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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심의 철학

일심의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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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02년 06월 30일
쪽수, 무게, 크기 416쪽 | 148*210*30mm
ISBN13 9788930620987
ISBN10 8930620981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제1부 일심의 발견
제1장 나는 누구인가? ...17
제2장 일심이란 어떤 마음인가? ...39
제3장 무아와 일심 ...60
제4장 인간 본성의 이해: 공과 불성 ...69
제5장 공성에 입각한 인간 이해: 여성과 남성 ...89

제2부 일심으로 본 철학: 동서 사유의 비교
제6장 철학이란 무엇인가: 절대의 사유 ...113
제7장 한국철학을 생각하며 ...131
제8장 동서철학의 융합 ...155
제9장 언어와 마음 ...181
제10장 물리주의 비판1: 무엇이 존재하는가? ...211
제11장 물리주의 비판2: 감각질을 떠난 세계 인식이 가능한가? ...230

제3부 일심으로 본 세계: 유식철학의 이해
제12장 유식무경 ...257
제13장 유식무경의 철학적 의미 ...266
제14장 자아, 세계 그리고 마음 ...293
제15장 무분별지와 진여 ...321
제16장 유식의 실천수행론 ...349

제4부 일심으로 본 삶: 사랑과 학문
제17장 사랑의 양면성 ...377
제18장 인문학이 가야할 길 ...391

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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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택 및 유의사항?
아공 법공으로 표현 가능한 유식에 근거해 설명한 일심의 철학 내용 평점5점   편집/디자인 평점5점 스타블로거 : 블루스타 벤*****북 | 2015.08.18 | 추천3 | 댓글0 리뷰제목
  일심(一心)의 철학을 할 때 불가피하게 생각하게 되는 문제는 “나는 누구인가?” 하는 자신의 정체성과 관련된 문제이다. 한 시도 쉬지 않고 변하는 세상과 나의 몸, 마음 속에서 나를 여전히 나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나는 항상 동일한 하나의 나라는 자기동일적 의식이 존재하고 유전자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후자의 경우 자기복제된 나, 동일 유전정보에 따라 구성된;
리뷰제목

 

일심(一心)의 철학을 할 때 불가피하게 생각하게 되는 문제는 “나는 누구인가?” 하는 자신의 정체성과 관련된 문제이다. 한 시도 쉬지 않고 변하는 세상과 나의 몸, 마음 속에서 나를 여전히 나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나는 항상 동일한 하나의 나라는 자기동일적 의식이 존재하고 유전자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후자의 경우 자기복제된 나, 동일 유전정보에 따라 구성된 나도 나인가? 라는 물음을 유발한다. 저자는 수행자를 마음에 떠오르는 내용 및 두뇌에 입력된 정보들을 잠재우면서 내용 또는 정보를 담지 않은 마음 자체를 직관하는 사람이라 정의한다.

 

저자는 자아라는 가면에 대해 논한다. 현대철학 특히 계보학은 자아라는 환상이 생기게 된 근원을 추적하려 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끝없는 가면에서 가면의 끝으로 나아가는 것은 일종의 비약이라 말하며 그러나 우리의 의식 속에서도 분명 이런 비약이 일어난다고 덧붙인다. 보통 사물이 주어지면 우리의 구상력은 대상으로부터 주어진 감각내용들을 시간의 흐름 속에서 차례로 종합함으로써 하나의 사물로 포착한다는 것이다.(50 페이지)

그런데 주어진 사물이 너무 클 경우 무한을 파악하는 우리의 이성이 구상력을 뛰어넘어 그것을 무한으로 파악하는데 이 과정에서 처음에 느끼던 불쾌감이 쾌감으로 변한다고 한다. 이것이 숭고(崇高)의 감정이다. 저자는 무한히 큰 것을 바라보며 무한의 이념을 느끼는 숭고의 감정은 바로 인간 정신의 무한성을 말해주는데 불교의 일심 역시 이와 다를 바 없다고 말한다. 저자는 생각된 내용을 보는 것을 그치고<止> 생각하는 나를 붙잡아야<觀> 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무한으로서 자각된 마음은 마음 자체이며 무경계의 마음이고 공(空)이고 일심(一心)이라 말한다.

