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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필 史筆

사필 史筆

: 사론(史論)으로 본 조선왕조실록

리뷰 총점9.8 리뷰 8건 | 판매지수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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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6년 06월 01일
쪽수, 무게, 크기 396쪽 | 729g | 160*220*25mm
ISBN13 9788928403929
ISBN10 8928403928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관련자료 보이기/감추기

저 자 소 개
강대걸
행정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국사학으로 석사·박사 과정을 수료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에서 한문교육과정을 마치고 ≪한국문집총간≫ 기획 및 편찬, ≪정조실록≫, ≪승정원일기≫, ≪후설(喉舌)≫ 등의 번역과 집필에 참여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수석연구위원으로 재직하고 있다.

강성득
역사교육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한국사학으로 석사·박사 과정을 수료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에서 한문교육과정을 마치고 ≪승정원일기≫, ≪후설≫, ≪한국 역사상 관료제 운영시스템에 관한 연구≫ 등의 번역과 집필에 참여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으로 재직하고 있다.

곽성연
한문교육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한문학으로 석사 과정을 수료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에서 한문교육과정을 마치고 ≪승정원일기≫, ≪후설≫ 등의 번역과 집필에 참여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번역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규옥
사학과를 졸업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에서 한문교육과정을 마치고 ≪홍재전서≫, ≪임하필기≫와 ≪태조실록≫, ≪인조실록≫, ≪정조실록≫ 등 조선왕조실록, ≪일성록≫, ≪승정원일기≫ 번역에 참여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수석연구위원으로 재직하고 있다.

정영미
사학과를 졸업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에서 한문교육과정을 마치고 ≪정조실록≫, ≪승정원일기≫의 번역에 참여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으로 재직하고 있다.

최두헌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한문학으로 석사·박사 과정을 수료하였다. 「필기의 관점에서 본 이목구심서 연구」, 「천파 오숙 산문의 장자 수용 양상」 등 논문이 있다. 한국고전번역원 연구원으로 재직하고 있다.

하승현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였다. 성균관 한림원과 한국고전번역원에서 한문교육과정을 마치고 ≪승정원일기≫, ≪후설≫, ≪생각, 세 번≫, ≪눈 셋 달린 개≫, ≪잠, 마음에 놓는 침≫, ≪화담집교주≫ 등의 번역과 집필에 참여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으로 재직하고 있다.

허윤만
한문학과를 졸업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에서 한문교육과정을 마치고 ≪태조실록≫, ≪승정원일기≫ 번역에 참여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연구원으로 재직하고 있다.
감수 : 김문식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석사·박사 과정을 수료하였다. 서울대학교 규장각 학예연구사를 거쳐 현재 단국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로는 ≪조선후기 경학사상 연구≫, ≪정조의 경학과 주자학≫, ≪정조의 제왕학≫, ≪조선후기 지식인의 대외인식≫, ≪왕세자의 입학식≫, ≪왕실의 천지제사≫ 등이 있다.
자문 : 김경희
사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석사 과정을 수료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에서 한문교육과정을 마치고 한국고전번역원 수석연구위원으로 재직하고 있다. 번역서로는 ≪현종실록≫, ≪정조실록≫, ≪승정원일기≫, ≪일성록≫, ≪국조보감≫, ≪임하필기≫, ≪명의록≫, ≪일성록 범례≫ 등이 있고 ≪한국문집총간≫ 해제 집필에 참여하였다.
그림 : 이부록
책을 매체로 온갖 창작 활동을 펼치는 미술가이다. 대학에서 동양화를 공부했으며 그림뿐 아니라 참여미술 프로젝트, 설치미술, 협업전시 등을 하고 있다. 전시와 함께 출간한 책으로 ≪기억의 반대편 세계에서-워바타≫, ≪세계인권선언≫, ≪스티커 프로젝트≫ 등이 있으며, ≪일곱 가지 밤≫, ≪동양철학 에세이≫, ≪최고의 소리를 찾아서≫ 등에 그림을 그렸다. ≪사필≫ 삽화 속의 파란 점은 사관의 눈을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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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500년 조선 역사 기록의 중심에 있던 사관과 그들의 사론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조선의 현안을 바라보던 사관의 시선이 담긴 사론에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를 진단해 보고 앞으로의 방향을 찾아가는 ‘눈’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뿐만 아니라 권세가의 횡포를 꾸짖는 단호함과 시비를 가리는 엄격함은 물론 약자를 배려하는 따뜻한 마음까지도 배울 수 있어서이다
---「머리말 : 조선왕조실록을 남긴 붓, 사필(史筆). 오늘을 보는 눈이 되다」중에서

