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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의 시간

혁명의 시간

: 러시아 혁명 120일 결단의 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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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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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08년 03월 27일
쪽수, 무게, 크기 596쪽 | 820g | 크기확인중
ISBN13 9788991799318
ISBN10 8991799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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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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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 류한수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에서 학사와 석사를 마쳤고, 영국 에식스대학(University of Essex)에서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상명대학교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러시아 현대사를 전공하였으며, 주요 논문으로 〈탈계급화인가? 탈볼셰비키화인가?〉〈러시아 혁명과 노동의무제〉〈“공산주의자여, 공장작업대로!”〉〈여성 노동자인가, 노동하는 바바인가?〉 등이 있다.
번역한 책으로 《러시아 혁명: 1917년부터 네프까지》《빅토르 세르주 평전》《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2차세계대전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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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7월봉기’와 볼셰비키의 위기
임시정부에 불만을 품은 페트로그라드 수비대의 급진적 병사들과, 노동자들, 크론시타트 수병들이 페트로그라드에서 3일 밤에 임시정부 타도와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를 외치며 무장 봉기를 일으켰다. 봉기 세력은 소비에트가 권력 접수를 거부한 데다, 전러시아 소비에트 집행위원회가 질서를 세우고자 전선에서 부대를 호출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물러섰다. 당시 봉기 세력은 봉기 소식을 듣고 급히 귀국한 레닌에게 봉기에 나설 것을 요구했지만, 레닌은 아직 때가 무르익지 않았다고 판단하고는 봉기 세력에게 자제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오히려 레닌에게 ‘독일 스파이’ 혐의를 씌워 체포 영장을 발부했다. 정부는 7월봉기를 볼셰비키 탄압의 구실로 삼아, 7월 한 달 동안 트로츠키와 콜론타이, 루나차르스키 등 볼셰비키 주요 지도자들을 체포했다. 적국인 독일의 자금을 받아 봉기를 일으켰다는 간첩 혐의는 볼셰비키의 인기를 급격히 떨어뜨리는 듯 보였다. 레닌은 일단 라즐리프로 피신했다가 8월 9일 무사히 핀란드로 탈출했다.

레닌이 열차에서 성큼 내렸을 때, 핀란드역의 광경은 4월에 그를 맞이하던 광경과는 딴판이었다. 망명에서 돌아오던 당시 레닌은 노동자와 병사로 이루어진 군중의 영접을 받았다. 깃발과 꽃, 악단, 해군 의장대가 있었다. 심지어 소비에트 지도부도 모습을 보였다. 예전에는 황제의 대기실이었던 곳에서 레닌을 환영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니콜라이 치헤이제(Nikolai Chkheidze)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의장이 있었다. 그때 레닌은 장갑차 위에 올라탄 채 볼셰비키 본부로 향했고 당간부와 노동자와 병사들의 당당한 행렬이 그 뒤를 따랐다. 본치-브루예비치가 마차를 잡으려고 서두르는 지금은 악단이나 환영 연설이라고는 없었다. 증기와 상한 음식과 땀이 범벅된 악취가 눅눅한 여름 공기에 스며들어 있었다. …… 밖의 광장에서는 노동자와 병사들이 무리지어 몰려들어 즉시 강화를 맺고 소비에트로 권력을 넘기라고 다시 요구할 준비를 했다. --- p. 58 (1장-7월봉기)

정부의 볼셰비키 탄압은 7월 5일 이른 아침에 육군사관학교 생도로 이루어진 대부대를 파견해서 〈프라우다〉 편집실과 인쇄소를 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사관생도들은 목적지에 조금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레닌을 붙잡지 못했다. 레닌은 그보다 조금 앞서 구내를 떠났던 것이다. 습격 도중에〈프라우다〉직원 몇 사람이 얻어맞고 체포당했다. 사관생도들은 신문사를 샅샅이 뒤졌고, 그러면서 가구와 설비를 부수고 갓 찍어낸 신문 다발을 부근에 있는 모이카(Moika) 운하에 내다버렸다. 이튿날 많은 페트로그라드 신문은 이 소동을 다룬 특집 기사에서 사관생도들이 한 독일 남작이 보낸 독일어 편지를 발견했다고 의기양양하게 밝혔다. 그 편지에는 볼셰비키의 행동에 환호하고 당이 페트로그라드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얻기를 바란다고 씌어 있었다는 것이다. “독일의 서신이 발견되었다.” 이 발견을 요약하는〈말렌카야 가제타〉의 표제는 이런 식이었다. --- p. 88 (2장-포화 속의 볼셰비키)

