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뜻을 같이하는 일본과 한국의 지식인들이 모여 21세기에 걸맞은 새로운 한일관계를 모색하고자 2004년 8월 ‘한일, 연대 21’을 발족하였다. 우리는 문명사회의 중요한 지표의 하나인 자기비판을 핵심어로 삼는 데 합의했다. 한국과 일본이 서로를 비난하는 일방통행이 아니라 한국과 일본이 스스로를 비판하는 반구(反求)의 성숙한 자세에서 자기 사회를 쇄신하는 과정에서 연대하는 제3의 선택을 실험하기로 했던 것이다. ---p.7~8, 최원식[‘한일, 연대 21’ 대표]의 서문중에서
그리하여, 박유하 교수와 내가 나눈 개인적인 대화는 곧바로 한국과 일본의 양국에서 공동으로 내셔널리즘을 비판하고 해체해나가는 실천을 해나갈 수밖에 없다는 방향으로 결실을 맺었다. 이른바 ‘국제관계’에서 불가능한 연대를 지역 간에서 해나가기 위해서는 인간으로서의 지적 신뢰관계에 바탕을 둔 연대의 지평을 확산시켜나가는 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한국과 일본에서 각각 자국의 내셔널리즘을 비판하는 개인이 연대하지 않고는 21세기 한일관계의 전망을 개척할 수 없다는, 그 자체로서는 조금은 주관적인 결의가 이 모임의 발단이 된 것이다. ---p.11, 고모리 요이치 서문중에서
그러므로, 근대 한국인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에 일본 국가가 개입하였던 사실과는 전혀 다른 의미에서, ‘일본’은 다시 탈식민지 사회 한국인의 정체성 형성에 개입한다. 즉, 한국 내셔널리즘에 있어서 ‘일본’은 한국인을 만들어내는 가장 긴요한 도구로 기능한다. ‘국사’를 비롯한 모든 민족 서사 및 담론들에서 집단적 주체로서의 ‘한국민’(혹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인민’)의 집단적 기억(동시에 집단적 망각)을 만들어내고 유지하는 데에 ‘일제’의 위력은 여전히 크다. ---p.57, 김철, 「저항과 절망」
인간은 ‘국민적(민족적) 주체’만으로 살아가는 것은 아니며 그것은 식민지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셔널리즘의 기억은 모든 개별적 삶과 죽음을 단일한 ‘민족(국민) 주체’로 환원하고, 그 ‘민족(국민) 주체’의 위치가 아닌 다른 위치에서의 발화는 부차화하거나 무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글의 서두에서 예로 들었던 조선 출신의 가미카제 특공대원들의 경우에서 보듯이, 내셔널리즘은 이만 명이 넘는 이 ‘동포’들의 죽음을 어떤 식으로도 말하지 못한다. 대부분의 조선인들이 ‘민족으로서의 저항 주체’로서보다는 ‘일본 국민으로서의 주체’(또는 그 둘이 뒤섞인 주체)로 살았다는 역사적 사실을 정면으로 사유할 가능성, 더 나아가, 그 사실로부터 식민주의와 제국주의를 넘어설 어떤 역사적 비전을 이끌어낼 가능성은 내셔널리즘의 세계인식 속에는 전혀 없다. ---p.60~61
그렇다고 한다면 결국 문제는 우리 안의 불신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사죄를 사죄로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 사죄하는 주체에 대한 신뢰라고 한다면, 일본에 대한 불신이 우리 안에 남아 있는 한 일본이 어떤 사죄를 하더라도 우리는 그 사죄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불신은 의혹을 낳고 의혹에 휩싸여 있는 한 경계심은 늦춰지지 않을 것이다. 경계심은 미소조차 위선으로 보도록 할 것이며, 내밀어지는 보상금 역시 ‘돈으로 무마’하려는 행위로 보이도록 할 것이다. 그동안 의식적?무의식적으로 일본과의 불화를 조장해온 이들로서는, 그리고 그들이 현재까지 이 사회의 주류라는 점에서도 그들은 자신의 정당성을 훼손시키지 않기 위해 일본에 대한 의구심을 갖도록 만드는 담론을 지속적으로 생산해낼 것이다. ---p.78, 박유하, 「한일 간의 과거 극복은 어떻게 가능한가」