주상은 재위한 지 30년이 지났지만 한결같이 공손하고 검소하여 선왕이 물려준 궁궐을 넓히거나 증축하는 일이 없었고, 무너지고 파손된 곳이 있더라도 즉시 수리하지 않았다. 그런데 왕자와 부마들은 쉴 새 없이 집을 지었기 때문에 토목 공사에 시달리는 백성의 고통이 그칠 때가 없었다. 사대부의 집에서도 이를 경쟁하듯 따라 해 웅장하고 아름답게 꾸미는 데 힘써서 화려한 서까래와 높은 용마루가 도성 곳곳에 즐비했다. 선왕 때의 재상집을 여기에 비교해 본다면 마치 변소처럼 보일 정도였다.
≪중종실록 30년 6월 7일≫
---「왕실을 다스려야 나라가 다스려진다 : 중종 대 종친들의 사치 풍조」중에서

고금을 막론하고 세상에 사나운 부인이 시기하는 일이 얼마나 많았는가? 하지만 이미 죽어 유명(幽明)을 달리한 뒤까지 시기하여 남편의 무덤을 옮겨 전처(前妻)의 무덤에서 멀리 떼어 놓았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다. 그런데도 당시의 대신들은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아 19년 동안 편안히 모셔져 있던 선왕의 옥체가 하루아침에 다른 곳으로 옮겨지는데도 막지 못했으니, 하늘에 계시는 중종의 혼령이 어떻게 생각하셨을지 모르겠다. 아! 애통하다. ≪명종실록 17년 8월 22일≫
---「하늘은 탐욕에 복을 내리지 않는다 : 중종의 능묘 이전」중에서

현석규가 사람들에게 명예를 얻으려고 정원 외 아전의 수를 줄이고는 “쓸모없는 인원을 줄인 것이다.”라고 하였고, 또 백성이 수령의 불법 행위를 고소할 수 있게 하고는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 주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리석은 백성이 모두 그가 선정을 베푼다고 생각하자 현석규는 백성을 사주하여 자기를 유임시켜 달라는 내용의 글을 임금에게 올리게 하였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이를 비웃었다. ≪성종실록 10년 2월 12일≫
---「깨끗한 거울에 진짜 얼굴을 비출 수 있다 : 평안 감사 현석규의 두 얼굴」중에서

전에 한명회가 연경에 갈 때에 주상이 당부하기를, ‘혹시라도 정동에게 먼저 연락하지 말고 활과 화살도 바치지 말라.’ 하였다. 그러나 한명회는 통주(通州)에 도착하자 통역관을 시켜 정동에게 먼저 연락했고, 부사(副使) 이승소(李承召)가 말렸지만 듣지 않고 개인적으로 선물을 하고 활과 화살도 바쳤다. 그가 개인적으로 풍성한 선물을 바쳐 황제의 비위를 맞추고 정동의 욕심을 채워 준 덕에 많은 상을 받아 와서는 이를 늘 사람들에게 자랑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정동을 압구정에 데리고 가서 성대한 잔치를 벌여 자신의 위세를 과시하려고 했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탄핵을 당해 처벌받게 되었다. ≪성종실록 12년 6월 26일≫
---「권세는 탐욕에 무너진다 : 권력자 한명회와 압구정」중에서

천재지변이 닥치자 임금과 신하가 그럴 듯한 말을 하며 서로 경계하기는 했지만 형식적으로 옛일을 따라한 것일 뿐이다. 그러니 어찌 하늘을 감동시켜 재변을 그치게 할 수 있겠는가? 요즈음 들어 겨울 안개가 자욱하고 땅이 함몰된 것은 모두 음양이 조화를 잃고 땅의 기운이 안정되지 못해서이니, 재변 중에서도 큰 재변이다. 이러한 때에 재변의 원인을 일일이 셀 수도 없지만 모후가 국정을 마음대로 결정하고, 외척들이 권력을 멋대로 휘두르며, 군자는 재야에 있고 소인은 조정에 있으며, 중들이 멋대로 날뛰고, 오랑캐가 침략해 들어왔으니, 이것들이 불길한 기운과 천재지변을 불러일으킬 만한 것들이다. 임금과 신하 모두가 이것은 도외시한 채 고민조차 하지 않고, 덕을 닦아 일을 바로잡아야 한다느니 두려워하고 반성하겠다느니 하는 공허한 말만 하면서 재변이 사라지기를 바랐으니, 참으로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겠는가? ≪명종실록 11년 11월 16일≫
---「말로는 재앙을 막지 못한다 : 조선의 씽크홀, 지함(地陷)」중에서

