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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여행자의 아시아사
지도를 들고 떠나는

시간여행자의 아시아사

지도를 들고 떠나는 시간여행자의 세계사 시리즈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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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6년 06월 10일
쪽수, 무게, 크기 200쪽 | 645g | 210*275*13mm
ISBN13 9791158710279
ISBN10 1158710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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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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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 이민영
서울에서 태어나 홍콩과 스리랑카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대일외국어고등학교와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프랑스어를 공부했다. 현재는 공공기관에서 광고마케팅 관련 일을 하며, 번역 에이전시 엔터스 코리아에서 출판 기획 및 프랑스어 전문 번역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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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서부에서는 기원전 3000년경에 인더스문명이 싹트기 시작해, 약 1000년간 지속됐다. 오늘날에도 인더스문자가 완전히 해독되지 않아 인더스문명에 대해 아려진 바가 거의 없다. 준(準) 유목민족인 아리아족은 이란인과 같은 뿌리를 지녔는데, 기원전 1500년경에 인더스문명의 발상지에 침투해 들어왔다. 이들은 인도 북부에 이미 거주하고 있던 토착민족에게 아리아문자(산스크리트어)와 종교를 전파하며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 종교는 훗날 힌두교로 진화했다.
---「제1부 세계인의 반이 사는 아시아」중에서

아사프 자(니잠 울 물크)는 투르크계 귀족으로서, 1720년대에 무굴제국에서 중책을 맡았다가 데칸의 지배권을 확보했다. 그는 마라타족과 일시적으로 동맹을 맺고, 1724년에 골콘다 지방장관을 제거했다. 그런 다음에 하이데라바드에 자리를 잡고 독립국가의 수장임을 선포했는데, 동시에 명목상으로는 무굴제국의 통치권을 인정했다. 니잠 울 물크가 1748년에 사망하자, 뒤를 이은 니잠은 프랑스와 영국의 권력 게임에 말려들었다. ---「제2부 인도와 주변국」중에서

고작 수천 명에 불과한 영국인이 수천만에 달하는 인도인을 지배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경제적 측면에서 보면, 영국은 일찍이 가장 부유한 지역(벵골, 타밀 등)을 지배함으로써 군대를 운영할 수 있는 재원을 마련했다. 1805년에 영국은 지휘 체계를 갖춘 15만 5,000병력의 군대를 지니고 있었다. 이에 마이소르, 마라타 등 일부 토착 세력도 군대를 강화하기 위해 유럽인(주로 프랑스인) 장교를 기용했다. 그러나 이들은 돈이 목적이어서, 수중에 돈이 들어오면 언제든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정치적 관점에서도 인도인은 여전히 분열 상태였다. 아와드, 라지푸트, 마라타, 하이데라바드, 마이소르 등 수많은 세력은 그때까지 단 한 번도 연합을 유지한 적이 없었다. 게다가 마라타족은 내부적으로도 심하게 분열되어 있었다. 그와 반대로 영국은 통일된 지휘 체계 아래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제2부 인도와 주변국」중에서

결국 이슬람교도가 많은 지역에서 파키스탄이 건립됐다. 간디의 표현을 빌리자면 인도는 ‘생체절단’을 당했다. 국토가 분할되자 각지에서 대규모 집단 이주가 일어났는데, 특히 펀자브에서 심했다. 1947년 8월부터 서부 펀자브에서는 힌두교도와 시크교도가, 동부 펀자브에서는 이슬람교가 대거 탈출했다. 양측에서 무장한 도당이 서로 공격했는데, 치안당국이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당시 사망자는 20만여 명에 이르렀다. 1947~1948년에 걸쳐 펀자브를 떠난 이는 약 800만 명에 달했다. 한편, 힌두교도 약 100만 명이 신드에서 타지방으로 이주했다. 반대로 이슬람교도 150여 명이 갠지스 강 유역을 떠나 서쪽의 파키스탄으로 이주했다. ---「제2부 인도와 주변국」중에서

