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일홍아~.”
백일홍. 27세. 작은 화실을 운영하고 있는 서양화가.
수업을 끝내고 뒷정리를 하던 일홍이 돌아보지도 않고 심드렁하게 말했다.
“왜, 또.”
“백일홍~.”
“그렇게 부르지 말랬지!”
문가에 기대섰던 키 큰 남자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안으로 들어왔다.
“홍아~.”
“또 채였냐?”
그가 넙죽 대답했다.
“응. 위로해주라.”
소나무. 27세. 모델 겸 연기자, 그녀의 27년 지기 배꼽친구. 한마디로 평생 웬수랄까.
“위로는 무슨! 지겹다, 아주. 이번엔 이유가 뭐야?”
“환상이 깨졌대.”
시무룩한 목소리였지만 일홍은 여전히 쌀쌀맞았다.
“환상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연애를 환상으로 한다니? 이번엔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그냥 보기엔 날카롭고 서늘한 눈매가 소처럼 순하게 껌벅거렸다.
자고로 사람은 생긴 대로 노는 법이랬다. 하지만 소나무는 생긴 것과 항상 반대로 놀았다. 그래서 허우대 멀쩡한 톱스타임에도 일홍에겐 말도 많고, 탈도 많고, 오해도 많은 사고뭉치밖에 되지 않았다.
날렵한 콧날, 선이 분명하고 육감적인 입술, 샤프한 턱 선과 서늘한 눈매에 잘 정돈된 까만 머리칼이 목덜미를 살짝 덮는다. 넓고 반듯한 어깨와 더없이 착한 몸매, 긴 팔다리까지 잘나가는 모델다웠다.
별다른 장신구 없이 늘씬하게 물 빠진 청바지와 깔끔한 하얀 티, 까만 가죽재킷 차림만으로도 잡지에서 곧장 빠져나온 것 같은 분위기가 날 만큼, 그저 서 있는 것만으로도 서늘한 카리스마가 풀풀 풍길 만큼 잘나신 톱스타인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입을 다물고 있을 때뿐이었다.
“아무 짓도 안 했어.”
입만 열면 이 모양이다.
“뭐?”
날카로운 일홍의 반응에 그가 정말이라는 듯 두 눈에 힘을 주고 다시 고개를 저었다. 상황을 모른다면 놀란 얼굴조차 그림이 되는 카리스마 나무였다. 하지만 그녀는 소처럼 순한 그의 눈빛에 울컥 짜증이 났다. 저러니 여자들이 만날 환상이 깨졌네, 보기와 달라 실망했네, 어쩌고 하며 징징대는 것이 아닌가.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그치듯 물었다.
“정말?”
“응.”
껌벅껌벅. 거짓을 모르는 까만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단정하다.
“으이그, 이 화상아!”
팔을 한껏 뻗어야 간신히 그의 이마에 손이 닿는 일홍이었다. 하지만 하루 이틀인가. 나무의 이마에 꿀밤을 먹인 그녀가 사감선생님처럼 따져 물었다.
“너네 사귄 지 얼마나 됐어?”
“석 달.”
“그런데 여적 아무 짓도 안 했단 말이야?”
“그런 애 아니란 말이야!”
억울한 마음에 버럭 소리를 지르던 나무는 한껏 치켜 올라가는 일홍의 눈초리에 재빨리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그냥 넘어갈 그녀가 아니었다.
“에라~ 꼴통아. 그런 애가 어떤 앤데? 건드리지 마세요라고 이마에 써놨든?”
“그게…….”
“나이를 생각해라. 석 달이나 됐는데 아무 짓도 안 하는 남자가 남자니? 어느 여자가 그걸 참아줘?”
“세상 여자가 다 너 같은 줄 알아?”
좋은 소리 한마디 못 들을 것을 뻔히 알면서 왜 매번 그녀를 찾게 되는 것일까. 자신의 우매함에 절로 고개가 저어졌다. 하지만 일홍은 아랑곳하지 않고 고개를 삐죽 내밀었다.
“내가 뭘?”
흑백이 선명한 눈동자가 도도하게 반짝거린다.
작업하기 편한 트레이닝복 차림에 화장기 없는 얼굴, 대충 틀어 올린 머리칼, 치켜 올라간 눈매와 도톰한 입술. 겉모습은 제법 귀여워 보이지만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입만 열면 쏟아지는 독설에, 좋든 싫든 끝을 보는 성격에, 무슨 일이든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는 나름 바람직한(?) 사고방식까지 고루 갖춘 백일홍이었다.
그녀와 붙어봐야 깨지기밖에 더할까. 백전백패. 27년 동안 소나무의 전적이었다.
“이그- 말을 말자. 너랑 무슨 말을 하겠냐.”
“벌써 할 말 다해놓고 무슨…….”
일홍과 툭탁거리다보니 바닥을 뚫던 기분이 어느새 한결 가벼워졌다. 원수니 악수니 해도 매번 그를 위해 씩씩거리며 화를 내주는 사람은 그녀밖에 없었다.
어찌된 일인지 연애를 하는 족족 차이는 것도, 못된 놈이 되는 것도 항상 나무 자신이었다. 이유도 참 일관적인 것이 이젠 그러려니 할 정도였다. 보기와 달라 환상이 깨졌다, 냉정하다, 평범하다, 무심하다, 재미없다.
오지 선다형 문제도 아니고 어쩜 이유조차도 그렇게 한결같은지 일홍이 고개를 저을 만도 했다. 하지만 그녀에게 하소연을 하다보면 어느새 아무것도 아닌 일처럼 느껴졌다. 그것 또한 그녀가 가진 불가사의랄까.
대뜸 일홍의 머리칼을 흩뜨린 나무가 안부를 물었다.
“그나저나 넌 요즘 어때? 진행 중인 짝사랑 있냐?”
“아니. 어째 반반한 놈이 없다.”
휙 걸레를 빼앗아 든 나무가 남은 부분을 닦으며 약을 올렸다.
“짝사랑 좀 그만 하고 제대로 된 연애를 해라. 연애를.”
“얼씨구? 그러는 연애 예찬론자께선 왜 만날 채이시나?”
머리에 꽂은 연필을 뽑은 일홍이 우수수 흘러내린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대충 훑어내리며 삐죽 입술을 내밀었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