허약한 임시정부
7월사태 이후에 볼셰비키를 탄압하고 그들의 위신을 떨어뜨리려는 정부의 시도가 전반적으로 효과가 없었다는 것은 7월 후반과 8월 초순 동안의 볼셰비키 당중앙위원회, 페테르부르크 위원회, ‘군사조직’의 상황과 활동을 살펴보면 또렷해진다. 예를 들어, 4월협의회에서 선출된 9인 당중앙위원회 위원 가운데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은 카메네프뿐이었다. 레닌과 지노비예프는 숨어 있어야 했으므로 활동에 심각한 장애가 있었지만, 두 사람 모두 당과 연결이 완전히 끊기지는 않았다. 지노비예프는 집필 활동을 계속했으며, 실제로 이 기간 동안 글을 더 많이 썼다. 레닌은 라즐리프와 핀란드에서 빈번하게 글을 보냄으로써 볼셰비키 정책을 수립하는 데 계속 영향력을 행사했다.

7월봉기의 여파로 새로 구성된 케렌스키 총리의 연립내각은 거창한 법령을 쏟아냈다. 그러나 내각이 채택한 중요한 탄압책 모두가 완전히 이행되지도, 목적을 이루지도 못했다. 이를테면, 시민의 손에서 무기와 탄약을 거둬들이는 정책은 처음부터 장애에 부딪쳐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이런 조치들 때문에 오히려 지역 소비에트 내에서 임시정부에 대한 반감만 갈수록 높아졌다.

지난날은 잊어버리자는 분위기, 그리고 반혁명에 직면한 경계심은 7월 21일의 구간협의체 비상회의에서 나타났다. 멘셰비키 국제주의자인 빅토르 라포포르트(Viktor Rappoport)는 민주 세력 전체가 뭉쳐서 대두하는 반혁명과 싸워야 한다고 감동적으로 호소하면서 반혁명이 볼셰비키를 공격하면서 시작되었지만 볼셰비키와 가까운 좌익 그룹에도 타격을 가할 수 있다는 견해를 밝혔다. 라포포르트는 “반혁명이 동원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흩어져서는 안 됩니다.”라고 선언했다. …… (구간협의체 비상회의에서 작성된) 선언문에 따르면, 반혁명은 전반적으로는 혁명적 민주 세력, 특정하게는 혁명적 민주 세력의 왼쪽 날개를 공공연히 공격하고자 7월 3∼4일의 사건들을 이용했다. 그러는 가운데 7월사태 이후로 볼셰비키가 핍박을 받아 혁명 세력이 분열되고 혁명의 왼쪽 날개가 고립화되었다. 혁명에 충성을 바치는 연대의 해체, 대량 체포, 노동자 신문의 폐간은 단지 혁명적 민주 세력의 약화에 이바지했을 뿐이다.
--- pp. 170~171 (4장-허약한 임시정부)