오늘날 한국 사람들이 지난 20세기 전반의 식민지기와 관련하여 그 시대를 상징하는 사건으로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몇 가지들, 예컨대 일제가 대규모 토지를 수탈하였다거나 대량의 쌀을 약탈하여 실어날랐다든가 전시기에 여자정신대를 동원하여 일본군위안부로 삼았다든가 하는 대중적 이해는 역사가의 시각에서 지적하자면 정확한 사실이 아니다. 그러한 오해가 국민의 집단기억으로 성립한 것은 이 글에서 추적한 대로 한국의 국사 교과서가 그의 학생들을 그렇게 가르친 효과가 장기간 누적됨에 의해서이다. 해방 후부터 국사 교과서가 그러했던 것은 아니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사실관계의 왜곡은 없었던 편이다. 신화가 만들어지는 조짐은 1960년대부터 조금씩 관찰되며, 1974년 이후 교과서 편찬제도가 국정으로 바뀌면서 전면화하였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토지조사사업에 의해 토지의 40%가 수탈되었다는 이야기가, 식량의 절반이 수탈에 의해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이야기가 교과서에서 정설로 자리잡는 것은 1974년부터이다. 1932년부터 존재한 위안부를 1943~1945년의 정신대와 혼동하는 교과서의 서술은 1979년부터 1997년까지의 18년간에 걸쳐 서서히 완성되었다. ---p.126~127, 이영훈, 「국사 교과서에 그려진 일제의 수탈성과 그 신화성」
요컨대 이 책은 제국주의와 민족주의의 대항이라는 단단한 틀에 입각해 서술할 뿐, 동아시아의 근현대란 어떤 시대였는가에 대한 전체상은 묘사하고 있지 않다. 『미래를 여는 역사』가 그 주요한 문제의식을 “일본의 침략전쟁을 둘러싼 역사사실을 3국에서 공유하는” 시도에만 한정한 것이 내포한 문제가 여기서 새삼스럽게 떠오른다.
아마도 이 책의 관계자들은 아시아태평양전쟁이 아직 역사화되지 못한 상황에서는 ‘일본의 침략전쟁’으로 주제를 ‘한정’할 필요가 있다는 인식에 도달했을 것이다. 일본의 전후보상도 불충분하고 역사인식이 여전히 외교문제가 되는 현 상황에서 일본의 침략전쟁을 전면화하고 이를 중심으로 한 역사상을 제공하는 것은 분명히 중요하다. 그러나 아시아태평양전쟁에 의해 형성된 모순과 대항은 지금까지 그대로 이어진 것이 아니라, ‘전후’의 ‘냉전’의 모순, 더 나아가 ‘전후후(戰後後)’, ‘냉전후’의 모순과 중첩되어 현재에 이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미래를 여는 역사』가 주제를 한정한 것은 아무래도 궁색했다. ---p.153, 나리타 류이치, 「‘동아시아사’의 가능성」
‘동아시아의 근현대사’라고 했을 때, 국가의 상위에 있을 터인 동아시아의 시점(즉, 평가의 축)이 이 책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또 ‘민족’의 개념에 대한 검토가 이루어지지 않으며 민족 간의 대립이나 항쟁에 대해서도 언급되지 않는다. 애당초 ‘동아시아’의 ‘근현대사’를 논할 때 시간과 공간의 문제, 즉 동아시아라는 공간은 언제, 어떻게, 어떤 범위까지, 어떤 근거로 일괄되어 거론되었는지를 『미래를 여는 역사』는 검토하고 있지 않다. 거듭 말하지만, 이 책은 오늘날 동아시아의 국민국가 질서를 전제로 해서 현존하는 국민국가를 주체(주어)로 삼는 데서 출발한다. 이런 점에서 『미래를 여는 역사』는 내셔널 히스토리(국사)를 넘어서지 못했으며 오히려 내셔널 히스토리를 강화하고 말았다고 볼 수 있다. 위생, 철도, 교육 같은 주제를 통해 제국과 식민지 관계의 복잡한 양상을 묘사하면서 국가를 기준으로 삼는 데서 벗어난 역사상을 그려낼 수 있지 않았을까? (154, 상동)
