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를 건설하는 사업에서 성별에 따른 노동 분업은 어떻게 일어났을까? 그러한 분업이 가정 내부에서는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남녀 사이에 갈등은 없었을까? 있었다면 그것은 어떻게 조정되었을까? 반영 투쟁을 벌이던 식민지 사람들은 모두가 그 대의명분에 동참하던 동질적인 집단이었을까? 개인들 사이의 이해의 상충에서 비롯된 범죄는 없었을까? 종교의 자유를 찾아 떠나온 청교도들 사이에 종교적인 관점의 차이는 없었을까? 이러한 문제들의 중요성은 그동안 인정받지 못해왔고, 중요성을 인정받았다 할지라도 해답이 불가능하다고 여겨 회피해 왔던 쟁점들이다. 그런데 200여 년을 사이에 두고 태어난 두 여인의 만남을 통해 이러한 쟁점들에 대한 구체적인 대답이 가능해졌다.”---p. 7, 추천의 글 중에서
마서는 스스로 의식하지 못했을지라도 반복과 관습적인 표현을 사용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4월 24일자 일기에서 마서가 몇 마디로 생생하게 행위를 서술하면서 그 사이사이에 틀에 박힌 종교적인 어구를 집어넣은 것을 보라.
“가는 길에 물에 떠 있는 통나무를 타고 시내를 무사히 건넜다. 천우신조. 길을 계속 가는데, 하인스 씨 집을 지나자마자 내 앞에서 큰 나무가 뿌리째 뽑히는 바람에 말이 놀라 튀어오르며 뒷걸음질쳤으나 목숨을 건졌다. 더할 나위 없이 자비로운 신의 가호. 하인스 씨 도움으로 쓰러진 나무를 건넜다. 계속 갔다. 얼마 안 있어 시내가 나왔다. 다리가 떠내려가고 없었다. 휴인스 씨가 고삐를 잡고 시내를 건너며 말을 끌었다. 이번에도 전능한 신의 도움으로 무사히 건너, 아무 탈 없이 도착했다.”
여기서 종교적인 감상은 이야기의 단계마다 종지부를 찍고 강조하는 일종의 후렴구가 되며, 이러한 구절은 마서가 작가는 아니더라도 솜씨 있는 이야기꾼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p. 22, 들어가는 글 중에서
마서 밸러드의 일기가 지닌 위력은 바로 이 일상성, 지루할 정도로 반복되는 지독한 일상성에 있다. 양말을 “덧대면서” 보낸 추운 날들을 언급하지 않고 강을 건넌 것만 발췌하고, 실패에 실을 감고 고기를 절이고 양배추를 추리면서 보낸 긴 가을날을 언급하지 않고 아기 낳은 것만 기록하는 것은 이 진지하고 성실한, 차분하고 용기 있는 기록의 근간을 뒤흔드는 행위다. 마서는 때로 강을 건너고 눈 속을 걸어 지루하게 진통이 끝나기를 기다리러 갈 때도 가방에 반으로 접은 종이를 넣어 가 일기를 썼으며, 역사가들이 ‘사소한’ 일로 치부한 바로 그런 일로 당혹스럽거나 기쁠 때도 자신을 성찰하는 청교도처럼 썼으며, 자의식이 넘치는 감상주의자가 아니라 사실 그대로 담담하게 썼다. 27년 이상, 정확히 9,965일 동안 마서는 꾸준히 기록했다. ---p. 24, 들어가는 글 중에서
18세기 용어로 말하면, 마서는 이론에는 관심이 없고 경험에만 의존하는 ‘경험주의자’였다. 마서 자신은 환자를 낫게 하는 것에만 큰 관심을 보였음을 말해준다. 마서는 폴리 케네디에게 주려고 찬물뿌리 팅크를 만든 뒤 “목을 헹구어주었더니 많이 편해졌다”고 했다. 같은 약은 마서의 남편이 “목이 가라앉아 편히” 잠드는 데도 도움이 되었다. 마서의 일기에는 이렇게 편해졌다, 편안해졌다는 말이 반복해서 나온다. 한 환자가 이질에 걸렸을 때 “관장을 했더니 편해졌고”, 해나가 아팠을 때는 카밀레와 장뇌를 주고서 “따뜻한 잠자리로” 보내고는 “편안해졌으면 좋겠다”고 했다. 따뜻한 차나 아픔을 달래주는 시럽은 육체의 편안함을 주었지만, 거기에는 자연은 문제가 생기면 해결책도 준다는 생각의 편안함이 있었다. 토실을 따뜻하게 해 어린 기디언 바턴의 목에 대주었을 때, 마서는 그저 고통을 달래기만 한 게 아니었다. 마서는 우주에는 본질적으로 질서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주고 있었다. ---p. 73, 1장 중에서
마서의 9월 9일 일기는 마서가 여기 쓰지 않았더라면 역사에서 익명으로 사라졌을 여성들을 복원시킨다.