볼셰비키의 귀환
페트로그라드의 노동자와 병사들이 볼셰비키에 품은 반감과 적대감이 7월봉기 이후 몇 주 내에 사라진 한편, 8월 초순에는 당 기구를 온전하게 유지한 볼셰비키당이 새로운 성장기에 들어섰음을 보여주는 뚜렷한 조짐이 많았다. 볼셰비키의 부활은 자기들을 지지하던 사람들이 대거 빠져나가 볼셰비키 편으로 넘어갔다는 현장 멘셰비키-사회주의자혁명가 지도자들의 빈번한 불평에 반영되어 있다. 이런 경향은 8월 20일에 치러진 페트로그라드 시의회(시 자치위원회) 선거에서 분명하게 드러났다. 이 선거에서 볼셰비키는 183,624표를 얻어 새로운 시의회에서 67석을 차지했다. 볼셰비키의 득표 수는 사회주의자혁명가당에게만 뒤진 2위였다. 이것은 5월 하순에 있었던 구의회 선거에서 거둔 성적보다 14퍼센트 오른 것이었다. 이 선거 결과는 7월봉기 후 정부의 강력한 볼셰비키 탄압 때문에 잠시 후퇴한 것으로 보였던 볼셰비키의 영향력이 빠르게 회복되고 있음을 뚜렷이 보여주었다.

“볼셰비키의 승리는 그들 자신의 기대를 훨씬 넘어서는 엄청난 승리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민주 세력 자체의 창조적 활동이 미약해서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결과를 대중에게 주지 못한 탓에 볼셰비키의 승리를 거둔 셈이다. 그리고 볼셰비키의 승리는 그들에게 순교자의 후광을 얹어주어 노동자·병사 대중 사이에 남아 있는 7월 3∼5일의 분별없고 무모한 범죄 행위의 인상을 지워버린 허둥대고 때때로 서툴고 무지했던 혼란투성이 탄압 체계 덕분이기도 했다.” --- p. 190 (5장-볼셰비키의 귀환)

‘코르닐로프 위기’ ― 우익 쿠데타로부터 혁명을 구하라!
8월 24일 저녁, 러시아군 최고사령관 코르닐로프가 휘하 군대에 페트로그라드로 진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7월봉기 후부터 코르닐로프는 우익 군부 세력과 보수주의자들 사이에서 소비에트와 볼셰비키를 결딴내고 과거 러시아의 질서를 회복할 독재자 후보로 인기가 높았다. 우익 세력은 코르닐로프의 쿠데타에 맞추어 페트로그라드에서 좌파의 대규모 봉기를 촉발해 쿠데타 구실로 삼을 계획을 세웠다. 당시 코르닐로프는 케렌스키 총리가 강력한 억압책을 통해 좌파를 억누르고 러시아에 질서를 다시 세우려는 결심을 하고 있으며 자신을 도와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이는 오산이었다. 케렌스키는 코르닐로프 장군에게 권력을 넘겨줄 뜻이 없었다. 코르닐로프의 반혁명 쿠데타를 막고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케렌스키는 강력한 총재정부를 세우기로 결심하고 2차 연립내각 각료들에게 즉각 사임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따라 26일에 2차 연립내각 각료가 전원 사퇴했다.(2차 연립내각 소멸) 케렌스키는 코르닐로프를 해임한 뒤 스스로 최고사령관이 되었다.

비록 전신 인쇄기로 나눈 대화에서 구체적으로 입증된 것은 코르닐로프가 케렌스키와 사빈코프가 모길료프에 오기를 바란다는 것뿐이었지만, 이때 케렌스키는 자기가 감쪽같이 속았으며 스타프카가 자기를 완전히 제쳐놓고 거사를 벌이기로 결정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갖가지 생각이 뒤엉켜 그의 뇌리를 스쳐 갔다. 케렌스키는 지난 한 주 동안 우익 쪽으로 선회했으며, 만약 이것이 완전히 드러나면 온건 사회주의자의 눈에는 중대한 타협을 하고 있다고 비칠 것이다. 그렇다면 코르닐로프와 싸우는 일에 온건 사회주의자의 지지에 기대는 것이 현실적일까? 그리고 변덕이 죽 끓듯 하는 페트로그라드 대중, 즉 자기가 탄압하려 했던 바로 그 집단은 이 새로운 위기에 어떤 반응을 보일까? …… 사실 거의 24시간 동안 케렌스키와 코르닐로프의 분규는 신문에, 또는 심지어 소비에트 지도부에도 알려지지 않았다. --- p. 239 (7장-케렌스키 대 코르닐로프)