1971년 3월에 파키스탄에서 방글라데시 독립전쟁이 발발했다. 인도는 피난민 수백만 명이 인도로 몰려들자 유엔에 지원을 요청하고, 방글라데시의 봉기 세력에 무기를 공급했다. 그러나 미국이 파키스탄을 지원하자(당시 미국 대통령은 리처드 닉슨이었다), 인디라는 8월에 소비에트연방과 상호지원 조약을 체결했다. 인도에서 훈련받은 방글라데시 군대가 10월에 방글라데시로 진입하고, 인도 군대가 뒤따라 들어갔다. 그리고 12월 15일에 파키스탄 군대가 패배했다. 방글라데시 피난민은 1972년 초에 본국으로 송환됐다. ---「제2부 인도와 주변국」중에서

인도는 잠무 카슈미르가 공국 병합 절차에 따라 1947년에 인도 연방에 귀속됐으니, 잠무 카슈미르에서 파키스탄 병력이 완전히 철수한 뒤에야 국민투표를 실시할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한편, 파키스탄은 잠무 카슈미르의 대다수가 이슬람교도이므로, 하리 싱의 독단적 인도 귀속 결정을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이와 같은 인도와 파키스탄의 입장 차이 때문에 잠무 카슈미르는 국민투표가 실시되지 않는 어정쩡한 상태로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 토착민은 3가지 상태로 나뉘었다. 먼저 파키스탄령에 거주하는 사람은 파키스탄 체제에 이미 익숙해져버렸다. 잠무의 힌두교와 시크교 신자, 라다크의 불교 신자는 친인도 성향이 강했다. 카슈미르 계곡에 거주하는 대다수 수니파 이슬람교도는 계속되는 테러와 진압에 지쳐 의사 표명에 소극적이었다. ---「제2부 인도와 주변국」중에서

19세기 후반에 타이(시암)를 둘러싼 국제 정세가 크게 바뀌었다. 영국은 1885년에 버마를 정복하고 말레이반도의 여러 나라에도 지배력을 발휘했다. 하지만 타이 입장에서는 영국보다 프랑스가 더 위협적이었다. 프랑스는 1860년대 들어 코친차이나를 정복하고 캄보디아를 보호령으로 두었다. 나아가 1884~1885년에 안남을, 1893년에 메콩강 좌안을 정복했다. 이에 영국은 1896년에 프랑스와 협약을 체결하여 메남강 유역을 중립지대로 남겨놓되, 시암왕국의 동쪽은 프랑스의 영향력 아래 두기로 합의했다. 또한, 프랑스는 1902~1904년에 메콩강 우안 영토를 라오스에 넘겨줬고, 1907년에 바탐방과 시엠레아프를 캄보디아에 반환했다. 영국은 1909년에 시암으로부터 말레이반도 4개 주(퍼를리스·끄다·클란탄·트렝가누)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했다. 시암은 비록 영토 일부를 잃었지만, 동남아시아에 유일하게 독립국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제3부 인도차이나반도」중에서

북베트남은 호찌민 루트를 통해 베트남인민해방전선에 군수물자를 대주었다. 이에 미국은 1964년에 호찌민 루트를, 1965년에 북베트남 전역과 라오스 동부를 폭격하고 자국 병력을 투입했다. 베트남인민해방전선은 1968년 1~2월에 구정 공세를 감행했다. 구정 공세는 전술적으로 실패했으나, 미국이 베트남전쟁에서 발을 빼는 계기가 됐다. 미국은 이 전쟁을 베트남 내부 문제로 돌리고자 하면서 동시에 북베트남과 협상했다. 그리고 닉슨 대통령이 베이징을 방문하는 등 중국과의 관계 개선에도 힘썼다. 그리하여 미국은 1973년 1월에 파리 조약을 체결하고, 3월에 베트남에서 미군을 철수시켰다. 베트남전쟁으로 총 200~300만 명이 사망했고, 부상자 수도 그와 비슷했다. 미군 전사자도 5만 5,000명 정도였다. ---「제3부 인도차이나반도」중에서