“돌리와 파서니아가 햄린 부인을 보러 갔다. 새비지 부인이 여기. 부인이 4월 15일부터 내게 40배타래를 자아주고 재 2부셸과 제임스의 하제를 가져갔고, 돌리가 부인에게 마름모꼴 무늬 천 7야드를 짜주었다. 새비지 부인이 아마 날실 1타래를 가져가도록 했다. 모두 합쳐 6/ X.”
할로웰 남자들이 예배당에서 공적인 일을 하고 있을 때, 마서와 마서의 이웃들은 자기들 대로 몇 가지 사적인 일을 마무리짓고 있었다. 그런 행위에 새로운 것은 없었다. 뉴잉글랜드 여성들은 오래전부터 교환과 거래에 참여했다. 마서가 9월 9일에 새비지 부인에게 준 아마 날실 타래는 산업화 이전 생활을 특징짓는 가족 생산과 그런 생산을 가능하게 한 이웃간 거래, 여성이 경제생활에 참여할 수 있게 해준 성별 노동 분업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p.102, 2장 중에서
“소나기가 조금 내린 것을 제외하면 맑음. 오후에 손님이 왔다. 해나 노스 부인과 체버 부인, 코어스에서 온 웨스턴 부인이라는 사람. 새비지 씨가 여기. 포스터 부인이 남자 몇 명이 자신을 강간했다고 고소했으며, 그 가운데 노스 판사도 있다고 한다. 정말 충격이다.” ---p.130, 3장 1978년 10월 1일 일기 중에서
1790년 7월 12일|“키더 씨 집에. 밸러드 씨가 재판에 참석했다. 노스가 무죄 선고를 받아 깜짝 놀랐다.”
그 얘기를 하는 사람마다 모두 그랬다. 마서가 “깜짝 놀랐다”고 한 것을 보면 노스가 꼼짝 못할 정도로 확실한 증거가 있었던 모양이다. 마서에게 깜짝 놀랐다고 한 사람들은 아마 재판에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대부분 여성이었을 것이다. 이 짧은 일기에서 마서는 판사가 유죄라는 주장에 가장 가까이 접근했다. 마서의 평소 습관을 볼 때, 판사의 이름 앞에 직함을 붙이지 않은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p.158, 3장 중에서
1791년 10월 23일에는 눈이 왔다. 이날 마서는 샐리 피어스의 부름을 받았다. 이것은 사생아의 출산이 될 것이었고, 따라서 마서는 무엇을 물어야 할지 알았고 샐리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았다.
“샐리가 오후 1시에 무사히 건강한 아들을 낳았다. 그녀가 아주 많이 아팠으나 나올 때는 괜찮았고, 해질 무렵에 …… 돌아왔다. 샐리가 내 아들 조너선이 아이의 아버지라고 진술했다.”
마서는 그러고는 가장자리에 그냥 “샐리 피어스의 아들 태어남. 27번째 출산”이라고만 썼다. 이날 일기의 의미를 완전히 알려면 먼저 18세기 뉴잉글랜드에서 미혼모가 법적으로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 알 필요가 있다. 매사추세츠 법은 언제나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끼리의 성교를 범죄로 규정했다.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17세기와 18세기 초에는 법원에서 출산할 때 누가 아이의 아버지인지 밝히려고 아이 어머니에게서 받은 증언을 토대로 사생아를 낳은 어머니 못지않게 아버지도 엄벌에 처했지만 18세기 중반에는 사통죄가 여성의 죄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p. 183, 4장 중에서
일기 하나하나는 무미건조해 별다른 의미가 없어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모두 합치면 18세기 관습과 관례를 보여주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기록이 된다. 아주 틀에 박힌 일상적인 정보도 유익하다. 어쩌다 임신과 출산으로 인한 합병증을 언급한 것도 그냥 “낳았다” 또는 “무사히 낳았다”고 하는 수많은 일기와 관련해서 보면 더 의미가 있고, 24실링이라는 보수도 6실링이나 그냥 ‘XX’라고만 한 것들과 대비해서 보면 새로운 의미가 생긴다. 수많은 일기에서 아무도 의사를 부를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을 고려하면, 출산할 때 의사가 있는 것도 주목할 만한 것이다. 마서 밸러드의 일기에 나온 다른 많은 일과 마찬가지로 출산과 관련된 일도 따분한 일과 영웅적인 일, 일상적인 일과 보기 드문 일이 결합해 이야기를 만든다. ---p. 207, 5장 중에서
