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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군은 중국에 있었다

: 처음부터 새로 읽는 한국고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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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출간일 2016년 06월 07일
쪽수, 무게, 크기 400쪽 | 152*225*30mm
ISBN13 9791185614021
ISBN10 1185614028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2014년 북경교외 삼합장촌에서 발견된 1,500년 전 무덤에서 “낙랑군 조선현인(朝鮮縣人) 한현도(韓顯度)”라 쓰인 벽돌 명문이 출토되었다!

이 발견을 계기로 이제 고조선, 한사군 등 한국고대사의 주요 쟁점들을 둘러싼 기존의 주장에서 크나큰 인식의 전환이 불가피해졌으나, 중국과 국내 학계는 지금까지도 이에 대해 애써 침묵하면서 구태의연한 ‘고조선재한반도설’ 및 ‘낙랑군재평양설’만 고수하고 있다. 이 책은 이를 논리적으로 비판하며 한사군은 중국에 있었음을 새롭게 입증하였다.

저자는 이 책에서 고조선-한나라 전쟁, 만리장성, 낙랑군 등, 고대사 속의 주요한 키워드들을 몇 개의 장으로 구성하고 100년 가까이 논란이 되어 왔던 한국고대사 속 쟁점들을 차례로 복기하면서 기존의 정설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Ⅰ. 들어가는 글

Ⅱ. 고조선의 연혁
1. 기자 이전에 이미 조선이 존재하고 있었다
1) 《 상서대전(尙書大傳)》 속의 조선
2) 《한서》 〈지리지〉에 보이는 조선
3) 《 사기》 〈조선열전〉 속의 ‘조선’
2. 위만집단의 동래
1) 한나라 제후국 연국
2) 위만의 망명 - 만이복과 퇴결
3) 위만의 세력 확장
3. 위씨조선과 그 주변
1) 위만정권의 수립
2) 위씨조선의 발전
3) 위씨조선의 위치
4) 남려와 ‘ 창해군
5) 진번과 임둔

Ⅲ. 조한(朝漢) 전쟁 시말
1. 조한 전쟁의 발발
1) 섭하의 돌출행위
2) 양복과 순체의 출병
3) 한대의 전선과 수군의 편제
2. 지리멸렬하는 한나라 정벌군
1) 졸정 다(多)의 선제공격
2) 먼저 도착한 양복의 수군
3) 무제의 위산 파견
3. 전쟁의 재개
1) 한나라 군의 3차 공세
2) 대치 국면에 돌입한 전쟁
3) 양복과 순체의 알력
4) 제남태수의 월권
4. 한나라 수군의 항해 경로 복기하기
1) ‘종(從)’의 해석
2) 발해의 위치
3) ‘부(浮)’는 황해 횡단이 아니다
4) 중국 학자도 인정하는 한대의 연안 항해
5) 고염무가 고증한 누선군의 항로
5. 전쟁의 종료
1) 조선의 매국노들
2) 순체와 양복의 말로
3) 조선 내통자들에 대한 논공행상
4) 참의 영지 ‘ 니계의 문제

Ⅳ. 진 시황과 만리장성
1. 진-한대 중국인들의 영토 인식
1) 《 사기》〈 진시황본기]에 나타난 진나라의 영토관
2) 진나라 동쪽 끝은 발해와 그 인근
3) 제국의 도로망
4) ‘동방도’의 북쪽 종착점 산해관(山海關)
2. 진 시황의 동방 순행
1) 동방 순행의 경로
2) 1차 동방 순행
3) 2차 동방 순행
4) 3차 동방 순행
5) 4차 동방 순행
6) 동방 순행과 제국 강역의 함수관계
3. 진 시황의 만리장성
1) 장성의 출현
2) 진나라 장성
3) 만리장성의 서쪽 기점 ‘임조’
4) 만리장성의 동쪽 종점은 어디인가
4. 만리장성의 진실
1) ‘만리’에 관한 세 가지 가능성
2) ‘1만 리’는 우회거리
3) 20세기 고고학계에서의 만리장성 논의
4) 만리장성 동쪽 종점은 하북과 요령 경계지역