뒤늦게 코르닐로프의 진군 소식을 알게 된 소비에트 중앙집행위원회는 혁명을 수호하기 위해 비상 군사 방위 기관, 즉 대반혁명인민투쟁위원회를 만들었다. 이 인민투쟁위원회는 8월 28일부터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소비에트와 볼셰비키의 활약으로 코르닐로프 쿠데타를 막을 수 있었고 사태는 29일에 진정되었다. 결국 이 사건으로 케렌스키의 평판은 완전히 땅에 떨어졌다. 패한 우익은 케렌스키가 개인적 야심이나 용기 부족 때문에 코르닐로프를 배반했다고 보았다. 좌익과 페트로그라드의 노동자·병사 대중에게 케렌스키는 반혁명의 본질적인 일부였다. 게다가 이 시기에 러시아 전역에서 경제가 계속 빠른 속도로 붕괴했으며, 페트로그라드에서 실업 문제, 식량과 연료 부족, 인플레이션이 훨씬 더 심각해지고 있었다.

7월 초순 이후로 케렌스키가 정부의 권위를 되찾고 군대를 강화하는 일에서 이룬 보잘것없는 성공 모두가 코르닐로프 사건 탓에 엉망진창이 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제는 확연하게 더 급진적인 관점으로 돌아선 소비에트는 위기를 헤쳐 나오면서 대중 사이에서 인기가 엄청나게 높아졌다. 혁명 러시아는 경합하는 풀뿌리 정치 조직과 혁명위원회들로 이전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포화 상태에 이르렀다. 노동자의 투쟁성과 조직성이 더 높아졌고, 상당히 많은 노동자가 무기를 손에 넣었다. 동시에 군대 안의 민주위원회들이 코르닐로프 사태에 맞서 병사들을 조직하는 일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 덕분에 다시 활기를 띠었다. 페트로그라드 수비대 안에서 수많은 연대위원회의 통제권이 온건 분자들에게서 볼셰비키의 손으로 넘어갔다. --- p. 302 (9장-소비에트 혁명 전략)

볼셰비키에 맞선 레닌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회의록과 9월 말에 좌익계 신문에 나온 정치 결의문의 논지로 판단해보면, 페트로그라드 노동자와 병사들은 혁명 정부를 창출할 소비에트 대회를 빨리 연다는 생각에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8월 말의 코르닐로프 위기 직후 잠시 동안 온건한 입장을 보였던 레닌은 9월 중순부터 이전보다 더 급진화된 경향을 보였다. 레닌은 페트로그라드의 당 지도부가 임시정부를 손쉽게 타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있다고 확신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레닌은 핀란드에서 돌아온 후 처음으로 10월 10일에 당중앙위원회와 직접 대결했다. 당중앙위원회 회의에서 레닌은 러시아 국민 과반수가 볼셰비키를 지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현 상황에서 대중이 혁명적 행동에 무관심해 보이는 까닭은 단지 대중이 ‘말’과 ‘결의문’에 싫증이 났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이제 구체적인 ‘행동’이 필요한 때가 왔다. 격렬한 찬반 토론 끝에 볼셰비키 지도자들이 투표를 통해 레닌이 주장하는 대로 무장 봉기 조직과 권력 장악을 ‘의사 일정’으로 삼았다. 이때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는 강하게 반대했다.