이슬람교는 믈라카를 기점으로 말레이반도와 수마트라 동부 해안에 전파됐다. 믈라카에는 자와인 다수가 거주했는데, 이들이 자와 항구 지역에 이슬람교를 전파했다. 15세기 말에는 이슬람교가 자와에서 보르네오 남부와 말루쿠제도까지 전해졌다. 이렇게 해서 이슬람교는 고유의 특성을 간직한 채 해상으로 인도네시아군도 각지에 전파됐다. 믈라카 주변 상인을 이슬람교를 통해 일종의 연대의식을 다졌고, 무역을 통해 많은 부를 쌓은 지역의 지배층도 이슬람교를 자발적으로 받아들였다. 그에 따라 백성도 자연스럽게 이슬람교를 믿었다. 이슬람교는 인도에서 상인을 통해 전해졌으나 현지 상인 및 전통과 융화됐다. 16세기에 인도네시아인은 이슬람교를 중심으로 뭉쳐 포르투갈에 대항했다.
---「제4부 인도네시아와 주변국」중에서

18세기에는 자와에서 나는 향신료보다 커피, 설탕, 인디고 등의 인기가 더욱 많았고, 영국이 네덜란드를 제치고 세계 최고 해상 강국이 됐다. 그 결과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매출은 감소했고, 반대로 군비와 행정 비용은 증가했다. 특히 자와에서 동인도회사 비용이 크게 늘면서, 18세기 말에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파산 직전에 이르렀다. 비록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를 지배하긴 했지만, 토착민의 생활까지 변화시키지는 못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쇠퇴했어도 현지에서 완전히 철수하지 않고 지배층과 교역을 지속했다. ---「제4부 인도네시아와 주변국」중에서

영국의 직할식민지인 싱가포르에서는 1958년에 헌법이 개정됐다. 리콴유가 총재로 있던 인민행동당은 1959년 총선에서 승리한 후,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의 병합을 제안했다. 영국은 여기에 보르네오도 포함할 것을 제안했다. 보르네오의 말레이계 인구가 가세하면 싱가포르의 중국계 인구를 견제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기 때문이다. 말레이시아연방의 압둘 라만 총리도 이 제안에 동의했다. 그리하여 탄생할 나라는 ‘말레이시아’로 부르기로 했다. 하지만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총리는 여기에 반대했다. 그는 1965년에 “말레이시아를 쳐부수라”는 슬로건으로 내걸고 대결 정책을 도입했다. 인도네시아인은 사라왁에서 게릴라전을 펼쳤고, 브루나이인민당을 사주하여 말레이시아 병합을 반대하는 반란을 일으켰다. 대결 정책은 실패로 끝났고, 인도네시아의 말레이계와 중국계는 분열됐다. 영국이 개입하여 반란을 막았기 때문이다. 결국 말레이시아연방은 1963년에 설립됐다. 여기에는 싱가포르·사라왁·사바가 포함됐으나, 브루나이는 술탄의 반대로 제외됐다. 이때부터 말레이시아는 압둘 라만을 중심으로 말레이계의 정치적 우위를 주장하는 측과, 리콴유가 이끄는 비(非) 말레이계 측으로 나뉘었다. 1965년에 압둘 라만은 리콴유에게 싱가포르의 말레이시아연방 탈퇴를 촉구됐다. 이로써 싱가포르는 독립공화국으로 재탄생했다. ---「제4부 인도네시아와 주변국」중에서

중국 문명은 기원전 2000년경에 황허강 하류 유역에서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오늘날 중국어의 모태가 이 무렵에 생겨났다. 기원전 1000년경까지 중국의 지리적 경계가 모호했다. 그 무렵부터 중국인은 주변 민족을 모두 오랑캐로 간주했다. 중국 민족과 무관한 북쪽과 서쪽의 초원지대 민족이든, 그들과 유사한 혈통을 지닌 남쪽 민족이든 가리지 않고 모두 오랑캐로 본 것이다. ---「제5부 중국과 북아시아」중에서」중에서

송나라 시대에 중국은 눈부신 경제성장을 일궜는데, 특히 다양한 분야에서 기술 발전이 두드러졌다. 구체적으로 제철과 조선 분야가 한층 도약했고, 총포용 화약이 사용되면서 무기제조술이 발달했다. 또한 제지술과 인쇄술도 발전했다. 상업도 발달했는데, 국내뿐 아니라 남쪽에서는 해상을 통한 국제 무역도 크게 늘었다. 지폐 사용도 일반화됐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발달한 나라는 단연 중국이었다. ---「제5부 중국과 북아시아」중에서