Ⅴ. 갈석산과 수성현
1. 문헌 속의 갈석산
1) 고대사의 랜드마크 - 갈석
2) 《 상서》 [우공〉을 통해 보는 갈석산
3) 《 산해경》과 《 회남자》의 갈석산
4) 보정시에는 갈석산이 없다
2. 역사적 진실과 허구의 혼재
1) 갈석궁과 강녀석의 수수께끼
2) 중국 지자체들의 ‘역사 지어 내기’
3) 진황도 지명의 두 가지 유래
3. 제왕들의 순행과 갈석산
1) 갈석산과 진 시황, 한 무제
2) 조조의 오환 정벌과 갈석산
3) 북위 황제 문성제의 갈석산 순행
4. 낙랑군 수성현의 문제
1) ‘만리장성의 기점’ 수성현
2) ‘고구려 옛 땅’에 갈석산이 있다
3) 두우가 언급한 ‘고구려 옛 땅’의 의미
4) 도엽암길의 ‘ 만리장성재수안설’
5) 이병도의 ‘ 갈석산재수안설’
5. 수성현이 수안군일 수 없는 이유들
1) ‘수안’이라는 이름의 유래
2) 두우의 ‘ 우갈석’ 오독
3) 순행 동선상의 모순
4) 갈석산과 조선, 낙랑
5) 조선, 낙랑과의 위치 문제
6) 갈석산이 순행 명소가 된 이유
7) 갈석산은 평주에 있었다
8) ‘게석산’은 갈석산이다
9) 갈석산의 입지조건들

Ⅵ. 한사군과 낙랑
1. 역사 문헌 속의 낙랑
1) 낙랑은 과연 한반도에 있었을까
2) 낙랑은 낙랑, 평양은 평양
3) 《한서》에 언급된 낙랑의 위치
2. 낙랑의 지리적 검증
1) ‘한사군’에 대한 학자들의 지리 고증
2) 《 후한서》의 리수 데이터
3) 거리 정보의 시대별 편차
4) 산지 - 위치 추정의 주요한 변수
5) 역대 도량형의 변천
6) 다시 ‘한사군’의 위치에 관하여
3. 한대 죽간 속의 낙랑
1) 제33.8번 죽간의 내용
2) 왕자금의 ‘낙랑’ 해석

Ⅶ. 조작의 징후들
1. 이른바 ‘낙랑’ 고분들의 문제
1) 중국계 고분으로 둔갑한 애 무덤들
2) 천차만별의 고분 양식
3) 부장품이 고분의 성격을 규정할 수 있는가
4) 움직일 수 있는 모든 것은 조작이 가능하다
5) 평양지역에서만 쏟아지는 ‘낙랑계’ 유물들
2. 이른바 ‘ 점제현 신사비’의 수수께끼
1) 한대에는 비석이 존재하지 않았다
2) ‘ 점제현 신사비’는 공간이동 된 것인가
3) 용강 인근에는 웅장한 산이 없다
4) 점제현은 서무산 근처에 있었다?
5) 북한 학계의 과학적 분석 소견
3. 낙랑 봉니의 수수께끼
1) ‘낙랑’ 봉니는 위조된 것인가
2) ‘낙랑’ 봉니 200점의 의문
4. 이른바 ‘ 낙랑군 호구부’ 진위 문제
1) 정백동 고분의 발굴과 잡다한 유물들
2) ‘ 낙랑군 호구부’의 언어적 모순
3) 윤만 한(漢) 간독의 경우
4) 국내 역사서, 문헌들의 경우
5) ‘ 낙랑군 호구부’에 대한 문자학적 소견
5. 한국 고대사 조작의 주역들
1) ‘만선사관(滿鮮史觀)’을 창도한 백조고길
2) 대동강변을 낙랑군 치소로 비정한 조거용장
3) ‘신의 손’ 관야정
6. 태집둔 유적, 유물의 경우
1) 소황지촌에서 발굴된 유물들
2) 평가절하된 ‘ 임둔태수장’의 존재
3) ‘ 임둔태수장’ 봉니와 임둔의 위치
4) ‘ 도하(徒河)’에 대한 중국 학계의 인식
5) 주학연이 제공한 ‘도하’ 관련 단서들
6) ‘ 도하(屠何)’는 고대 북방민족의 이름