나는 정부의 요청을 받아 ‘기금’의 발기인이 되었다. 내가 그 호소에 응한 가장 큰 동기는 국회결의를 둘러싸고 결집하는 우익의 강력함에 마음속으로부터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다.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정부가 조치를 취하는 것이 어려워지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발기인 역할을 맡았을 때, 내가 제시한 조건은 전국지에 전면광고를 내서 출발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으로 정부의 자세가 후퇴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는 보장을 받으려는 것이었다. 나와 같이 참가한 발기인이나 이사들이 ‘기금’에 들어간 것은 삼당합의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개선을 실현시키는 것이었다. ---p.174, 와다 하루키, 「아시아여성기금 문제와 지식인의 책임」
이리하여 ‘기금’은 전후 50주년에, 베이징여성회의 직전에, 국제사회에 대한 일본의 정치적 퍼포먼스로서 만들어졌다. 그것은 자민당 단독정권하에서는 가능성이 전무했던 전후보상 문제를 ‘위안부’ 문제를 계기로 돌파할 역사적인 호기였으며, ‘국가 차원의 보상은 하지 않는다(이미 끝났다)’는 그때까지의 자민당 정권의 틀을 유지하면서도 실리를 추구한 정치적 교섭의 산물이 ‘기금’이었다는 것은 여러분이 알고 있는 대로이다. 사실, ‘기금’ 이사 중에는 전후보상 문제에 오랫동안 전념해온,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이라 불리는 분들이 여러분 있다. 10년이 지나 그 결과를 역사적으로 판정해보면, 첫째 매우 유감스럽게도 ‘기금’ 관계자의 정치적 판단은 옳았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p.187, 우에노 지즈코, 「아시아여성기금의 역사적 총괄」
세 번째로 이 메모의 보도가 최근에 부상하기 시작한 새로운 움직임과 합류하였는데, 나는 지금 야스쿠니를 둘러싼 가장 위험한 시나리오가 일본에 등장하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 쇼와 천황의 메모에 관한 보도는 일단 8월 15일 고이즈미 수상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비판하기 위해서 사용되었다. 그러나 단기적으로는 그렇게 사용되었지만, 중기적 혹은 장기적으로는 이 메모는 아래에 소개하는 새로운 움직임과 합류하여 야스쿠니를 둘러싼 가장 위험한 시나리오로 치닫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국영화된 야스쿠니 신사에 수상뿐만 아니라 천황이 참배를 계속한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새로운 일본의 군사행동을 뒷받침하는 장치로 야스쿠니 신사가 기능한다는 시나리오이다. 야스쿠니 신사에 대한 천황 참배의 중요성은 자주 강조되어왔다. 그리고 일본의 이른바 야스쿠니파 사람들이나 우익세력에게 최종 목표는 수상의 참배가 아니라 천황의 참배 실현이라는 것도 지적되고 있다. 옳은 지적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종종 과거로의 회귀 시나리오로 파악되는 데는 이의가 있다. 확실히 그러한 면도 있지만, 나는 오히려 그 이상으로 이것은 21세기의 새로운 일본의 전쟁을 뒷받침하기 위한 움직임이라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p.217, 다카하시 데쓰야, 「천황과 야스쿠니」
그러나 동작동 국립묘지의 평등주의는 매우 제한된 것이며, 목숨의 등가성보다는 엄밀한 위계구조가 관철되고 있으며, 그것은 동작동 국립묘지가 구현하는 현대성이 매우 기형적인 것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사병묘역을 돌아본 사람이라면 국립묘지의 무덤 양식의 특수성을 쉽게 눈치챌 수 있다. 거기엔 봉분이 없고 비석만이 있을 뿐인데, 이 점에서 국립묘지의 무덤 양식은 대단히 획기적인 것이다. 그러나 묘역의 여기저기를 둘러보면 봉분이 있는 무덤들이 있다. 국가원수묘역이나 장군묘역 그리고 애국지사묘역은 봉분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봉분을 없앤 것이 무덤 양식에 대한 새로운 태도의 출현을 표시하는 것이 아니라 묘지의 안장능력을 제고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따라서 봉분을 가진다는 것은 권력과 위신의 표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p.243, 김종엽, 「기념의 정치학」