저자는 그러나 오직 하나이고 전부인 일심은 그 자체만으로 의식되지 않고 유한한 시간의 흐름이 단절되는 한 찰나에만 존재하며 그 자체 시간 안의 존재로서 파악되지 않기에 신은 죽고(니체), 존재 자체는 무와 같으며(헤겔), 태극이 무극이고(주렴계), 공은 공이며(용수), 일심은 본래 무일물(혜능)이라 말한다. 덧붙이자면 일심은 자신에 의해서도, 남에 의해서도 대상화하지 않는 마음이다. 일심은 본래 하나이고 영원히 하나이다.(59 페이지)

저자는 아(我)가 있다는 생각 즉 상견(常見)을 일상적 태도(무아관을 시도하지 않는 것), 형이상학적 태도(신에의 귀의)로 정의하고 아(我)는 없다는 생각을 탈현대적 태도라 정의한다. 무아(無我)와 공(空)의 직관은 수행의 길이다. 저자는 가면이 끝없이 계속된다고 생각하는 것과 가면 너머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직관하는 것은 분명 서로 다른 이야기라는 말로 수행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전한다. 저자는 무한과 절대가 마음에서 느껴지지만 마음 자신의 것으로서 자각되지 않기에 그것을 마음 밖의 타자로서 객관화 한다고 말한다.

저자에 의하면 형이상학적으로 실체화된 절대, 신이나 존재 자체, 태극이나 천리 등은 모두 객관화되고 원리화된 마음이지 그 이외의 것이 아니다.(67 페이지) 저자는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있다는 여래장 사상이나 화엄사상의 핵심은 대승에 이르러 비로소 주장된 것이 아니라 말한다. 초기경전에 나오는 열반적정(涅槃寂靜)의 가르침이 그것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이를 전하며 불교의 무아 사상과 인간 본성 내지 자성(自性) 사상과 모순되는 것이 아닌가? 묻는다.(70 페이지)

저자는 불성(佛性)은 무자성(無自性)과 모순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불성 자체가 무자성 내지 공성에 기반을 둔 것이며 불성론은 공사상의 자연스런 전개라 말한다.(71 페이지) 저자는 아뢰야식은 그 자체로 선이나 악이 아니기 때문에 즉 무기(無記)이기 때문에 선이나 악의 종자를 훈습(薰習: 좋은 향을 배게 하면 그 향기가 풍기게 되는 것처럼 신체와 언어, 마음으로 노력하면 그것이 마음에 잔류하게 됨을 이르는 말)받을 수 있다고 설명한다.

근본 식 자체가 이미 선이라면 악이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며, 이미 악이라면 선이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다. 그렇기에 아뢰야식은 업력과 윤회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해탈의 주체가 된다. 저자는 인간의 공성은 소위 규정된 인간(人)이 아님(弗) 즉 불성(佛性)을 의미한다고 말한다.(83 페이지) 저자는 절대적 가치, 최후의 의미 등이 공의 심연 속으로 사라져 버림으로서의 비(非)가 비(悲) 즉 깨달음의 느낌으로 다가온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부정(否定)을 거친 긍정이 온다.

저자가 말하는 것은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 부정(不淨)의 진실을 깨달은 후 상락아정(常樂我淨)의 긍정으로 돌아오게 된다는 것이다.(불성佛性이 무자성이라는 말은 저자의 논의에서 핵심이다.) 저자는 아공(我空)의 깨달음 뒤에 나를 이루는 여러 요소들, 관계성들을 실체화하는 법집(法執)이 출현한다고 말한다. 관건은 나를 이루는 것들 역시 인연과 관계의 산물 즉 법공(法空)이라는 점이다. 저자는 불교는 일체가 연기(緣起)라는 사실을 밝히는 데 목표를 두는 것이 아니라 그 사실을 깨닫는 해탈을 목표로 한다고 말한다.(103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일심(一心)은 아공과 법공의 깨달음을 통해 경계지어진 부분으로서의 자아나 경계짓는 전체적 관계 그 어느 하나에도 집착함 없이 자유롭게 유동하는 마음이라 말한다. 주목해야 할 것은 초월과 자유의식, 절대와 무한의 감정이다. 저자는 부정 가능성, 거짓 가능성이 배제된 절대를 추구하는 데카르트의 철학과, 부정 가능성, 거짓 가능성을 통해 의미 기준을 확보하는 비트겐슈타인의 상대의 철학을 비교한다. 저자는 불교적 유심(唯心) 사상에서 자아와 세계 역시 절대적 일심의 자기 이원화 결과로 발생한 분별일 뿐이라 말한다.