국가가 오래도록 태평하자 임시방편으로 하는 정사가 많았고, 기강이 문란해져 공공의 도리가 없어졌다. 조정의 각 관사와 지방의 관원들은 쓸데없이 자리만 지키고 있으면서, 오직 권세가에게 들러붙어 좋은 벼슬에 오르고, 뇌물을 바쳐 좋은 명성을 얻는 것을 자신의 중요한 사업으로 여길 뿐, 국가의 일에 대해서는 남의 나라의 일만큼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장수나 재상들은 편안히 놀고 즐기며 항상 은혜와 원한을 갚는 데만 신경 쓰다가, 변방에서 전투가 벌어지면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조정은 방비할 대책을 내놓지 못했고 변방은 전투에 임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 왜적의 칼끝이 향하는 곳마다 패배하였다. 왜적이 아무도 없는 곳에 들어오듯 쳐들어왔으니, 통탄스러운 마음을 견딜 수 있겠는가?
≪명종실록 10년 5월 16일≫
---「평화를 바란다면 전쟁에 대비하라 : 을묘왜변과 조정의 대응’

국가가 선정을 베풀지 못하고 교화의 효과가 나타나지 않아 탐욕스러운 재상과 포악한 수령들이 백성의 뼈와 살을 깎고 고혈을 짜내고 있으니, 백성은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어디에 대고 호소할 길도 없다.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며 하루도 목숨을 보전하기 어려워 조금이라도 더 살고자 도적이 되었다면 그것은 정치를 잘못했기 때문이요, 그들의 죄가 아니다.……극심한 흉년과 무거운 조세로 백성이 피폐해져 가만히 두어도 저절로 무너질 상황이다. 그런데 또 군대를 일으켜서 변방에 계속 머무르게 한다면 물자를 다 써 버려 곤경에 처하고 나라와 민간의 재물이 모두 고갈될 것이다. 거기다가 장수의 횡포와 군졸들의 약탈이 더해지니 백성이 누구를 믿고 살아가겠는가? 이는 네 개 도의 백성을 몰아붙여 모두 도적으로 만들어 버리는 짓이다. ≪명종실록 16년 10월 6일≫
---「모이면 도적이요 흩어지면 백성이다 : 의적 임꺽정과 토벌군의 횡포」중에서

경상도는 왜적이 처음으로 쳐들어온 곳이었기 때문에 다른 도보다도 더 심하게 인가가 텅 비고 백골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게다가 또다시 큰 전쟁이 일어나 장정들은 전쟁터에서 죽고 노약자들은 군량을 운반하느라 고초를 겪었다. 아내가 남편의 죽음을 슬퍼하고 자식이 아비를 잃고 통곡하니 애통한 소리가 처참하게 들려왔다. 그런데도 공물(貢物)로 올리는 청어 하나를 없애지 않고 원래대로 바치게 했으니, 이를 통해 나랏일이 하나같이 어처구니없는 지경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선조실록 31년 1월 16일≫
---「공물은 때를 보아 거두어야 한다 : 정유재란 중의 공물 요구」중에서

이렇게 심한 흉년이 들자 주상께서 백성을 구해야 한다는 마음이 간절하여, 백성들이 바쳐야 하는 무명, 약재, 공물 등을 감해 주셨다. 날마다 백성의 고난을 안타까워하는 하교를 내리셨고 팔도에 자문을 구하는 것이 모두 백성을 진휼하는 문제였다. 굶주린 백성이 있다면 내가 배고프게 한 것이고, 추위에 떠는 백성이 있다면 내가 춥게 만든 것이라고 여기셨으니, 이 마음은 바로 요순 같은 성군의 마음이다. 그런데 요순 같은 성군의 정치를 이루지 못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왕실과 왕족이 가진 토지와 재물이 백성들을 먹이고 입힐 만큼 충분히 많았는데도 끝내 회수하라는 청을 따르지 않으셨으니, 참으로 애석하다. ≪인조실록 6년 9월 6일≫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는다 : 인조의 진휼 대책」중에서

