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3월 초의 날씨는 겨울의 잔바람이 아직 남아 있어 다소 쌀쌀했지만 무겁던 겨울 옷을 벗고 다니기엔 충분했다. 게다가 오늘은 기다리고 기다리던 토요일이라 기분이 한껏 들뜬 나머지 이 정도의 가벼운 추위쯤은 아무렇지 않은 날이었다. 게다가 오늘은 1교시만 수업을 하고 2교시부터 4교시까지는 학급 회의와 부 활동을 하는 날이다. 그러한 이유에 더욱더 다른 토요일에 비해 가슴이 두근거렸다. 평온함을 자랑하는 파란 하늘과 하양 솜털구름이 두리둥실 떠다니는 것을 가만히 응시하던 소율의 입가엔 어느새 달콤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공기가 달고 맛있었다. 상큼하고 아삭한 초록색의 사과를 한 입 가득 베어 물면 시큼하지만 달콤한 향이 풍기는 과육처럼 상큼한 날이었다. 더불어 19살 소녀의 가슴도 한껏 부풀었다.
“아, 자꾸 콩콩 뛰어. 여기가…….”
소율은 작고 고운 손을 가슴에 살포시 포개며 눈을 감았다. 오늘은 이상하리만치 흥분된다. 꼭 무슨 일이 생길 것만 같다. 오늘 아침에 신문을 보면서 운세풀이를 하던 오빠의 말 때문일지는 몰라도 금방이라도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았다. 딱히 무엇이라 설명은 할 수 없으나 반소율의 인생에, 운명에 아주 중요한 사건이 생길 것만 같은 엉뚱한 상상? 설레어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참 이상하지? 후~, 왜 이렇게 초조할까?”
묘한 예감이 19살 소녀의 가슴을 흔들어대서 주체할 수 없게만 한다. 갈비뼈 안에 있는 덩어리가 불규칙하게 움직여 이상한 기대를 하게 만들어댔다. 뭐랄까, 정말 멋진 남자에게 고백을 받을 것만 같은…… 꿈에서나 나올 법한 얘기지만 소율은 엉뚱한 상상을 하며 피식 웃었다. 생각만 해도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옆에서 툴툴대는 밀리 때문에 눈살을 찌푸려야 했다.
“원예반이 뭐 이러냐? 영화감상반도 있고 볼링반도 있었는데, 누구 때문에 이게 무슨 고생이람…….”
꽃삽을 든 손에 흙을 잔뜩 묻힌 밀리는 툴툴거리는 자신 따윈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작게 콧노래만 부르며 화단에 박힌 돌멩이를 골라내는 린지를 흘겨보았다.
“어이, 지린지 양 찔리는 거 뭐 없어?”
밀리의 날이 선 목소리에도 꿈쩍하지 않던 린지가 주머니에서 초콜릿을 꺼내 투덜이 밀리에게 쥐어주며 말문을 열었다.
“너도 원예부 좋다고 했잖아, 찬성할 땐 언제고……. 화단 정리를 잘 해야 꽃씨를 심지. 이제 그만 툴툴거리고 빨리 앉아. 마저 해야지.”
“이게 어딜 봐서 화단 정리야? 대청소지!”
밀리는 한 시간을 넘게 쭈그리고 있던 다리가 저려오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씩씩거렸다. 목장갑을 꼈다곤 하지만 이미 손톱에 흙먼지들이 잔뜩 끼어 있어 불쾌하고 찝찝했다. 원예부라고 해서 꽃꽂이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이런 노가다를 하게 될 줄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 우아하게 티타임을 즐기는 동화 속의 공주님을 상상했었다. 그런데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바닥에 쭈그려 앉아 있으려니 좀이 쑤셔 미칠 것 같았다. 그리고 정말 우울하다.
“어쩔 수 없잖아. 겨우내 버려진 곳인데, 당연하지.”
우울하다며 입술을 뒤집어 까고 투덜거리는 밀리에 비해 린지는 기분이 좋아 보인다. 무엇이 좋아 저렇게 입꼬리를 자연스럽게 올리는 건지.
“야, 지린지! 그렇게 좋게만 생각할 수 있는 건 너뿐이라고!”
“밀리, 너무 그러지 마. 린지라고 이렇게 될 줄 알았겠니?”
잠자코 지켜보고 있던 소율이 언성을 높이기 시작한 밀리와 린지를 가로막고 섰다.
“소율아, 소율아. 네 문제가 뭔지 알아? 너무 좋게만 보려고 한다는 거야. 잘못된 건 똑바로 말해야 알지.”
“하지만 지금에 와서 이렇게 불평만 늘어놓아도 변하는 건 없어. 그러니까 맡은 일을 열심히 할 수밖에 없잖아.”