우리의 당중앙위원회와 당 상층부에 소비에트 대회를 기다리고 조속한 권력 장악에 반대하고 조속한 봉기에 반대하는 경향이나 의견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 …… 해야 합니다. 이 경향이나 의견을 극복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볼셰비키는 영원히 모욕당하고 당은 무용지물이 될 것입니다. …… 소비에트 대회를“기다리는 것”은 바보 같은 짓입니다. 왜냐하면 그 대회는 아무것도 주지 않을 것이며, 아무것도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 우리에게는 피테르에 무장한 노동자와 병사 수천 명이 있습니다. 그들은 겨울궁전, 총참모부, 전화국, 모든 대형 인쇄소를 즉시 장악할 수 있습니다. …… 만약 우리가 세 지점, 즉 피테르와 모스크바와 발트해 함대에서 즉시, 기습적으로 공격을 한다면, 7월 3∼5일보다 희생을 더 적게 치르고 승리할 확률이 99퍼센트입니다. (레닌의 <위기가 무르익었다>)
--- p. 343 (11장-볼셰비키에 맞선 레닌)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는 러시아 국민 과반수가 지금 볼셰비키를 지지하며 국제 프롤레타리아가 대부분 볼셰비키에 찬성한다는 레닌의 가정에도 회의를 표명했다. 두 사람이 보기에는 러시아 노동자 과반수와 상당수의 병사들이 볼셰비키를 지지하지만 “나머지는 모두 다 확실하지 않다.” 이를테면, 두 사람은 만약 지금 상황에서 헌법제정회의 선거가 치러지면 농민 과반수가 사회주의자혁명가당에 투표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볼셰비키를 지지하는 병사들은 그들대로 볼셰비키가 어쩔 수 없이 혁명 전쟁을 수행해야 한다면 “뒷걸음”칠 것이다. 두 사람은 독일 정부가 민주적 강화를 제안한 혁명 러시아와 싸우기 어려우리라는 레닌의 주장이 어느 정도는 타당하다고 인정하면서도 그 같은 장애물이 독일을 저지할 것 같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 pp. 359~360 (11장-볼셰비키에 맞선 레닌)

트로츠키와 군사혁명위원회
10월 16일, 마침내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총회에서 ‘군사혁명위원회’ 조직 계획을 승인했다. 처음 구상된 것은 10월 9일이었다. 볼셰비키가 제안한 군사혁명위원회(혁명방위위원회)의 실질적 목적은 우경화한 임시정부라는 적으로부터 혁명을 수호하는 것이었다. 21일까지 군사혁명위원회가 구체적인 모습을 갖추었다. 군사혁명위원회는 10월 21일과 22일에 이미 사실상 수비대 지휘권을 장악했다. 트로츠키는 수비대의 상당 부분을 독일군과 전투가 벌어지는 전선으로 이동시키겠다는 임시정부의 계획을 구실로 삼고 자신들의 대정부 공격을 소비에트와 혁명 수호를 위한 방어 작전으로 위장했다. 21일부터 도시 전역에서 정부 지도위원이 군사혁명위원회가 뽑은 지도위원으로 대체되었다. 혁명군사위원회는 지도위원들에게 무제한의 군사 명령 거부권을 부여했다. 23일에는 전략상 결정적으로 중요한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와 크론베르크 병기창을 장악했다. 이로써 군사혁명위원회는 페트로그라드에 주둔한 대다수 군부대의 통제권을 장악하고 임시정부를 사실상 무장 해제했다.

내 주위는 황홀경에 가까운 분위기였고, 군중은 지금 지시가 없는데도 누구랄 것도 없이 종교 찬가라도 부르기 시작할 듯했다. 트로츠키는 무엇인가 별것 아닌 짧은 결의안을 내놓고 있었다. 누가 찬성하는가? 군중 수천 명이 마치 한 사람인 양 손을 들었다. 트로츠키는 계속 말을 했다. 무수한 군중은 손을 계속 들고 있었다. 트로츠키는 낱말을 또박또박 끊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러분이 할 이 표결이 혁명을 승리로 이끌고 토지와 빵과 평화를 줄 거대한 책무를 떠맡은 소비에트를 온 힘을 다해서, 모든 수단으로 지지한다는 여러분의 맹세가 되도록 하십시오!” 무수한 군중이 손을 들었다. 군중이 찬성한다. 군중이 선서한다. (10월 22일 트로츠키의 연설을 들었던 수하노프의 기록)
--- pp. 415~416 (13장-트로츠키와 군사혁명위원회)