정전법(井田法)이 폐지된 이후로 부유한 백성이 전지를 겸병(兼幷)하는 폐단이 생긴 지가 이미 오래되었다. 그러다가 이때에 삼남 지방을 다시 양전하여 세금을 정하였으니, 어찌 훌륭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균전(均田)의 명분만 흉내 내고 균전의 실효는 추구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관찰사, 군수, 현령에 적임자를 임명하지 못하였고, 이에 따라 간사하고 교활한 지방의 아전들이 중간에서 농간을 부리게 되었다. 세도 있는 집안의 전답은 하등으로 분류하고 곤궁한 백성의 전답은 상등으로 분류하여 속임수를 부리고 온갖 간교한 폐단을 만들어 냈다. 전답의 면적은 전에 비해 약간 늘었지만 백성들의 원망은 도리어 심해졌다. 사람들이 “삼남에서 인심을 잃은 것은 양전을 다시 했기 때문이다.” 라고 하는데, 참으로 맞는 말이다. ≪경종수정실록 즉위년 10월 6일≫
---「공평하지 않으면 인심을 잃는다 : 양전(量田)의 폐단」중에서

사관의 직무는 재상의 권한과 견줄 정도로 중요하게 인식되었다. 이수광(李?光)이 ≪지봉유설(芝峯類說)≫에서 “재상은 수십 년 동안 어떤 사람을 성공하게 할 수도 있고 몰락하게 할 수도 있지만, 사관은 어떤 사람의 이름이 천백 년 뒤까지 남게 할 수도 있고 없어지게 할 수도 있다. 이것은 사관과 재상이 생전(生前)과 사후(死後)의 권한을 나누어 가진 것이다.”라고 한 것도 사관의 직무가 그만큼 막중함을 강조한 말이다.
---「사필을 공정히 하라 : 역사 기록의 주역, 사관」중에서

인조 16년 5월 2일, 인조가 대신과 비변사 당상들을 불러 만난 자리에서, 좌의정 최명길이 국가 기밀에 관계된 일이 누설될까 우려해 사관을 참여시키지 말 것을 건의한 일이 있었다. 이에 대해 정태제가 자신의 사초에 남긴 말이 있다.
사관은 역사를 기록하는 붓을 잡은 신하로 나랏일의 시비를 논하는 칼자루가 그에게 달려 있다. 나라는 멸망시킬 수 있어도 역사는 없앨 수 없거늘, 사관에게 숨기는 일이 있어서야 되겠는가?
---「무덤 속까지 가져간 역사, 정태제 사초」중에서

시정기는 일반적으로 한 달에 한 번씩 책으로 묶었고, 연말에 책 수를 임금에게 보고하도록 했다. 시정기에는 연월일, 날씨, 재변, 왕의 동정, 상참과 경연의 시행 여부, 대간의 계사, 중요한 상소, 과거 급제자 현황, 주요 인사 행정, 근무 고과인 포폄, 각 관사와 관련한 중요 사안 등을 기록했다. 시정기는 정본 이외에 부본을 만들어 두었는데, 이를 ‘비초(飛草)’라고 하였다. 춘추관의 포폄 때에 당상관은 이를 근거로 사관의 근무 태도를 평가하였다.
실록이나 ≪승정원일기≫에 사관이 기한 내에 시정기를 정리하지 못해 다른 관직으로 승진할 때에 지장을 받는 경우가 자주 보인다.
---「시정을 기록하고 평가하다 : 사관의 주요 업무」중에서

신들은 일을 기록하는 직임을 맡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관이 바닥에 엎드린 채 머리를 들지 못하다 보니 신료들이 공무를 아뢸 때에 그 목소리만 듣고 용모를 보지 못합니다. 그러니 말하는 이가 누구인지 어떻게 구별할 수 있겠습니까? 이로 인해 기록한 내용에 의심스러운 부분이 생깁니다. 사관은 직필해야 하는데, 의심스러운 점이 있는 것을 감히 기록으로 남기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옛 기록을 상고해 보더라도 ‘돌연히 안색을 바꾸었다.’, ‘용모가 태연자약하다.’, ‘목소리와 안색이 모두 노기(怒氣)를 띠었다.’, ‘부끄러운 안색을 띠었다.’, ‘임금이 좌우를 돌아보며 다른 사람에게 말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처럼 옛날의 사관은 용모와 안색, 말씨를 모두 기록하여 후세에 전했습니다. 그러니 지금처럼 바닥에 엎드려 일을 기록하는 것은 옳지 않은 듯합니다.
---「사관은 앉아서 기록하라」중에서

한림의 선발은 한림 자체 내에서 신임 한림의 후보를 추천하는 자천이라는 독특한 제도로 운영되었다. 이를 통해 뽑는 한림은 검열이었는데 이들은 대교를 거쳐 봉교로 승진하였다.
숙종 때 편찬된 ≪한원고사≫에 적힌 선발 과정을 살펴보면 하번 한림이 상번 한림에게 새로 문과에 급제한 인원을 포함한 7품 이하의 문관 중에 우수한 자를 천거하였다. 상번 한림과 의견이 일치되면 예비 한림에게 알리고 동료 한림이 모여 비밀리에 천거할 인원을 뽑았다. 그 명단을 전임 한림들에게 돌려서 의견을 묻고 춘추관과 예문관 당상들에게 알리는 과정에서 이의 제기가 없으면 후보를 확정했다.
---「자천(自薦)에서 권점(圈點)으로 : 사관 선발 방식의 변화」중에서

