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에서 왼으로 신북면의 북서 끝 지점에 위치한 양계리 금동 마을로 가는 길이 갈라져 나간다. 그 금동 마을 서에는 ‘똥배미’라는 논이 있었다고 하는데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연산군 때 몸집이 크고 정력이 센 여자를 찾으라는 왕명을 받은 채홍사(採紅使)가 이곳을 지나다가 이 논가에 매우 큰 똥덩이가 있는 것을 보고 똥 눈 사람을 찾다가 마침내 대갑에 사는 최부리의 딸이라는 것을 알아내고 그를 데려가서 연산군에게 바쳤다는 이야기다.
또 하나 재미있는 지명이 금동 마을 동에 위치한 학동리의 ‘생애바우’다. 이 바위는 상여처럼 생겼는데, 그 때문에 마을에서 청상과부가 많이 난다고 하여 바위 앞에 담을 쌓거나 나무를 심어서 가린다는 것이다.
---p.78∼79, "이틀째. 성전에서 영산포까지│백 리를 걷는 사람은 구십 리를 반으로 삼는다" 중에서
조선시대 말엽 갈재 동 지역에 민족종교 또는 신흥종교들이 이처럼 성세를 이루었던 것은 무슨 연유일까? 생각해보면 백제 멸망 이후에서부터 그 원인을 찾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후백제를 열었던 견훤과의 악연 때문에 고려 태조 왕건은 「훈요십조」를 남겨서 호남 지역 사람들이 벼슬에 오르지 못했다. 다행히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의 관향이 전주라서 조선시대 전기에는 호남 지역에서도 벼슬길에 많이 올랐으나, 1589년(선조 22)에 일어난 정여립의 난이라고 일컬어지는 기축옥사(己丑獄死) 이후 호남 지역은 다시 차별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참고 참았던 이 지역의 민중들이 들불처럼 일어났다가 실패한 것이 동학농민혁명이었으며 그 뒤를 이어 증산교, 대종교(大倧敎), 보천교, 원불교(圓佛敎) 등이 실의에 빠진 민중들의 가슴속에 파고들었을 것이다.
---p.136, "나흘째. 장성에서 정읍 태인까지│산수가 좋기로는 첫째가 장성" 중에서
연지동에서 동북으로 조금 떨어져 있고 북면으로 가는 길옆에 있는 수성동은 서인의 영수였던 송시열이 최후를 장식한 곳이다. 조선 선조 40년(1607)에 태어난 송시열은 인조 11년(1633) 생원시에 장원급제하였으며 나중에 봉림대군의 스승이 되었다. 그 인연으로 봉림대군이 임금으로 즉위한 1649년부터 그는 정국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그러나 효종에 이어 현종이 죽고 숙종이 왕위에 오른 후 향리에 은거해 있던 그는 장희빈이 낳은 왕자 ― 훗날의 경종 ― 에게 원자 호칭을 부여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상소를 올렸다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1689년(숙종 15)에 제주도에 유배 갔다가 돌아오던 송시열은 수성동의 은행나무 거리에서 죽음을 맞게 되는데, 숙종은 “그의 죄악은 국문하지 않아도 여지없이 나타났으니 도사가 약을 가지고 가다가 그를 만나는 대로 사사하라”는 영을 내렸던 것이다. 송시열이 국문을 받으러 올라오던 중 전라도 정읍에서 사약을 받을 때 거적 한 장만이 깔려 있었다. 제자들이 자리가 추하니 바꾸는 것이 좋겠다고 권유하자 송시열은 “우리 선인(아버지)께서는 돌아가실 때 이만한 자리도 못 까셨네” 하고 거절한 뒤 사약을 마셨다고 한다. 그의 나이 83세였다.
---p.142~143, "나흘째. 장성에서 정읍 태인까지│산수가 좋기로는 첫째가 장성" 중에서
1894년 조선 조정은 동학농민군과 전주화약을 맺었으나 그 약조를 지키지 않아 그해 9월 농민군은 삼례에서 재기포(再起包)를 하였다. 논산을 거쳐 북상한 농민군은 무장한 일본군과 관군에 대항하여 싸움을 벌였는데, 그것이 유명한 우금치(牛金峙) 전투다.
공주시 금학동에 있는 우금치는 나라 어느 곳에나 있음직한 야트막한 산이다. 소 크기만 한 금이 묻혔다고 하거나, 소를 몰고서는 넘지 못하는 고개라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라고 하는데, 지금은 이 고개에 포장도로가 뚫려 공주와 부여를 오가는 자동차들의 행렬이 끊일 날이 없다.
1894년 조정에서 펴낸『갑오관보(甲午官報)』에는 “일군과 관군이 산 능선에 둘러서서 일시에 총탄을 퍼붓고 다시 안으로 몸을 숨기고 적이 고개를 넘고자 하면 또 산능선에 올라 총탄을 퍼붓는다. 이렇게 하기가 40~50차례가 되니 시체 쌓인 것이 산에 가득하다”고 기록해놓고 있다. 결국 적게는 30만, 많게는 50만 명에 이르는 희생자를 낸 후 동학농민혁명은 실패로 돌아갔고, 조선왕조 또한 급격하게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p.230~231, "여드레째. 공주대교에서 차령고개까지│길 위에 새겨진 도시의 흥망성쇠" 중에서
광덕면 대평리 피덕 마을에서 동북으로 조금 떨어져 위치한 곳에 ‘울바위’가 있는데 굴이 깊어서 소리를 지르면 되울려 나와 그런 이름을 지었다고 하며 한자로는 ‘명암(鳴岩)’이라 쓴다. 그리고 그 옆에는 ‘장수 발자국’, ‘장수 오줌 눈 자국’, ‘수레 끈 자리’ 등의 묘한 지명들이 남아 있는데, 이들은 모두 역사 기록에는 실려 있지 않지만 조선 명종 때 차령고개에서 활동했다고 하는 안수(安壽)라는 의적과 관련이 있다.
‘울바위’ 옆에 있는 ‘장수 발자국’은 도적 안수가 발로 밟은 발자국이라고 하고, 또 그 옆의 ‘장수 오줌 눈 자국’은 바위가 오줌 자국처럼 파인 모양으로서 안수가 오줌을 눈 자국이라는 것이다. 또한 ‘수레 끈 자리’는 ‘장수 오줌 눈 자국’ 옆에 나 있는 길을 일컫는 것인데 산이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푹 패어 있어서 마치 수레바퀴가 지나간 자국같이 생겼다. 그래서 안수가 관곡(官穀)을 털어 수레에 실어 그의 소굴로 가지고 들어간 자국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설화들을 종합해보면 안수가 얼마나 기골이 장대하고 거리낌이 없는 신화적인 인물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p.245∼248, "아흐레째. 차령고개에서 안성천까지│천안이 태평하면 천하가 평안하고"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