혁명 전야
10월 24일 동이 트기 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케렌스키가 볼셰비키를 직접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는 사관생도와 경찰로 구성된 부대를 보내 <노동자의 길>을 발행하는 트루드 인쇄소를 습격해 공식적으로 폐쇄했다. 또한 수도 밖에 있는 친(親)정부 부대를 불러들였다. 이 소식이 군사혁명위원회에 알려지면서 즉각 무장 봉기에 나서자는 의견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24일 오후 볼셰비키 당중앙위원회와 군사혁명위원회는 즉각적인 봉기보다 우선 힘을 모으는 것이 필요하며, 25일에 열릴 소비에트 대회를 통해 케렌스키 정부를 공식적으로 소비에트 정부로 대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결정했다.
24일 내내 군사혁명위원회는 유혈 사태 없이 수도의 주요 거점을 하나씩 공략해 나갔다. 오후 5시에 군사혁명위원회의 페스트코프스키가 위원회의 명령에 따라 중앙전신국 통제권을 장악했다. 정부군의 탈환 시도는 무위로 끝났다. 8시가 지나면서 페트로그라드 전신소도 군사혁명위원회의 손에 넘어왔다. 수도에서 정부군과 군사혁명위원회의 첫 싸움이 벌어지는 동안, 핀란드 겔싱포르스와 크론시타트에서는 군사혁명위원회의 요청에 따라 함대와 수병들이 페트로그라드를 향해 출발했다.

동지들! 나는 24일 저녁에 이 글을 쓰고 있고, 상황은 극히 위태롭습니다. 지금 봉기에서 꾸물거리는 것은 사실상 죽음이나 마찬가지임은 명명백백합니다. 온 힘을 다해서 나는 지금 만사가 위태롭다는 것, 협의회가 아니라 (설령 소비에트 대회라 할지라도) 대회가 아니라 오직 인민, 대중, 무장한 대중의 투쟁으로만 해결되는 문제가 닥쳤다는 것을 동지들에게 설득하고 있습니다.
역사는 오늘 승리할 수 있는, 그리고 오늘 반드시 승리할 혁명가가 모든 것을 잃을 위험을 무릅쓰고 꾸물거리는 것을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권력을 잡는다면, 우리는 소비에트에 대항해서가 아니라 소비에트를 위해서 권력을 잡는 것입니다. (10월 24일 레닌이 작성한 마지막 봉기 호소문)
--- pp. 448-449 (14장-전야)

볼셰비키의 승리
25일 새벽 2시경부터 군사혁명위원회의 행동이 훨씬 더 공격적으로 변했다. 소비에트 대회가 열리기 전에 임시정부를 전복해 이를 대의원들이 기정 사실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만들려는 노력이었다.
오전 6시 : 군사혁명위원회의 명령으로 병사들이 국립은행을 점령했으며, 한 시간 뒤에는 페트로그라드 중앙전화국을 점령하고 곧바로 임시정부가 있는 겨울궁전과 군사령부로 가는 전화선을 끊었다. 이로써 25일 아침에 정부는 대부분 전화가 불통이거나 전기가 끊기는 상황에 처했다.

오전 10시 : 스몰니에서 레닌이 정치 권력이 케렌스키 정부로부터 군사혁명위원회로 이전되었음을 선포하는 <러시아 시민에게>라는 선언문을 작성했다. 이 선언문은 곧 인쇄되거나 전신을 통해 전국으로 흘러나갔다.

오전 11시 : 케렌스키 총리가 친정부군을 찾기 위해 자동차를 타고 겨울궁전을 빠져나갔다.

오후 6시 : 정오에서 오후 6시로 조정되었던 겨울궁전 점령 마감이 계속 늦춰지는 가운데, 겨울궁전의 임시정부를 지키고 있던 장교, 사관생도, 여성 병사들 중에서 이탈자가 속출했다. 겨울궁전의 병사들은 보급품도 없었고 지원군도 오지 않아 갈수록 사기가 떨어졌다.

밤 9시 40분 :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에서 마침내 겨울궁전 공격 명령을 내렸다. 곧 아브로라호에서 궁전을 향해 위협용 포격을 시작했고, 밤 11시쯤 본격적으로 포격을 개시했다.
밤 10시 40분 : 오후 2시로 예정되어 있었던 제2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가 스몰니 학원에서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 볼셰비키의 무장 봉기에 강하게 항의하며 멘셰비키와 사회주의자혁명가들이 퇴장했다. 사회주의자혁명가당 좌파는 남았다. 자정을 넘어 계속된 회의는 26일 새벽 2시 40분 잠시 휴회에 들어갔다.

