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태후는 누구인가?
서태후는 1861년(함풍11)에 함풍제(咸豊帝)가 열하의 별궁에서 서거한 이후부터 1908년(광서34) 광서제(光緖帝)가 영대에서 서거할 때까지 약 50여 년 동안 세 번이나 수렴청정을 하여 청나라 말기에 있어서 전제정치의 실권을 장악한 여걸이다.
그녀는 황제의 정실도 아니었다. 함풍 원년에 민간에서 뽑힌 궁녀로서 함풍제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아 황귀비로 출세 하였고, 아들 동치제(同治帝)를 낳은 이후부터는 정실인 동태후(東太后)를 능가하는 실권을 갖기에 이르렀다.
유교 도덕이 뿌리 깊은 중국에서는 원래 여성의 지위는 하늘의 이치에 따라 낮게 운명지어져 있었지만, 서태후의 경우는 이미 제1선을 물러난 태후의 몸이면서 항상 정치권력에 대한 집착을 끊지 못하고 황제를 능가하면 능가했지 떨어지지 않는 정치력을 발휘한 점으로 보더라도 실로 특이한 존재이다.
서태후는 한나라의 여후(呂后), 당나라의 측천무후(則天武后)와 함께 중국이 낳은 3대 여걸의 한 사람이고, 또한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 스페인의 이사벨 여왕과 함께 근세에 있어서 세계 3대 여왕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당시 청나라 조정은 내우외환이 함께 들이닥쳐 중대한 위기를 맞고 있었다. 유럽의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은 산업혁명이 진행되어 차츰 경제적 모순 속에서 갈등이 심해지자 아프리카, 아시아 후진 지역에 대하여 식민지 개척의 야망을 품기 시작했다. 중국 근대사의 개막을 상징하는 아편전쟁(1840, 도광20)을 거치고 나서 애로호사건(1856, 함풍6)을 계기로, 봉건적 전제정치를 계속해 온 청나라는 영국과 프랑스 등의 열강에 의해 굴욕적인 천진조약(1858)을 강요당하고, 그 이듬해에는 이 조약의 비준서 교환에 나섰던 외국 사절이 대호구(大浩口)에서 저지당한 것이 발단이 되어 다시 전쟁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1860년 영·프연합군은 북경에 진격하여 유명한 원명원(圓名園)을 파괴하였다.
결국 청나라 조정은 영·프 연합군과 북경조약을 체결하고 천진조약 비준서의 교환과 신(新)조약의 조인에 의해 수많은 권리를 빼앗겨야 했다. 그리고 이때 함풍제는 전쟁을 피해 열하로 도망가는 신세가 되었다.한편 국내에는 아편전쟁의 패배로 황제의 위신은 땅에 떨어지고 사회 불안이 거세어졌다.
비밀결사가 만들어지고 폭동이 잇달아 일어났다. 홍수전에 의한 태평천국의 난(1850, 도광30)은 다음해(함풍 원년)에 영안, 1853년에 남경을 유린하여 남경에 태평천국의 수도를 정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내외의 절박한 상황 속에서 1861년 8월 함풍제는 열하에서 서거했다. 서태후의 숨은 정치적 수완이 어린 동치제를 황위에 옹립하고자 하는 야망과 곁들여 유감없이 발휘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였다.
서태후는 북경에 머무르며 정국을 담당하고 있던 함풍제의 동생 공친왕 혁흔(恭親王 奕言斤)과 모의하여 함풍제의 유언과 다르게 반 양무파인 숙순, 이친왕, 정친왕을 체포하여, 친왕에게는 자살을 명하고 숙순은 참수시켰다. 서태후의 모의는 성공하여 어린 동치제의 즉위와 함께 동태후와 서태후의 수렴정치가 시작된다. 이 정변에서 발휘된 서태후의 정치적 수완은 뒷날 무술정변 때에도 용의주도한 책략으로 강유위 일파에게 일격을 가한 사실과 함께 생각해 본다면 놀라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리하여 태평천국의 난이 평정된 1864년부터 1884년의 청프전쟁까지의 20년 동안은 천진교안(天津敎案, 1870, 천진에서 일어난 반기독교운동)이나 마가리 살해사건(1875, 영국 영사관의 서기 A. R. 마가리가 윈난으로 가던 중 살해된 사건)에서 볼 수 있는 외교 분쟁도 있었지만 표면상으로는 태평무사하여 ‘동치중흥(同治中興)’이라 불렸고, 공친왕, 증국번, 이홍장, 좌종당 등의 적극적인 정책에 의해 유럽문화를 받아들이는 소위 양무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서양의 무기, 탄약, 기계 등의 구입과 제조에 중점을 두고 중국의 부국강병을 지향한 양무운동은 과학 기술의 물질적인 면만 강조되고 서양의 근대적인 정신이나 제도적인 면은 간과되었다. 그리하여 청프전쟁(1884~1885), 청일전쟁(1894~1895)의 패배 결과 이러한 서양문화의 편향적인 채용방법에 대한 엄격한 비판이 일어나 드디어 급진적인 정치개혁을 주장하는 강유위 등이 등장하여 무술변법(戊戌變法)운동이 전개되었다.
서태후를 중심으로 한 수구파는 광서제나 강유위 등을 중심으로 한 유신파의 진보적인 제도개혁에 전면적으로 반대하였다. 결국 원세개의 배반으로 유신파의 신정(新政)은 겨우 103일 만에 서태후에 의해 괴멸되고 말았다. 이것이 곧 무술정변이다.
광서제는 남해의 영대에 유폐되고 서태후의 세 번째 수렴정치가 시작된 것이다. 그녀의 나이 64세였지만 정치에 대한 집착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고 광서제가 단행한 여러 가지 신정을 모조리 원상 복귀하여 보수적인 정책을 실시하였다. 그리하여 부청멸양(扶淸滅洋)의 기치를 내건 의화단(義和團)이 구교(仇敎)운동-기독교 배격운동-을 전개하여 참패를 당했다. 수도 북경은 함락되고 또다시 그녀는 광서제와 함께 서안으로 도망쳤다.
의화단의 난의 수습을 위해 청나라의 일본, 영국, 미국, 프랑스, 러시아, 독일 등 11개국 사이에 체결된 신축(辛丑)조약은 총액 5천만 냥의 배상 외에 외국 공사관 구역 설정, 외국에 의한 관세·염세의 관리 등으로 중국은 반 식민지화되고 말았다.
서태후는 1902년(광서28)에 북경으로 돌아오자 손바닥을 뒤집듯이 제도개혁을 단행하여 외국의 상급 관료와도 친하게 교제하였다. 그리고 러일전쟁 후에 중국의 지식층 사이에서 패전의 원인이 구식 전제정치에 있었다는 비판이 일어나 헌정실시를 요구하는 소리가 높아지자 서태후도 헌정의 채용을 결의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1906년 민선에 의해 의정부를 설치하게 하였다.
그러나 민중의 멸만흥한(滅滿興漢)의 폭풍은 이전보다도 더욱 거세어져 손문 등을 중심으로 한 혁명 세력은 차츰 그 세력을 늘려 신해혁명(1911)에 의해 중국 최후의 제정을 타도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서태후 자신은 청나라의 멸망을 눈으로 보지 못하고 1908년 광서제가 서거한 다음날인 11월 15일에 세상을 떠났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