저자에 의하면 절대를 상대 밖의 독립된 실재가 아니라 상대를 통해 실현되는 것으로서 인식한 사람들이 독일 관념론자들이다.(127 페이지) 데카르트가 구한 절대, 독일 관념론자들이 구한 현상의 근거인 초월적 자아, 일즉일체 일체즉일, 일체유심조를 표방하는 화엄이나 유식의 일심(一心)은 같다. 무대를 비상하는 초월적 자유, 그 무한의 관점에서 일심을 회복하는 초월적 자아의 의미는 독일의 칸트에게서 비로소 자각되고 독일 관념론에서 꽃피웠다.(143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칸트와 독일관념론의 핵심이 형이상학적 자유의 자각, 인간 안에 내재된 보편적 초월적 신성의 자각이라면 자본과 시장경제, 실증과 과학주의, 기술과 환경 파괴 등 서양 근현대를 주도한 정신은 오히려 그와 같은 자유와 초월을 배제한 채 인간을 철저하게 현상적 존재 즉 자연적 진화와 사회적 문화의 산물로 이해된다.(163 페이지) ‘일심의 철학’에서 일심을 논한 본격적인 부분은 전체의 1/4 정도이다. 그 이후는 일심의 의미와 적용에 대한 논의로 채워졌다.

이 부분은 저자 개인의 사상적 기원과 서양 철학과 동양 철학 중심의 논의를 통해 펼쳐진다. 저자는 동양에서나 서양에서나 철학은 언제나 인간의 형이상학적 본질을 사유해왔다고 설명한다.(174 페이지) 그러나 실증과 실용의 기세에 눌려 오늘날 형이상학은 공상과 관념의 유희로 치부되고 있다. 저자에 의하면 불교는 우리의 언어에 상응하는 실재가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하며 따라서 우리의 언어는 그런 실재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는 가명론(假名論)의 입장을 취한다.(189 페이지)

이 입장에 의하면 이름은 실재에 합당하지 않고 실재는 이름에 합당하지 않다. 흥미로운(?) 점은 이름과 실재에 합당한 것이 없기에 일체는 공이고 그런 점에서 사람으로 인한 어떤 미혹함에도 빠지지 말 것을 강조하는 차원에서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는 말(살불살조殺佛殺祖)이 나왔다는 점이다.(192 페이지) 저자는 불교가 가유(假有), 가명(假名)을 주장하는 것은 의식의 차원에서의 언어적 분별을 너머 우리가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접촉한다고 믿는 느낌, 무의식의 차원마저도 이미 그 자체로 우리 자신의 의식의 침전물로 가려져 있는 것임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라고 말한다.(192 페이지)

불교는 의식활동으로부터 무의식에 침전되는 것을 종자(種子)라 하고 그런 종자가 침전되는 방식을 훈습(薰習)이라 한다. 우리의 의식적 또는 의지적 분별 작용은 우리의 무의식적 마음 안에 종자를 훈습한다. 종자는 일종의 이데아, 관념, 개념, 언어이다. 그래서 종자를 명언(名言) 종자라 한다.(193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우리는 득의(得意)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또 다른 말의 그물 즉 언전(言筌)에 걸린다.(전筌: 통발 전. 통발: 고기 잡는 그물) 저자는 그물 바깥에 그물로 잡을 것이 따로 있지 않다면(언어에 상응하는 실재가 존재한다는 생각을 인정하기 않기에...) 우리는 무엇을 위하여 그물을 펼치는가? 묻는다.

그물을 가지고 잡을 고기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그물을 가지고 고기를 만드는 것이다. 말 너머에 실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말로써 실재를 시설(施設)하는 것이다.(시설: 도구, 기계, 장치 따위를 베풀어 설비함. 193, 194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언어적 가유 너머의 실유(實有)를 인정하지 않는 불교의 논리는 곧잘 언어에 상응하는 지시체의 존재를 부정하는 현대적 논리와 같은 것으로 간주된다. 물론 불교가 언어 밖의 실재로서 부정하는 것은 각자의 마음 밖의 실재이다.

저자는 가(假)의 번뇌 세계, 그리고 그런 가의 세계를 형성하는 내적 마음이 부정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는 번뇌와 고통의 삶이 있는 바로 그 마음 안에서만 다시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 구원의 길이 찾아질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204 페이지) 저자는 말한다. 일심을 전제하지 않고서 유아론(唯我論) 내지 상대주의를 벗어날 길은 없다고.(206 페이지)

저자는 우리의 무의식 깊이까지 스며들어 있는 훈습된 종자의 힘을 말살시키고 나서나 얻을 수 있을 절대적 무분별지를 통해 해탈에 이르기를 꿈꾸는 것의 지극한 어려움을 이야기하며 오히려 분별을 분별로써 우리 마음의 불안을 불안으로서 자각하는 바로 그 마음 자치를 무분별자로, 평안한 마음으로 자각하는 것이 진정한 해탈의 길일지도 모른다고 말한다.(209 페이지) 번뇌를 끊지 않고 열반을 얻는 것에 대한 긍정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는 대목이다.