Ⅷ. 나오면서
찾아보기

저자 소개 (1명)

책 속으로 책속으로 보이기/감추기

이 책에서는 조한 전쟁, 만리장성, 낙랑군 등, 고대사 속의 주요한 키워드들을 몇 개의 장으로 구성하고 학계에서 100년 가까이 끊임없이 논란이 되고, 또 논란을 만들어 왔던 고대사 속의 쟁점들을 차례로 복기해 나갈 것이다. 그 과정에서 양측의 주장들 중에서 수용할 것이 있으면 수용하고, 비판할 것이 있으면 비판하고, 보완할 것이 있으면 보완하면서, 역대 역사 기록들에 문제는 없는지, 학자들의 해석, 주장에 오류는 없는지 하나하나 검증해 볼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강단 또는 재야에서 우리들이 소홀히 했거나 무심하게 넘겼던 부분들을 하나하나 짚어 나가면서 그동안 맞추지 못했던 고대사의 퍼즐 조각들을 차례로 끼워 나감으로써 하나의 온전한 그림으로 완성해 나갈 것이다. --- p.22

사마천은 위만 집단이 패수를 건넌 다음 최종적으로 진나라 때부터 비어 있던 상-하장에 머물렀다고 했는데, 이 역시 납득이 되지 않는 말이다. 패수가 평양의 대동강이라면 “진나라 상-하장”은 당연히 평양 이남의 어느 한 지역이었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패수가 대동강이라는 주장을 따르게 되면 평양 이남지역까지가 진나라의 영토였다는 소리가 되므로, 진나라 때에는 고조선이 황해도 너머까지 밀려나 있었다는 의미여서 왕험(王險)을 도읍으로 한 고조선의 존재를 아예 부정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한마디로 어불성설인 것이다. --- p.43

지금까지 강단 사학계가 그린 고조선 강역도를 보면, 조선의 남쪽에 진번, 동쪽에 임둔을 각각 표시해 놓았을 뿐, 진국은 그보다 남쪽인 전라도, 경상도 일대로 비정하고 있다. 그런데 강단에서 주장하는 고조선 지도에 《위략》에서 소개한 진국의 위치를 대입해 보면 진국은 동해 바닷속에 있는 해상국가로 둔갑하게 된다. 주지하다시피 동해 동쪽에 있는 것은 울릉도와 독도가 고작이어서 이것을 진국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진국’의 위치에 대한 국내 학계의 고증이 완전히 잘못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 p.55

평양 인근지역에서 천연의 국경을 이룰 만큼 규모가 큰 하천은 대동강이 유일한데, 그 강줄기는 평양의 동북쪽에서 남쪽을 지나 서남쪽으로 흐르고 있다. 즉, 위의 지도에서 볼 수 있듯이, 그 강이 순체의 진격로가 아닌 양복의 진격로에 걸쳐 있는 것이다. 만일 패수가 대동강이고 순체가 이끄는 연(燕), 대(代) 출신의 정예부대가 패수를 건넜다는 것이 확실한 역사적 진실이라면 대동강의 하류는 마치 성의 해자(垓字)처럼 평양지역을 빙 둘러서 다시 북서쪽으로 흘러 서해로 진입해야 정상이다. 그래야 순체가 건너갈 패수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의 대동강은 평양 남쪽을 지나 서남쪽으로 흘러 서해로 진입한다. --- pp.84-85

왕자금(王子今) 같은 중국 학자들은 〈조선열전〉에서 한나라 수군이 “제땅에서 출발하여 ‘패수’에 이르렀다고 했으니 역시 황해 해역을 곧장 건너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라는 식의 주장을 거침없이 내뱉는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현실성이 없는 주장이다. 고대 중국의 항해술을 과신하는 그의 이 같은 주장은 역시 중국의 지리학자인 손광기(孫光圻)의 고증을 통하여 얼마든지 논박이 가능하다. --- 그의 고증에 따르면, --- 전한과 후한을 통틀어 한대에 해상을 통하여 이루어진 모든 여행은 표류 등의 예외적인 상황이 아닌 이상 원천적으로 육지가 보일 정도로 멀지 않은 근해에서 해안선을 따라 이동하는 연안항법에 의거해서 이루어진 셈이다. 그렇게 본다면 산동반도에서 곧장 황해를 건너 평안도에 도달했다는 왕자금의 주장은 그저 상상으로나 가능할 뿐 실제로는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말이 된다. --- pp.102-103