10월 26일 새벽 2시경 : 군사혁명위원회가 겨울궁전을 점령하고 임시정부 각료를 전원 체포했다. 안토노프-오프세옌코가 성난 병사들의 공격에서 각료들을 안전하게 보호했다. 이 무렵, 스몰니에서 소비에트 대회 회기가 재개되었다. 카메네프가 임시정부 전복을 선포하는 일을 맡았다.
오전 5시 : 소비에트 대회에서 혁명정부 창출을 합법화하는 선언문(레닌이 쓴 <노동자, 병사, 농민에게>)이 표결에 부쳐져 압도적 차이로 통과되었다. 선언문은 페트로그라드의 봉기를 승인하고 최고 정치 권한이 소비에트 대회와 러시아 전역의 지역 소비에트로 넘어왔다고 선포하였다. 민주적 강화와 즉시 휴전, 군대의 민주화, 지주들의 토지 몰수, 헌법제정회의 소집 등이 새로운 권력의 목표가 되었다.

인민 대중의 봉기는 정당화하지 않아도 됩니다. 현 사태는 봉기이지 음모가 아닙니다. 우리는 페테르부르크 노동자와 병사들의 혁명적 에너지를 담금질했습니다. 우리는 음모가 아니라 봉기를 향한 대중의 의지를 공개적으로 단련했습니다. …… 인민 대중은 우리의 깃발 아래로 왔고, 우리의 봉기는 승리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지금 우리에게 제안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승리를 포기하고 양보하고 타협하라고. 누구와? 나는 묻습니다. 우리가 누구와 타협해야 합니까? 이곳을 떠나버린, 이런 제안을 하는 저 불쌍한 무리와? 하지만 우리는 그들을 낱낱이 파악하지 않았습니까? 러시아에는 이제 그자들을 따르는 사람이 더는 없습니다. 이 대회에 대표를 보낸 수백만 노동자와 농민이 동등한 당사자로서 그들과 타협해야 합니까? 그들이 노동자와 농민을 부르주아의 호의와 맞바꿀 준비가 된 것은 처음도 아니고 마지막도 아닙니다. 안 됩니다. 여기서 타협은 쓸데없는 짓입니다. 이곳을 떠난 자들에게, 그 제안을 받아들이라고 설치는 자들에게,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합니다. 너희는 한 줌도 안 되는 가련한 소수다. 너희는 파산했다. 너희 역할은 끝났으니, 이제 너희가 지금 있어야 할 그곳으로 가라. 역사의 쓰레기통 속으로. ……
(10월 25일 트로츠키가 제2차 소비에트 대회에서 한 연설) --- pp. 493~494 (15장-볼셰비키의 승리)

소련에서 씌어진 대다수 설명과는 달리, 겨울궁전은 돌격으로 점령되지 않았다. 훗날 안토노프-오프세옌코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늦저녁까지 “겨울궁전 공격 전체는 대체로 극히 무질서한 성격을 띠었다. …… 마침내 남아 있는 사관생도가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이 밝혀지자 나와 추도노프스키는 공격 대원들을 이끌고 겨울궁전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가 들어갈 때 사관생도들은 이미 저항을 하지 않았으며, 우리는 임시정부 각료들을 찾아서 궁전 깊숙이 마음대로 침입해 들어갔다.” …… 추도노프스키가 그 자리에 있던 관리들의 이름을 받아 적고 공식 조서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가장 노리던 사람인 케렌스키가 방에 없음을 깨닫고는 많은 공격 대원이 격분 상태에 빠졌다. 누군가 “이 빌어먹을 놈들. 동지들! 이놈들을 바로 이 자리에서 모두 다 찔러 죽입시다!”라고 외쳤다. 말랸토비치는 “동지들, 진정하세요! 임시정부 각료는 모두 다 체포되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에 감금될 것입니다. 나는 이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어떤 폭력도 허용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단호하게 말해서 각료들이 린치당하지 않도록 어떻게든 간신히 막아낸 사람이 바로 안토노프-오프세옌코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 pp. 499~501 (15장-볼셰비키의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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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박한 파국, 지금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혁명 전략가들의 숨막히는 논전을 현장에서 듣는다