3부 ‘일심으로 본 세계: 유식 철학의 이해’에서 저자는 유식무경의 식은 주객대립 속의 경험적 의식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물리적 심리적 현상세계로 환원되거나 규정될 수 없는 현상 초월적 의식, 무한과 절대의 일심이라고 설명한다.(255 페이지) 유식무경을 설명하기 위해 제시되는 논리가 일수사견(一水四見)이다. 인간, 물고기, 아귀, 천인 등은 같은 물을 네 가지 서로 다른 모습으로 본다는 의미이다.

사람은 물을 깨끗한 마실 것 또는 파도로 보지만 물고기는 그들이 살아가는 장소나 길로 여기고 아귀는 피와 고름이 가득한 강으로 보고 천인은 보석으로 장식된 땅으로 여긴다는 의미이다. 저자는 두뇌로부터 식을 설명하는 것(식을 두뇌의 산물로 보는 것)은 인식결과(경境)를 인식 근거(근根)로 뒤바꾸는 전도된 시도라고 말한다.(261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신경학자가 (뇌파 측정을 통해) 본 것은 그 자신의 두뇌도 아닐 뿐더러 다른 사람의 것도 경으로서의 물질이지 인식기관으로서의 물질이 아니다.

저자는 사람들이 유식에 거부감을 보이는 것은 관념론을 공상의 체계로 생각하기 때문이라 말한다. 저자는 분석철학자 힐러리 퍼트남의 ‘통 속의 두뇌’의 비유를 예시한다. “어떤 사람이 사악한 과학자에 의해 수술을 받아 그의 두뇌만이 육체에서 분리되어 계속 살아 움직일 수 있게끔 영양이 담긴 통 속에 옮겨졌다고 하자. 그의 신경조직은 초과학적 컴퓨터에 연결되어 이 컴퓨터가 그 사람으로 하여금 모든 것이 정상이라는 환각을 일으킨다고 하자. 더 나아가 모든 인간이 실제로 그런 통 속의 두뇌일 뿐이고 우주는 그런 두뇌신경조직이 담긴 통을 산출하는 자동기계일 뿐이며 그 자동기계가 통 속 두뇌들로 하여금 집단적 환각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상상해 보자. 과연 그것이 가능하겠는가?”

 

퍼트남은 그럴 수 없다고 말한다. 통 속 두뇌의 가정은 스스로를 논파(論破: 깨트림)하는 가정이기 때문이다. 즉 그 가정에서라면 모든 경험 내용이 머릿속 표상일 뿐이라면 그 머리를 담고 있을 통이라는 것도 성립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의미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통 속 두뇌의 통이란 단지 우리 자신의 두뇌가 그린 통 즉 표상된 통일 뿐이다. 그런데 그 가정은 그런 두뇌를 담고 있는 ‘실재하는 통을 가정하기에(통은 실재한다고 가정하기에)’ 그 가정은 자기논파적 가정이다.(262, 263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유식은 심(心)과 심소(心所: 마음에 부수하는 것들) 이외에 실유한다는 망집(妄執)을 제거하기 위해 유식(오직 식)일 뿐이라고 주장한다고 말한다.(마음에 부수副隨하는 것들이란 마음과 함께 일어나고 함께 멸하며 동일한 대상을 가지는 것들로 감각, 느낌, 인식, 의도, 집중,,, 등으로 이루어진다: ‘아비담마 길라잡이’ 참고) 저자는 소승의 아공법유를 이야기한다. 나는 공하지만 나를 이루는 법(대상, 요소)들은 실재한다는 의미이다.