임조에서 요동까지가 1만 리라면 돈황에서 낙랑까지는 1만 리일 수가 없다. 왜냐하면 《후한서》 〈군국지〉의 정보에 근거할 때, 낙랑은 요동보다 동쪽으로 1,400리나 더 멀리 위치해 있고, 돈황은 임조에서 서쪽으로 3,500여 리나 더 멀리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임조는 지금의 감숙성 임조현 또는 민현 인근으로, 한 제국의 수도인 장안 즉 지금의 섬서성 서안으로부터 1,000리 이상 서쪽에 위치해 있다. 반면에, 돈황은 지금의 위구르족 자치구에 위치해 있는 돈황시로,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어서 장안으로 부터 5,000리 정도나 떨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 p.161

국내외 사학자들의 주장처럼, 만리장성과 진-한 제국의 영토가 압록강너머 한반도 북부까지 점유하고 있었다고 한번 가정해 보자. 만일 그것이 역사적 진실이라면 진 시황은 중원을 통일한 재위 21년 이후로 사구(沙丘) 평대(平臺)에서 병사하는 재위 37년까지 16년이라는 긴 기간 사이에 자신이 건설한 제국의 영토를 순행할 때 단 한 번이라도 동쪽 끝인 한반도 북부, 아니 최소한 요동반도까지는 다녀갔어야 정상이다.
그러나 연나라를 멸망시키고 중원을 통일한 그는 관동(關東), 즉 제국의 동쪽 영토만 해도 네 차례나 순행을 거듭했음에도 불구하고 동쪽으로는 산동반도까지, 북쪽으로는 갈석산, 발해만까지 둘러본 것이 전부였다. --- p.174

만리장성의 동쪽 종점을 구체적으로 명시하기 시작한 것은 《진서(晉書)》, 《통전》 등의 역사서가 간행된 8~9세기 당대부터였다. 즉, 사마천 당시로부터 1,000여 년 후인 이 무렵부터 중국의 역사가들이 장성의 동쪽 종점으로 낙랑군 수성현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기 시작한 셈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진서》의 편찬자나 두우 등, 이 시기의 그 누구도 이 낙랑군의 수성현이 ‘고구려 옛 땅’에 있다고 했을 뿐이지 ‘한반도’에 있다고 주장하거나, 또 그렇게 억지로 결부시키려고 애쓴 일이 없다는 사실이다! --- p.212

지금까지 발견된 평양지역의 고분들이 계통적으로 중국계인지 고조선계인지조차 확인되지 않았으며, 중국계로 판정한 고분에서 고조선계 비파형 동검이 발굴된 경우도 많다고 한다. 2,000년 전 주변 민족들에 대하여 문화적으로 우월감을 가졌던 중국인 통치자들이 자신들의 무덤에 피지배민족의 유물들을 부장한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의문이다. --- p.290