1839년에 청나라 황실은 임칙서를 흠차대신으로 임명하여 광저우에 파견했다. 임칙서가 아편 상자를 불태우자, 영국은 해안 곳곳에 해상공격을 가하고 상하이를 점령했다. 이렇게 시작된 아편전쟁은 결국 1842년에 난징 조약이 체결되면서 종결됐다. 중국은 공행 제도를 폐지하고 5개 항구(광저우·샤먼·푸저우·닝보·상하이)에서 대외 통상을 허용하되, 관세는 5%로 제한하라는 영국의 요구를 수용했다. 외국 상인은 5개 항구에 거주하게 됐고, 치외법권이 적용되어 중국이 아닌 자국 영사의 재판권 관할로 들어갔다. 나아가 중국은 홍콩을 영국에 완전히 할양하게 됐다.
---「제5부 중국과 북아시아」중에서

장제스는 일본과 휴전협정을 체결하는 한편, 공산당과 계속 대결했다. 1934년에는 공산당을 장시성에서 쫓아냈다. 중국 국민은 공산당과 국민당이 연대하여 일본에 맞서기를 희망했기 때문에 양측이 편을 갈라 대립하는 것을 비난했다. 한편 1935년에 소비에트연방은 일본을 비롯한 세계 각지에서 나치즘과 같은 극우 세력이 성장하는 것을 우려했다. 이에 코민테른은 인민전선과 연합전선의 구성을 크게 장려했다. 5월에 일본은 중국의 비무장지대를 점령하고, 베이징에 친일정부가 들어서도록 조장한 후, 네이멍구 동부로 진출했다. 이후 11월에 베이징과 톈진 근방에 일본군을 주둔시켰다. 장제스와 마오쩌둥은 손을 잡지 않았지만, 1936년 봄에 코민테른의 지시를 받은 저우언라이는 마지못해 상하이에 있는 국민당과 협상을 시도했다. 협상은 좀처럼 진전이 없었는데, 그때 시안 사변이 터졌다. 당시 장제스는 시안에 머무르며 중국공산당과의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고, 공산당은 옌안에 밀려나 있었다. 12월 12일에 장쉐량은 군대를 이끌어 장제스를 체포했다. 그리고 내전 종식과 연대를 통한 항일운동을 요구했다. 저우언라이가 중재한 가운데 공산당과 국민당은 협약을 체결했다. 이로 인해 1937년 4월에 제2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졌고, 내전이 중단됐으며, 1941년까지 평화가 지속됐다. 당시 중국공산당 군인은 국군이었지만, 자율권은 그대로 갖고 있었다. ---「제5부 중국과 북아시아」중에서

타이완은 1683년에 청나라에 정복되어 1885년에 하나의 성(省)이 됐다. 당시 타이완 인구는 300만 명에 불과했으며, 대부분 푸젠성 출신이었다. (…)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중국을 물리친 후 1895년에 타이완을 병합했다. 일본 입장에서는 타이완이 최초의 식민지여서, 경제 발전의 모델로 삼고자 했다. 그 일환으로 농지개혁을 시행하고, 농민지주 계급을 발달시켰다. 교육 제도도 도입했으나, 타이완 사람은 고등교육을 받지 못하게 하여 지식인층 양성을 피했다. 또한 철도를 놓고 공장을 세웠다. 그 결과, 타이완 사람은 삶의 질과 역량이 중국 대륙보다 월등해졌다. 그러나 외국 세력에 극한 지배를 당하는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제5부 중국과 북아시아」중에서

1920년에 몽골의 젊은 혁명가 담틴 수흐바토르와 허를러깅 처이발상은 이르쿠츠크에서 러시아 볼셰비키 세력과 협업했다. 이 무렵에 만주에 와 있던 일본 세력은 범몽골 국가를 설립하려 했고, 이를 위해 운게른슈테른베르크가 이끄는 러시아반혁명 군대를 끌어들였다. 운게른슈테른베르크는 1921년 초에 우르가에서 공포정치를 행하다가 몽골족에게 추방당했다. 같은 해 7월에 수흐바토르와 처이발상은 러시아 적군의 도움을 받아 우르가에 임시혁명정부를 설립했다. 국가원수는 복드 칸이었으나, 실제로는 명목상 권력만 가지고 있었다. 수흐바토르는 1923년에, 복드 칸은 1924년에 사망했다. ---「제5부 중국과 북아시아」중에서