처음 해당 관사에 임명된 관원은 선배 관원들에게 인정받는 절차인 면신례(免新禮)를 행했다. 예문관의 면신례는 다른 관사보다 훨씬 어려웠다고 한다. 성현(成俔)의 ≪용재총화(?齋叢話)≫에서 ‘새로 한림에 임명되어 나온 뒤 연회 베푸는 것을 허참례라고 하고, 50일이 지나서 또 연회 베푸는 것을 면신례라고 했으며, 그 중간에 연회 베푸는 것을 중일연(中日宴)이라고 하였다. 연회 때마다 신입 한림에게 집이나 다른 곳에 푸짐한 잔칫상을 차리도록 하였는데, 잔치는 언제나 어두워져서야 끝났다.’라고 한 것을 보면 신입 한림을 맞이하는 예문관의 전통이 어떠했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이러한 풍습을 ‘고풍’이라 불렀다.
---「삼가 고풍(古風)을 지키라 : 한림의 위상과 고풍」중에서

조선 500년의 역사를 담은 각 왕대의 실록은 긴 세월 속에서 수많은 일을 겪으면서 꾸준히 편찬되고 보존되어 왔다. 임금이 승하하여 국상을 치르는 절차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면 실록을 편찬하기 위한 절차도 시작되었다. 실록 편찬은 선왕의 재위 기간 동안의 역사를 정리하는 일일 뿐만 아니라 선왕의 뒤를 이어 보위에 오른 임금의 정통성을 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실록은 어떻게 편찬되었을까 : ≪현종실록≫의 편찬 과정」중에서

실록은 만드는 과정 못지않게 보관하는 체계를 갖추는 일도 중요했다. 수차례에 걸친 병란(兵亂)과 화마(火魔)는 실록의 ‘생명’을 늘 위협했다. 이런 경험은 실록을 안전하게 보관하여 후대에 전할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하도록 하였고, 이에 따라 실록을 깊은 산속에 분산하여 보관하고서 주기적으로 보관 상태를 확인하고 관리하는 제도가 만들어졌다.
조선 전기에는 네 곳의 사고에 각각 실록을 나누어 보관하다가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서울의 춘추관과 무주(茂朱) 적상산(赤裳山), 강화(江華) 정족산(鼎足山), 봉화(奉化) 태백산(太白山), 평창(平昌) 오대산(五臺山)의 다섯 곳에 사고를 두고 실록을 각각 나누어 보관하는 체계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사각(史閣)을 열고 실록을 열람할 수 있었던 사관을 시켜 춘추관은 3년에 한 번, 지방에 둔 외사고는 효종 1년1650 이후 2년에 한 번 실록의 보관 상태를 점검하고 통풍시키는 포쇄를 행하였다.
---「실록을 만나러 가는 길 : 사고의 위치와 노정」중에서

실록 편찬 목적이 역사를 사실대로 기록하여 후대에 전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실록에서 사실대로 기록한 당대의 중요한 일들은 그 자체로 국정 보고서, 행정 지침서, 행사 보고서의 역할도 하였다. 따라서 임금이 마음대로 볼 수는 없었지만, 합당한 이유가 있으면 실록을 살펴볼 수 있었다. 외교, 국방과 같은 중대한 나랏일을 비롯하여 관직 제도의 조정이나 지방 행정 구역의 설치나 혁파, 형정(刑政), 도량형의 통일 등 국내의 정사 전반에 관한 선례(先例)가 필요할 때면 실록에서 해당 내용을 찾아보았다. 이를 고출(考出)이라 한다.
---「실록을 고출하라 : 실록의 활용」중에서

조선은 왜 사관을 두어 역사를 기록했으며, 선조들은 왜 우리에게 실록을 전해 주었을까요? 우리는 다음 세대에 어떠한 실록을 전해 주어야 할까요? 이 점이 우리가 지금 500년 조선 역사 기록의 중심에 섰던 사관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하는 이유일 것입니다. 조선의 사관이 남긴 사필이 시대의 과제를 통찰할 수 있는 우리 시대의 사관(史官)을 일깨우는 중요한 매개가 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맺음말」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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