 있었던 전사라고는 하나도 없는 싸움터였으며, 지금도 여전히 싸움터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수학은 이미 그리스 시대에 학문적 길을 찾아냈고, 자연과학도 이미 갈릴레이 때부터 확고한 학문적 길을 걸어갔지만, 형이상학은 아직도 그 길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고 칸트는 결론짓는다.
(20쪽)
인간은 즉시 생각하기를, 어떤 명제가 서술하는 바로 그 무엇과 존재하는 바로 그 무엇, 즉 우리의 지각과 사유와는 무관하게 상존하는 바로 그 무엇과의 상호 일치를 어떤 명제의 진리라고 이해한다. 통상적으로 사람들은 이런 의미의 진리를 “사유한다는 것과 존재한다는 것의 상호 일치”라고 정의 내린다.
(52쪽)
하나의 서술에 상응하는 대상을 우리는 “사태”라고 부르며, 예를 들면 “이 문은 닫혀 있다”는 사실을 말한다. 서술이 진리로 받아들여져 “긍정”되면, 즉 “동의”를 구하게 되면, 그 서술은 “판단”이라 불린다. 물론 “판단”이란 단어는 그 판단이 긍정되든 부정되든 상관없이 종종 모든 서술에 사용되기도 한다. 그래서 이에 비례하여 어떤 서술의 내용 또한 그러한 판단 내용이라 부르기도 한다.
(55쪽)
형이상학적 판명성은 수학적 판명성이나 자연과학적 판명성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종류의 것이다. 형이상학의 영역에서 수학적 판명성이나 자연과학적 판명성을 요구하는 사람은 그 스스로 형이상학적 통찰로 가는 길을 막고 만다. 이미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주의를 주고 있다. 즉 “개개의 영역에 관계하는 대상의 본성이 허락하는 척도를 엄격히 요구하는 것이야말로 배양된 정신의 표시이다.” 개개의 영역에 대한 올바른 평가 근거는 결코 자체 이해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윤리적 태도에 가까운 어떤 합당한 태도와 판단 능력을 요구한다.
(45-46쪽)
이 모든 것으로부터 형이상학(形而上學) 영역에서의 동의는 (적어도 대부분의 경우) 필연적으로 증명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결단을 내포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우리는 결코 그 누구에게도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직접 증명”할 수는 없다. 직접적 증명을 신 존재(神存在) 증명의 과제라고 여기는 사람은 이 증명의 의미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46-47쪽)
물리적 인과율은, 정당하게 주장되는 한 어떤 경우에도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존재자를 넘어서서는 타당하지 않다. 이와는 반대로 형이상학적 인과율은 모든 우유적 존재자들뿐만 아니라 정신적 존재자에도 타당하다. 여기에서 두 번째 구분이 나온다. 즉 물리적 인과율은 물질적 영역의 진행 과정과 관계되며, 형이상학적 인과율은 그리스도교 철학의 의미로 이해했을 때 변화나 진행 과정뿐만 아니라 존재자의 우유적 존재 자체와도 관계된다.
(269쪽)
토마스 아퀴나스 역시 진리 인식에 대해 단적으로 묻는 곳에서 이런 대답을 하고 있다. 그는 물론 우리가 눈을 뜨고 본 것을 서술로 나타내는 데 진리가 있다는 식으로 대답하지는 않는다. 토마스는 이런 대답을 하지 않고, 오히려 “진리는 정신이 정신 그 자체를 향해 반성하는 것을 통해 인식된다”고 대답한다. 그는 이를 그림 그리듯 표현하기도 한다. 즉 “정신은 정신 자체로 되돌아온다.” 이렇게 토마스는 같은 논항에서 정신의 정신 그 자체를 향한 “온전한 회귀(reditio completa)”에 대해 말하기도 한다. 헤겔의 말대로 한다면 이를 “정신?자체에?있는 정신의 존재(Bei-sich-Sein des Geistes)” 내지는 “정신의 그?자체?존재(Bei-sich-selbst-Sein des Geistes)”라 부를 수도 있다. 인식의 근거는 바로 이러한 정신?자체에?있는 정신의 존재에 놓여 있다.
(71-72쪽)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다른 그리스철학자들의 유산으로 넘겨받은 철학적 사유는 확실히 구원에 필연적인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것은 신앙을 통해 깊이를 더했으며, 그리스도교를 위해 커다란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동덴느(Don deyne)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앙과 철학의 대화는 신앙을 사유하는 신앙으로 만들었으며, 말하자면 하나의 의식적 신앙의 성숙한 보편성과 가톨릭 사상으로 만들었다. 다른 한편 이런 대화는 신적인 것의 비밀과 차원을 위해 더 이상 어떤 공간도 허락하지 않던 철학적 이성이 가진 편파적이고 합리주의적 이해력 자체 앞에서 철학적 이성을 보호하였다.”
(363-364쪽)
철학은 다른 학문들 위에 있거나 나란히 있는 학문이라기보다는 예술이요, 그것도 언어분석의 예술이다. 철학의 유일한 과제는 단어들을 의미 영역으로 소급함으로써 하나의 명백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137쪽)
우리가 (신에 대한 직관 없이) 단순히 유비적인 것이 아니라 원래 ‘적합한 신 인식’을 가졌더라면, 이는 오직 신과 세계 내적 존재자에 일의적으로 부합하는 개념들이 주어져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신의 초월성이 부정될 것이요, 신은 세계적 존재의 수준으로 강요될 것이다. 이는 어떤 식으로든 ‘범신론’으로 가게 된다.
(372쪽)
“인간존재”란 다름 아닌 본질적 제한성을 진술하기 때문에, 모든 인간은 필연적으로 “참여를 통한 존재자”이며, 따라서 제일 작용 원리로서의 초인간적 존재를 요청한다. 이러한 제일원리는 인간을 자신의 고유하고 제한된 형상에 따라(formaliter) 포괄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 전체 영역을 초월하는 존재 속에 포괄한다. 말하자면 이러한 제일원리는 창조주이며, 창조주는 인간존재가 참여하는 모든 순수한 존재 완전성을 아무런 제한적 존재 방식 없이 (그리고 탁월한 한에서) 자신 안에 포괄한다.
(367쪽)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