망명 중인 한국인은 항일 세력을 조직했고, 1919년 3월에는 33명의 지식인이 [독립선언문]에 성명하면서 일본에 저항했다. 한편, 베르사유 평화회담은 민족자결주의를 원칙으로 진행됐는데, 이는 앞서 1918년에 토마스 윌슨 미국 대통령이 주창한 것이었다. 서울에서 열린 항일 시위에는 수십만 인파가 참여했다. 일본은 독립운동의 규모에 놀라 무자비한 유혈 진압에 나섰다. 이 일로 6,000여 명이 사망하고, 3만 5,000명이 체포됐다. 1919년 4월에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에서는 민족주의자가 모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제6부 한국과 일본」중에서

1951년 6월에 소비에트연방이 협상을 제의했다. 7월에 개신된 협상은 끊임없는 마찰 가운데 진행됐고, 10월부터는 판문점에서 계속됐으나 포로 문제 등 여러 난관에 봉착했다. 1953년 7월 27일에 마침내 휴전 협정이 체결됐다. 이로써 남한과 북한 사이에 폭 4km의 비무장지대가 설치됐다. (…) 1980년에 김대중이 다시 체포되자 광주에서 저항운동이 발발했다. 그러자 정부는 군대를 동원하여 시위대를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그 과정에서 200명이 사망한 것으로 공식 발표됐으나, 실제로는 희생자가 그보다 10배가량 많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새로 취임한 전두환 대통령은 1980년에 헌법을 개정하여 독재정권을 꾸렸다(제5공화국). ---「제6부 한국과 일본」중에서

도쿠가와 가문은 1600~1868년에 일본 열도를 지배했다. 도쿠가와 가문을 세운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1542년에 나고야 근방 성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1560년에 노부나가와 동맹을 결성한 이에야스는 주변을 정복하며 세력을 키워갔다. 노부나가가 사망한 후에는 히데요시와 대립하다가 1585년에 그의 수하에 들어갔다. 1590년에 히데요시는 이에야스에게 소유지를 모두 포기하는 조건으로 간토의 광대한 영토를 사하겠다고 제의했다. 이에야스는 이 제의를 받아들였고, 그 결과 세력을 한층 키울 수 있었다. 그는 에도(도쿄의 옛 지명)에 정착하여 거대한 성채를 지었다. 1598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그 권좌를 두고 분쟁이 일어났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1600년에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하며 권력을 장악했다. ---「제6부 한국과 일본」중에서

일본의 개혁정책은 금융, 세제, 군사 등 모든 분야에서 빠르게 실시됐다. 특히 군사 부분에서는 1873년에 징병제가 도입됐다. 철도가 부설됐고, 언론사가 생겼다. 일본은 많은 외국인에게 기술을 전수받거나 도쿄대학교에서 가르치도록 했다. 또한 외국에서 사절단을 파견하여 선진 문물을 배우기 시작했다. 잘 훈련되고 규율 잡힌 인력이 풍부해지면서 산업이 크게 발전할 수 있었지만, 외국 기술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했다. 초창기에는 재정적으로 어려웠지만, 국가와 민간이 협력하여 자금을 충당했다. 그 결과, 오늘날 일본 경제를 지배하는 자이바츠(재벌)가 탄생했다. ---「제6부 한국과 일본」중에서

1945년 2월에 얄타회담에서 소비에트연방은 독일이 패하고 2~3개월 후 일본에 대항하여 참전하기로 결의했다. 이듬해 7월 26일에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포츠담 선언을 발표했다. 이는 영국과 중국이 동의하고 소비에트연방도 암묵적으로 승인한 사항으로, 일본에 무조건 항복을 권고하되 응하지 않을 시 즉각적으로 대규모 공격을 감행할 것임을 경고하는 내용이었다. 일본은 항복하기를 거부했고, 미국은 원자폭탄을 투하하기로 결정했다. (…) 1945년 7월에 발표된 포츠담 선언에 따라, 일본 영토는 1868년 당시를 기준으로 확정됐다. 타이완과 만주는 중국에, 사할린 남부는 소비에트연방에 반환됐으며, 한국의 독립이 결정됐다.
---「제6부 한국과 일본」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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