이 책의 결론:
① 위만이 동쪽으로 변방 요새와 패수를 차례로 통과한 후 그 동쪽 상하장에 머물다가 조선으로 진입하고 있어서 ‘지금의 평양’과는 위치가 일치하지 않는 점
② 〈조선열전〉에 묘사된 왕험성은 남쪽으로는 물을 접하고 있는 반면, 그 북쪽에 험한 산지가 버티고 있는 등,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는 점
③ 비왕 장을 살해한 섭하가 패수를 건너 도주한 한나라 측의 요새가 대동강이나 압록강에서 수천 리나 떨어진 ‘평주’의 유림관이었다는 점
④ 순체가 동쪽으로 진격하여 패수의 조선 서부군을 격파한 후 계속 동진하여 포진한 곳이 왕험성의 ‘서북면’이었다는 점(양복은 왕험성 남부 포진)
⑤ 양복의 조선 출정과정을 소개한 “종제부발해”를 통하여 출발지와 목적지에 대한 대체적인 추정이 가능하다는 점
⑥ 진 시황의 순행 노선 및 진나라 도로 인프라, 그리고 당시 중국인들의 영토에 대한 인식이 언제나 산해관 ‘이내’에서 멈추고 있고, 진-한 교체기 초나라와 한나라의 격돌, 진-한대의 각종 농민 봉기 및 민란들 역시 ‘예외 없이’ 산해관을 넘어선 적이 없었다는 점
⑦ 《한서》 등 복수의 역사서에서 동쪽으로 ‘갈석산을 지나고 나야’ 낙랑, 현토 두 군이 나온다고 분명하게 소개하고 있는 점
⑧ 황해도의 ‘수안’이라는 지명은 한대로부터 거의 1,000년이나 시차가 벌어진 고려시대 이후에 비로소 사용되기 시작했다는 점
⑨ ‘낙랑’이라는 이름표를 보란 듯이 달고 있는 일부 의심스러운 유물들을 제외하면, 평양의 고분들이 ‘낙랑’의 것임을 뒷받침해 줄 만한 결정적인 증거가 없다는 점
⑩ 이른바 ‘점제현 신사비’는 산 암벽에 새겨진 석각이며, 처음부터 용강 들판에 세워져 있던 것이 아니라 ‘제3의 장소로부터’ 누군가에 의하여 운반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
⑪ 이른바 ‘낙랑군 호구부’를 언어적, 문자적으로 따져 보면 ‘-호’, ‘-별’ 등 크고 작은 문제들이 확인된다는 점
⑫ ‘임둔태수장’ 봉니가 1997년 요동과 요서 사이의 호로도 태집둔 인근에서 발굴됨으로써 ‘한사군’의 위치에 대한 정밀한 재조사가 필요하게 되었다는 점
⑬ ‘도하’라는 지명에 대한 중국 학계의 고증이 도하의 유래와는 무관할 뿐 아니라, ‘음차(音借)’라는 문자학적 용법의 가능성이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는 점
⑭ 기존의 위치 고증에서 직선(평지)거리와 우회(산지)거리 사이의 편차가 거의 2배 이상 벌어질 가능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
⑮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두우의 ‘우갈석’ 또는 학자들의 ‘고구려의 옛 땅’은 모두 오독의 산물로, 이 중 어느 경우이든 간에 ‘한반도를’구체적으로 거론한 적이 없었다는 점. 바꿔서 말하자면, 고조선의 왕험성, 낙랑군의 치소 조선현, 고구려의 평양을 지금의 한반도 평안도의 평양지역으로 비정한 것은 그 연대를 아무리 멀리 높게 잡더라도 400~500년이 채 되지 않는다는 점
--- pp.375-377

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보이기/감추기

이 책에서 밝혀낸 새로운 한국고대사의 실상

- 고조선은 기자 이전에 중원의 동방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 지금의 평양은 위씨조선의 적극적인 한인 수용정책의 결과로 조성된 국제통상기지이거나 집단거주지역이었다!

- 한 무제의 정벌군은 연안항법으로 발해 인근의 조선에 도착하였다!

- 고대의 ‘요동’은 당시 북방민족의 본거지였던 지금의 요동반도가 아니었다!

- 만리장성의 ‘만리’는 직선(평지)거리가 아니라 우회(산지)거리이다!

- 진 시황의 만리장성을 요동까지 끌어낸 장본인은 만철 소속 일본 어용학자들이었다!

- 황해도 수안군은 문헌, 지리, 역사적으로 전혀 낙랑군과 무관한 곳이었다!

- 수백 년에 걸쳐, 여러 집단에 의해 여러 층위로 형성된 평양시내의 3,000기의 무덤을 낙랑과 결부시키는 것은 기시감에 의한 착시의 산물이다!

- 언어적 측면에서 접근했을 때 낙랑군 호구부는 위조일 가능성이 높다!

- 조선총독부의 한국고대사 왜곡을 도운 공범은 만철조사부의 어용 학자들이었다!

- 점제현 신사비는 제3의 장소에서 누군가에 의해 몰래 운반되어진 밀수품일 가능성이 높다!

- 문헌, 고고, 지리, 역사적으로 따져볼 때 현재 정설로 통하는 ‘낙랑재평양설’은 역사적 진실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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