“싸워서 얻어낸 러시아 혁명을 훼손하려는 그 어떠한 시도도 용납하지 않겠다. 힘든 시련의 나날에 조국을 배반한 자들에게 저주를 내려라!" - 케렌스키(7월 6일)-2장 포화 속의 볼셰비키---p.92

“러시아인이여, 우리의 위대한 조국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임종 시간이 가까이 있습니다. 모든 러시아 국민에게 조국을 구하라고 호소합니다.” - 코르닐로프(8월 27일)-7장 케렌스키 대 코르닐로프---p.242

“권력에 관한 문제는 비켜가서도 제쳐놓아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이것은 혁명의 발전에서 모든 것을 결정하는 기본 문제이기 때문이다.” - 레닌(9월 8일)-10장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p.310

“안 됩니다. 인민은 단 하루라도 더 질질 끄는 것을 참는 데 동의하지 않습니다! 전쟁을 연장하려고 코르닐로프류의 지주 출신 장군들과 협상을 벌이고 있는 케렌스키 정부를 타도하십시오!” - 레닌(10월 1일)-11장 볼셰비키에 맞선 레닌---p.345

“권력이 우리에게 오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지금 권력을 잡으면, 우리는 나중에 우리 편이 될 세력을 떨구어 내버리게 될 것입니다. 레닌 동지가 내놓은 전략 계획에는 허술한 구석이 아주 많습니다. 동지 여러분, 자신을 속이지 마십시오.” - 라셰비치(10월 5일)-11장 볼셰비키에 맞선 레닌---p.351

“우리와 부르주아 사이에 프티부르주아라는 엄청난 제3의 진영이 있음을 우리는 잊지 않았고 지금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의심할 여지 없이, 지금 이 진영은 우리보다는 부르주아에 훨씬 더 가까이 서 있습니다.” - 카메네프(10월 10일)-11장 볼셰비키 맞선 레닌---p.359

“권력을 즉시 잡아야 합니다. 그냥 지나가버리는 하루하루가 파멸을 불러올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지금 권력을 잡지 않는다면, 역사가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 레닌(10월 16일) -12장 봉기의 장애물---p.383

“우리 동무들 가운데 몇 사람은, 이를테면 카메네프와 랴자노프는 상황 평가에서 우리와 견해가 다릅니다. 그러나 현실, 바로 그것이 우리의 노선을 정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나날이 강해지고 있습니다. 내일이면 인민의 진정한 의지가 드러납니다.” - 트로츠키(10월 24일)-14장 전야---p.432

“멘셰비키 국제주의자 대의원단은 범민주 정부를 구성하는 방법으로 현재의 위기를 반드시 평화적으로 해소해야 한다는 결의를 채택할 것을 대회에 제안합니다.” - 마르토프(10월 25일)-15장 볼셰비키의 승리---p.4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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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의 시간》은 1917년 러시아 10월혁명을 탐구한 책으로는 여전히 최고이다! 저자의 독창적 연구 성과가 돋보이는 이 책은 20세기 세계사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으며 오늘날에도 그 그림자를 짙게 드리우고 있는 사건인 10월혁명을 다루고 있다. 이 책은 볼셰비키와 그들을 최고 권력으로 이끈 당시 사회적 요인들에 관한 우리의 이해를 심화시켜주었을 뿐 아니라, 10월혁명에 대해 우리가 갖고 있던 숱한 오해와 편견을 바로잡아주었다. 정치사와 사회사 양쪽에서 1917년 러시아에서 일어난 그 폭풍과도 같은 사건들에 관한 구체적 지식을 놀랄 만큼 크게 확장시켜준 책이다.
스티븐 F. 코언 Stephen F. Cohen, (뉴욕대 역사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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