밀리의 투정에 짜증이 난 소율은 린지를 대신해 입을 열었다. 어차피 합의에 따른 결과가 아니던가.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인 세 사람은 항상 이렇게 합의점을 찾아 행동에 옮기는 걸 좋아했다. 그중 하나가 바로 특별활동이다. 삼총사는 언제나 함께해야 한다는 순진무구한 마음으로 1학년 때는 밀리의 뜻에 따라 사진반에 들어 카메라만 들고 다녔었고, 2학년 때는 소율의 바람대로 요리반에 들어 이제는 웬만한 음식은 모두 만들어 주말엔 소풍을 갈 수 있었다. 사진반에서 배운 기술을 이용해 실수했던 장면이나 즐거웠던 장면 하나하나를 사진으로 찍어 기록하고 남겨둘 수 있었던 건 세 사람이 항상 함께였기 때문이라 여겼다. 그래서 세 사람은 무슨 일이 있어도 떨어져서는 안 된다며 새끼손가락까지 걸었건만, 린지의 황당한 선택으로 밀리는 엉덩이에 땀띠가 날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활동적이지만 청소 따윈 적성에 안 맞는다는 밀리에게 있어 화단 청소는 고역일 게 분명했다. 사실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지만 소율도 나름대로 품었던 상상과는 거리가 멀어 입이 썼다. 예쁜 꽃과 방금 구운 쿠키를 먹으며 꽃꽂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이건 콩밭 매는 아낙네가 되었으니 스타일도 구길뿐더러 벌써 입고 있는 블라우스의 소맷단은 엉망으로 더러워져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남자라곤 눈을 씻고 봐도 없잖아.”
그렇다. 남자 밝힘증 오밀리의 눈을 즐겁게 해줄 남자가 없었다. 그러니 입이 자동적으로 나올 수밖에. 수중 에어로빅부에 들어가자고 박박 우기던 밀리의 표정이 떠올라 소율은 소리를 죽여 웃었다. 역시나 못 말리는 괴짜다. 커서 뭐가 되려고 남자만 밝히는지 모르겠다고 면박을 주어도 그녀는 남자타령을 해댔다. 몇몇 애들은 그런 그녀를 날라리라고 하기도 하고 엉덩이가 가벼운 계집애라고도 하는데 맞는 말 같기도 하다. 저렇게 난리법석을 떠는데 그 누가 그런 소문을 피해갈 수 있을까.
한숨을 푹 쉬는 밀리를 흘겨보며 소율과 린지가 서로 눈을 마주쳤다.
‘그럼 그렇지.’
‘남자가 없으니 그렇겠지.’
소율은 고개를 저으며 말도 없이 쓰레기를 줍기 시작한 린지를 따랐다.
“어디 가?”
밀리는 팔짱을 낀 채 소율과 린지에게 물었다.
“체육관도 청소하랬으니까.”
인상을 찌푸린 채 묻는 밀리에게 린지도 같은 표정을 짓고 대꾸했다. 슬슬 짜증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모양이다. 저러다 한 번 터지면 엄청난 해일이 되곤 하는데.
“체육관? 그런 건 후배들 시켜. 노땅인 우리가 해야…… 하겠다! 거긴 수영부 있지?”
만사 귀찮아 죽겠다며 손을 흔들던 밀리의 눈에 한 줄기 섬광이 비치며 생기가 가득해졌다.
“수영부?”
그리고 되물었다.
“노무진, 그 자식 지금쯤이면 삼각 빤스 입고 물살을 가르고 있겠네.”
주먹을 쥔 손을 다른 손바닥에 치며 깔깔 웃기 시작한 밀리는 음흉하게 눈썹을 꿈틀거렸다.
“노무진? 그 싸가지 노무진 말이야?”
밀리는 파리가 다리를 비벼대는 것처럼 손을 비비며 린지의 옆을 지나쳐 갔지만 몇 걸음 걷지 못하고 소율에게 어깨를 잡혔다. “수영부 노무진, 우리 반 그 누무진?” 연거푸 물으며 소리를 질러댔다. 슬슬 손발을 바르작대기 시작한 소율은 표정을 굳히며 눈망울을 적시기 시작했다.
“그럼 우리 학교에 노무진이 둘 있던?”
아차, 반소율은 노무진이라면 도망갈 생각만 하지?
밀리의 눈이 겁을 잔뜩 집어먹고 파르르 떨기 시작한 소율의 얼굴에 머물렀다.
“저, 저기. 밀리야……, 린지……. 난 매점 앞 화단에 가 있을게. 너희 둘이 다녀와.”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