일기가 자세하지 않은 것은 또 우리가 이미 아는 사실, 즉 마서의 산파술이 실험적이기보다 전통적이었다는 사실도 분명하게 말해준다. 이 시기에 책을 내고 임신 출산과 관련한 사례를 기록한 의사들과 달리, 마서는 다른 사람을 가르치거나 새로운 방법을 실험하고 장려하는 일에 흥미가 없었다. 마서는 글이 아니라 손으로 훈련을 했고, 산파술에 통달했으니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아기를 받을 때마다 결과가 중요했지 과정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나아가 일을 하는 문화적 환경도 결과를 전문적으로 설명하는 것을 삼가도록 했다. ---p. 212, 5장 중에서
추운 날 밤 마서 밸러드를 침대에서 끌어낸 것은 무엇이었을까? 왜 마서는 발이 얼고 뼈가 부러지는 위험을 무릅쓰고 자기 일을 했을까? 물론 산파 일은 대다수 여자들이 일하고 받는 대가에 비하면 많이 받는 셈이었다. 마서는 자기 “보수”에 관심을 가졌고, 일을 하고 받는 것을 꼼꼼하게 챙기고 기록했다. 그러나 돈만으로는 그녀의 헌신을 설명할 수 없다. 마서에게는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는 게 신에게 봉사하는 것이었다고 말하는 것도 충분하지 않다. 마서는 삶의 모든 일과 마찬가지로 자기 일도 종교적으로 해석했다. 신이 봄철 홍수로부터 자신을 구했고, 어려운 출산도 이겨낼 수 있게 해주었으며, 산모와 아이의 생명을 지켜주고, 자기에게 계속 일을 할 수 있는 힘을 주었다. 그러나 종교적 신앙도 모든 것을 설명해주지는 않는다. 산파 일은 일종의 봉사이고 물질적 보상을 얻을 수 있는 것이었지만, 그보다는 내면에서 우러나온, 자신의 존재에 대한 주장이었다. ---p. 246, 5장 중에서
2월 4일|“아들 집으로 에스콰이어 데이비스의 아들 해부하는 것을 보러 오라고 했다. 해부는 아주 면밀하게 진행되었다. 가벼운 것 왼쪽 잎사귀에 염증이 많이 생겼고, 창자도 마찬가지다. 창자에는 네 개의 교차점이 있었고, 신장과 쓸개에도 염증이 있었다. ……해부는 콜먼 박사와 페이지 박사가 하고, 노스 판사와 아들 조너선, 나는 참관했다.”
마서가 ‘해부’에 대해 이야기한 것들은 초기 미국 해부의 역사에서 아주 드문 기록이며, 여자가 써서 특히 중요하다. 마서가 살던 시기에는 뉴잉글랜드에서 해부가 어느 정도 관례가 되었다. 코튼 매더와 새뮤얼 슈얼(청교도였던, 헨리의 선조) 모두 17세기 말에 보스턴에서 해부한 것을 기록했다. 18세기 초반에는 과학에 시신을 기증하는 것이 공공의식이 있는 행위로 여겨졌다. 1736년 2월 10일자 ≪뉴잉글랜드 위클리 저널(New England Weekly Journal)≫은 ‘폐결핵’으로 죽어가던 데덤의 젊은 여성이 “비슷한 병으로 고생할지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자기 내장을 해부해서 검사하기를 간절히 바랐다”고 보도했다. 18세기 중엽에는 해부한 결과가 때로 신문에 보도되기도 했다. ---p. 297, 5장 중에서
마서는 자신의 기도와 놓친 잠, 자신이 자비와 인정을 베푼 행위도 기록했지만, 일상생활에서 경험하는 사소한 다툼과 작은 행복도 기록했다. 일기는 마서가 자신의 삶을 이해하고 정당화할 필요성에 따라 선택적으로 기록한 것이지만, 아주 솔직한 기록이기도 했다. 우리는 일기를 통해 마서가 거름을 삽으로 떠서 나르고 고양이 피를 빼는 시온의 딸이며, 양심적으로 보수를 받고 가끔은 큰 맘 먹고 새 찻주전자를 사거나 새 드레스를 사 입는 신앙심 깊은 산파이고, 딸들이 빨래하는 동안 낮잠을 자고 하인들이 행동을 잘못하면 꾸지람을 하고 가끔 남편과 싸우기도 하는 자기희생적인 이웃이라는 것을 안다. 일기는 우리에게 독실한 기독교인이지만 때로는 지성 탓에 교회에 가거나 읍에 있는 의사들의 의견에 따르지 못했던 소박한 간호사였고, 자기 집의 소유권을 놓고 아들과 싸우고 때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는 정다운 어머니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마서는 의무감과 해부에 대한 호기심이 강해 고인의 죽음을 슬퍼하면서도 해부하는 것을 지켜본 부드러운 여성이었으며, 결코 자기 말에 가만히 앉아 있을 줄 모르는 용감한 여성이었으며, 몇 번이나 자살과 살인, 전쟁과 마주쳤으면서도 궁극적으로는 정의가 승리할 거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은 날카로운 눈과 현실적인 감각을 지닌 여성이었다.
---p. 410, 10장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