앞에서 말한 아공(我空)의 깨달음 뒤에 나를 이루는 여러 요소들, 관계성들을 실체화하는 법집(法執)이 출현한다고 말한 것을 기억하자. 물론 법은 실재하지 않는다. 법집은 잘못이다. 유식은 법공(法空)이라는 유심론을 펼친다. 유식무경이란 경(境) 자체의 부정이 아니라 식 너머의 식 독립적 실재로 상정되는 경의 부정을 의미한다.(276 페이지) 저자는 작곡가나 과학자 뿐 아니라 우리 일반인들도 동시에 현상을 이루는 물질적 기본요소도 듣고 본다고 말한다.(어설플망정)

저자에 의하면 내가 듣고 보는 현상세계는 바로 나 스스로 창출한 세계이다. 맥락이 얼마나 겹치는지 모르지만 이는 물리학자 에른스트 페터 피셔가 말한 우리의 계산에 따라 존재하는 달 이야기를 연상하게 한다. 피셔는 ”하늘에 걸려 있는 달은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내 우리만이 이해하는 매개변수들을 통해서 기술된다. 특정한 날 특정한 시간에 정확히 파악된 위치에서 떠오르는 달, 이 달은 오직 우리가 만든 매개 변수들과 우리가 선택한 시각을 통해서 기술되기 때문에 존재“한다는 말을 했다.

저자는 단일한 근원존재가 왜 둘로 분화하는가? 묻는다. 신이 신 이외의 세계를 창조한 것은 그 한 예이다. 답은 이렇다. 유일자만이 존재할 경우 그 존재는 모든 곳에 편재(遍在: 두루 퍼져있음. 편재偏在: 치우쳐 있음)하는 무한자이기 때문에 즉 그것을 그것 아닌 것과 구분지을 수 있는 자기 제한선이 없기 때문에 그 존재는 비존재와 구분되지 않게 된다. 즉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는 공(空)인 것이다. 아뢰야식의 현상구성 역시 이런 자기이원화에 해당한다.

저자는 무명에 가려 유식의 도리를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마음 밖에서 우주의 진리를 찾으려 하고 우리 인생의 의미를 찾으려고 한다고 말한다.(291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불교가 이상으로 삼는 인간은 그 마음의 번뇌적 장애와 무지의 장애를 극복한 무애(無碍)의 인간이며 이는 윤리적 인간이기보다 오히려 자유자재한 인간, 해탈한 인간이다.(350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아견(我見), 번뇌, 욕망, 사욕 등은 모두 다 정도를 벗어나게 하여 생을 고통스럽게 하는 원인들이다.(373 페이지) 수행이 필요한 이유이다.

앞에서 번뇌와 고통의 삶이 있는 바로 그 마음 안에서만 다시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 구원의 길이 찾아질 수 있다는 말을 했는데 저자는 같은 차원에서 욕망과 번뇌를 억압할 것이 아니라 번뇌의 근거를 통찰함으로써 집착된 아(我)가 비실재라는 것, 아공(我空)을 앎으로써 아집(我執)으로부터 벗어나고, 집착된 법이 비실재라는 것, 즉 법공(法空)을 앎으로써 그 법집(法執)을 벗어나는 수행의 의미를 제시한다.(373 페이지)

후기에서 저자는 ”시인(윤동주 시인)의 언어는 살아서 가슴을 울리는데 내가 뱉어내는 철학의 언어는 꺾여 내던져진 메마른 풀잎처럼 저 밖에 뒹굴 뿐“이라 말한다. 저자는 ”비상(飛上)하여 높이 오르면 오를수록 더 깊은 심연이 발 밑에 전개되는데 그 비상과 추락의 폭, 해탈과 욕망 사이를 눈물이 아닌 웃음으로, 비틀거림이 아닌 춤으로 살아가고 싶다.“고 말한다.‘화두’와 같은 해에 출간된 ‘대승기신론 강해’(2013년 가을 출간)에서 저자는 자신이 달은 보지 못하고 여전히 손가락만 시시비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두려운 마음이 든다는 말을 했다.

‘일심의 철학’과 시간적으로 11년의 차이가 나지만 그 두려움을 나는 끊임없는 모색과, 더 깊은 성숙으로 가는 길에 만나는 풍경이라 생각한다. 이제 지난 2015년 8월 13일 ‘불교철학과 현대윤리의 만남’ 리뷰에서 ”이제 다음 책은 한자경 교수의 ‘일심의 철학’이 될 것“이란 말을 했는데 약속대로 읽은 ‘일심의 철학’ 리뷰 말미인 이 자리를 빌어 ”이제 다음 책은 한자경 교수의 ‘대승기신론 강해’가 될 것“이라는 말을 하게 된다. 힘들지만 재미가 쏠쏠한 이 읽기의 끝은 어디일지? 더 많은 공부가 필요하고 생각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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