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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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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08년 02월 13일
쪽수, 무게, 크기 400쪽 | 409g | 규격외
ISBN13 9788951024191
ISBN10 8951024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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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영순은 이미 끊겨진 핸드폰을 한참동안 멍하니 바라봤다. 새로 입사한 회사에 업무가 밀려서 오늘도 만나지 못한다는 건후의 냉정하리만큼 무심한 말이 끝남과 동시에 전화도 끊겨버린 것이다. 무슨 업무가 그렇게 많기에 매일 야근하는 것이냐고 투정 아닌 투정을 부려도 보고 하루쯤 야근하지 않으면 회사가 안 돌아가느냐고 윽박질러 보기도 했다. 급기야는 우리 만난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다고 떼를 써보기도 했지만 씨도 안 먹혔다. 언니인 영미의 말에 따르면 이런 경우 대개 99% 남자가 바람 난 거라지만, 영순은 귀를 틀어막으며 듣지 않으려 애썼다. 한사코 괜찮다는데도 불구하고 영미는 영순을 앞에 앉혀놓고는 조언을 해준답시고 건후의 뒤를 캐내는 것이 급선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영순이 알기로는 그가 자신을 만나는 730일 동안 단 하루도, 단 한 번도 한눈을 판 적도 없으며 거짓말을 한 일 또한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니 영순에게는 영미의 조언이 그저 저 좋다는 남자 콧대 세우며 다 마다하더니 결혼도 못해 엄마에게 등 떠밀려 선 자리나 전전하고 있는 불쌍한 언니의 허술한 조언쯤으로 대수롭게 여겨졌다. 그때까지는 그는 영순에게 있어 최고의 남자친구임이 분명했고, 자리가 잡히는 대로 프러포즈하겠다고 심심치 않게 말했기에 영순은 그가 최고의 남자친구를 넘어서 최고의 남편이 될 것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 그녀에게 영미는 차마 어떤 새파랗게 젊은 계집애랑 벌건 대낮에 모텔에서 나오는 것을 두 눈으로 목도하였다고 말할 수 없었다. 어쩌면 충격으로 병원 신세를 지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았기에 살짝 운만 띄워주는 것이 전부였지만, 미련한 곰 같은 동생은 영미의 말에 콧방귀를 끼며 웃어 넘겨버리는 통에 답답해 미칠 지경까지 이르렀다. 영순은 주방으로 가서 내일 아침 일찍 그에게 손수 만든 도시락을 주기 위해 준비해 둔 재료를 손봐 두었다.
“얼마나 피곤하겠어. 이럴 때일수록 밥 거르면 절대 안 되지. 아침에 집에 가서 도시락만 식탁 위에 놓고 가면 감동이 물결처럼 밀려오겠지? 아마 눈물을 흘리며 전화할지도 몰라.”
영순은 김밥을 싸기 위해 시금치를 물에 데치고, 당근을 잘게 썰었다. 그리고 샌드위치를 만들 식빵을 네 등분하여 따로 분리해 놓았다. 즐거웠다. 건후에게 이렇게라도 힘이 될 수 있어서.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영순은 재료를 손봐 두다가 식탁에 앉아서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다행히 알람시계 덕분에 영순은 세 시간 자고 나서 다시 도시락을 만들었다. 우선 김밥을 말아 마지막 칸에다 넣었다. 야채볶음밥은 두 번째 칸에다 담았다. 첫 번째 칸엔 유부초밥, 각종 야채와 햄을 무쌈에 말아준 무쌈말이, 과일을 담았다. 무려 네 시간에 걸쳐 3단 도시락을 완성한 영순은 그제야 기지개를 피며 출근준비를 했다.
“너 너무 열심이다?”
“뭐가?”
“건후한테 말이야. 너무 지극정성이야. 그러다 차이는 애들 내가 한둘 본 줄 알아?”
도시락을 열며 과일 하나를 집어든 영미의 손을 영순은 매섭게 쳐냈다. 아침부터 재수 없는 소리 한다며 한바탕 쏟아 붓고 나온 영순은 도시락을 들고 한걸음에 건후의 집까지 달려갔다. 자고 있을 그가 깰까봐 영순은 초인종 대신 열쇠로 그의 문을 열고 슬금슬금 도둑고양이처럼 들어갔다. 하지만 여자의 구두가 정확히 자신의 구두 앞코에 부딪치자 도시락을 싸는 내내 설렘에 가득 찼던 영순은 불길한 예감에 얼굴이 굳어졌다. 영미가 누누이 경고했던 말이 뇌리에 스쳤지만 그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기 위해 무단히 애썼다. 영미는 천천히 그의 침실로 향했다. 빠끔히 열려 있는 방문 사이로 새근새근 자고 있는 건후의 얼굴이 보였다. 영순은 안심하고 지나치려다, 눈동자에 언뜻 비친 낯선 여자의 모습에 들고 있던 도시락을 하마터면 바닥으로 내팽개칠 뻔했다. 영순은 터져 나오는 비명을 참기 위해 손으로 입을 막아야 했다. 영순은 도시락을 들고 있는 손이 마치 수전증에 걸린 환자의 손처럼 낯설었다. 하는 수 없이 다른 손으로 손목을 잡으며 속으로 스스로를 안심시켰다. 그의 집에서 서둘러 빠져 나온 영순은 문을 잠그려다 바닥으로 열쇠를 떨어뜨렸다. 그제야 자신의 손이 열쇠 구멍을 찾지 못하고 주위만 맴도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떻게 다시 문을 잠갔는지 기억조차 없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버스정류장이었다. 그제야 바닥에 주저앉아 목 놓아 울어 버렸다. 조금만이라도 그가 틈을 보여줬어도 이렇게까지 믿지 않았을 거다. 조금만 그가 덜 사랑한다고 말해줬어도 영순은 이렇게 배신감을 느끼지 않았을 거다. 영미가 뭐라고 해도 영순은 끝까지 믿어 의심치 않았다. 오히려 건후를 나쁜 놈으로 만들어 버리는 영미가 사람 볼 줄 모르는 것이라고 콧방귀까지 뀌지 않았던가.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숨조차 쉴 수 없었다. 침대에 나체로 누워 있는 건후와 여자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리자 영순은 오열했다.
“사랑한다며, 나만 사랑한다며. 나쁜 자식아. 나쁜 놈아.”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다. 지나가는 행인들의 동정심 어린 눈빛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30년 동안 마음대로 써왔던 다리가 한순간 힘이 풀려 제멋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은 셈이다.
“그래도 사람은 한번쯤은 한눈 팔 수 있는 거니까 미안하다고 하면 눈 딱 감고 용서해 줄게. 그러니까…….”
스스로가 생각해도 비참했다. 바닥에 내동댕이쳐 있는 도시락을 바라보며 영순은 하염없이 울고 또 울었다. 그렇게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건후에 대한 믿음은, 정확히 730일째 되는 날 무참히 깨져버렸다. 정신을 놓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스스로를 기특하게 생각하며 교무실에 들어왔다. 선생들은 뜬금없이 3단 도시락을 품에 안은 채 퀭한 눈으로 교무실에 들어오는 영순을 서로 쳐다만 볼 뿐, 그녀에게 쉽사리 말을 건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선생들이 하나둘씩 나가자 영순은 핸드폰만 만지작거리다 비장한 얼굴로 건후에게 전화를 걸었다.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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