학병 출신들의 회고록을 비롯한 종래의 논의에서는 조선 청년들이 학병에 지원한 이유를 식민지 당국의 경찰력을 동원한 강요에서 찾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지원을 거부한 학병 해당자가 30%에 이른다는 사실은 학병 모집에 응한 학생들 쪽의 심리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조선인 학병의 출현은 특별지원병제의 공포 이후 가해진 식민지 당국의 압력과 함께 피식민의 경험이라는 좀 더 넓은 맥락 속에서 조선인이 가지고 있었던 욕망을 감안하여 이해하는 편이 바람직하다. 그 욕망이란 무엇보다도 인정(認定)에 대한 욕망을 가리킨다. ---p.262, 황종연, 「조선 청년 엘리트의 황국신민 아이덴티티 수행」
1960년대 남한의 근대국가가 추진한 서울의 강북 도시계획에 밀려 고궁(덕수궁)의 담장도 안으로 밀려들어갔다. 속도와 효율 앞에 전차길 등 많은 옛 생활양식이 사라졌다. ‘중단 없는 건설’을 외친 국가에 의한 서울의 강남과 울산의 공업단지 개발 등은 마치 만주국 수도 신징(新京)을 방불케 하며 밀어붙이듯 이루어졌고, 울산의 경우 관련기관의 이름(울산특별건설국)도 신징의 국도건설국 이름이 그대로 이어졌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으로 길거리에 같은 색깔의 반듯한 양옥이 서고, 전통가옥들은 깡그리 사라졌다. 또한 두 국가는 숱한 반공?멸공대회로 시민들을 동원했다. 속도와 획일성은 양국의 상표였다. 그리고 신체도 두 국가의 관할 안으로 들어왔다. ---p.283, 한석정, 「만주의 기억」
‘요코 이야기 사건’의 경우, 기억의 전쟁은 민족적인 전선을 그으며 시작되었다. ‘일본인의 기억’이 감히 피해자를 참칭한 데 대해 ‘한국인의 기억’이 이를 부정하고 나선 것이다. 한국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어느 기억이 정당한가를 물을 필요는 없다. 그러나 모든 한국인이 항상 피해자였으며 모든 일본인이 줄곧 가해자였던 것인가? 집단적 수준에서 고통스러운 박해와 수난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은 집단적 정체성을 확보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이다. 악한 타자와 선한 ‘우리’가 구획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박해와 수난의 기억은 집단의 안이나 밖을 향한 어떤 정치적 요구를 정당화해왔다. ---p.292~293, 신형기, 「귀환 이야기를 다시 읽다」
이와 같이 생각한다면, 『요코 이야기』가 왜 미국의 주류사회에서 전쟁피해를 그린 책으로 선호되어왔는지, 그 이유의 적어도 일단이 밝혀질 것이다. 이 책에서 조선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 지배라는 역사적 배경이 공백으로 되어 있는 것은, 미국 독자에게 미국의 아시아 지역에서의 역사를 봉쇄하여 이 책을 전쟁피해의 책으로만 읽을 수 있도록 해준다. 이 책에 일본 식민지주의에 대한 자세한 서술이 결여되어 있는 것은 미국에 자국의 식민지 지배의 역사인식이 결여되어 있는 것과 공범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요코 이야기』를 한국계 미국인의 위치에서 비판하는 작업은 전쟁의 피해의 보편적인 참혹함을 호소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텍스트에 식민지주의 비판의 시점을 개입시키는 것을 피할 수 없게 만든다. 그것은 동시에 미국의 식민지 침략과 점령의 역사에 대해 상기시키는 계기로서 이 책을 읽는 것으로 이어질지도 모른다.
---p.341~342, 요네야마 리사,「일본 식민지주의의 역사기억과 아시아계 미국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