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흙이 소리없이 부서지고 최초의 싹이 모습을 드러낸다. 나는 그때까지 식물은 씨앗으로부터 아래를 향해 뿌리처럼 자라거나, 또는 감자처럼 씨감자에서 위를 향해 싹이 자란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대부분의 식물은 자신의 씨를 모자처럼 머리에 쓰고 위를 향해 자란다. 당신도 한번 상상해 보라. 가령 아기가 태어날 때 엄마를 머리 위에 쓰고 나오는 장면 같은 것 말이다. 자연의 신비와 경이는 실로 형언하기 어렵다. 대부분의 어린 싹들이 이처럼 위험한 곡예를 훌륭하게 수행하는 것이다. 싹은 점점 더 대담하게 씨를 하늘 높이 들어올려 마침내는 떨어뜨리거나 던져 버린다. 그것은 지금 여기에 자라고 있다.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꺾일 듯 연약하고, 포동포동하거나 땅딸막하거나 부쩍 마른, 위를 보며 웃는 두 장의 작은 잎을 가진 벌거숭이, 그 두 장의 작은 잎 사이에서 마침내 무언가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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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원예가가 천지창조의 시초부터 자연도태에 의해 발달해 왔다면 틀림없이 무척추동물로 진화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 때문에 원예가에게 등이 있는 것일까? 아마도 이따금씩 구부렸던 몸을 일으키고 "등이 아프구나!"라며 한숨을 내쉬기 위해서라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다. 그리고 다리는 종종 구부리는 일을 한다. 앉기도 하고 무릎을 꿇기도 하고 몸을 아래로 굽히기도 한다. 또 원예가의 손가락은 작은 구멍을 팔 때 막대기 대신 쓰이고, 주먹은 흙덩어리를 잘게 부수거나 부드럽게 할 때 요긴하게 쓰인다. 입은 파이프를 물기에 딱 좋다. 그러나 등만큼은 아무리 구부리려고 해도 구부려지지 않는다. 부럽게도 지렁이에게는 척추가 없다. 게다가 원예가의 겉모습만 보고 있으면 언제나 몸은 보통 엉덩이로 끝나게 마련이다. 또 팔과 다리는 마치 게처럼 옆으로 쫙 벌린 채, 풀을 뜨든 말처럼 양 무릎 사이에 머리를 처박고 있다. (...)
토양 관리는 경작에 의해 좌우된다. 그러나 막상 경작이란, 말처럼 간단하지가 않다. 삽이나 괭이를 이용해서 파내거나 파묻거나, 덩어리를 부수거나, 땅을 평평하게 고르거나, 도랑을 파는 등 여러가지 방법들이 무수히 많기 때문이다. 또 동시에 토양 성분에 의해서도 좌우된다. 아마 상당히 공들여 만드는 푸딩의 요리법도 배양토의 조제법만큼 복잡하지는 않을 것이다. 당장 지금 내 머리 속에 떠오르는 것만 해도 가축의 똥, 쇠두엄(외양간에서 쳐낸 두엄), 구아노, 부엽토, 잔디흙, 밭흙, 모래, 짚, 석회, 카이닛(Kainite), 토마스 인비, 베이비파우더, 칠레초석, 각분, 과인산석회, 쓰레기, 쇠똥, 회, 토탄, 퇴비, 물, 맥주, 담뱂진, 성냥똥, 고양이의 죽은 잔해 등 무수히 많다. 그리고 여기에도 몇가지를 더 넣어서 이것들을 전부 골고루 잘 섞은 뒤 레이크(농기구의 하나로 흙을 고르거나 풀을 긁어 모으는 데 쓰는 쇠갈퀴)로 그 위를 평평하게 고른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원예가는 단순히 화려하게 핀 장미 향기를 맡는 사람이 아니라, 슁새없이 '석회를 좀더 넣어야 하나', '흙이 너무 무겁지 않을까, 모래를 좀더 넣을까' 하는 따위의 생각에만 골몰해서 생활하는 인간이다. 그러나 오늘날에 이르러 원예는 일종의 과학이 되어 있다. 옛날에는 "창가에서 키우던 덩굴 장미의.."라고 처녀들이 노래를 불렀지만, 지금은 오히려, "창가에서 보이는 칠레초석, 석회에 잘게 썬 짚을 잘 섞어서..."라는 노래를 떠오르게 한다. 한마디로 장미는 아마추어 원예가를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즉, 원예가의 즐거움은 더욱 심오한 대지의 태내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래서 원예가가 죽어 다시 세상에 태어난다면 아마 꽃향기에 취하는 나비가 되는 대신 십중팔구는 질소를 포함한 온갖 향내가 진동하는 검은 대지의 진미를 찾아서 땅 속을 헤집고 다니는 지렁이로 태어날 것이다.
--- pp 47~48
만일 원예가가 천지창조의 시초부터 자연도태에 의해 발달해 왔다면 틀림없이 무척추동물로 진화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 때문에 원예가에게 등이 있는 것일까? 아마도 이따금씩 구부렸던 몸을 일으키고 "등이 아프구나!"라며 한숨을 내쉬기 위해서라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다. 그리고 다리는 종종 구부리는 일을 한다. 앉기도 하고 무릎을 꿇기도 하고 몸을 아래로 굽히기도 한다. 또 원예가의 손가락은 작은 구멍을 팔 때 막대기 대신 쓰이고, 주먹은 흙덩어리를 잘게 부수거나 부드럽게 할 때 요긴하게 쓰인다. 입은 파이프를 물기에 딱 좋다. 그러나 등만큼은 아무리 구부리려고 해도 구부려지지 않는다. 부럽게도 지렁이에게는 척추가 없다. 게다가 원예가의 겉모습만 보고 있으면 언제나 몸은 보통 엉덩이로 끝나게 마련이다. 또 팔과 다리는 마치 게처럼 옆으로 쫙 벌린 채, 풀을 뜨든 말처럼 양 무릎 사이에 머리를 처박고 있다. (...)
토양 관리는 경작에 의해 좌우된다. 그러나 막상 경작이란, 말처럼 간단하지가 않다. 삽이나 괭이를 이용해서 파내거나 파묻거나, 덩어리를 부수거나, 땅을 평평하게 고르거나, 도랑을 파는 등 여러가지 방법들이 무수히 많기 때문이다. 또 동시에 토양 성분에 의해서도 좌우된다. 아마 상당히 공들여 만드는 푸딩의 요리법도 배양토의 조제법만큼 복잡하지는 않을 것이다. 당장 지금 내 머리 속에 떠오르는 것만 해도 가축의 똥, 쇠두엄(외양간에서 쳐낸 두엄), 구아노, 부엽토, 잔디흙, 밭흙, 모래, 짚, 석회, 카이닛(Kainite), 토마스 인비, 베이비파우더, 칠레초석, 각분, 과인산석회, 쓰레기, 쇠똥, 회, 토탄, 퇴비, 물, 맥주, 담뱂진, 성냥똥, 고양이의 죽은 잔해 등 무수히 많다. 그리고 여기에도 몇가지를 더 넣어서 이것들을 전부 골고루 잘 섞은 뒤 레이크(농기구의 하나로 흙을 고르거나 풀을 긁어 모으는 데 쓰는 쇠갈퀴)로 그 위를 평평하게 고른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원예가는 단순히 화려하게 핀 장미 향기를 맡는 사람이 아니라, 슁새없이 '석회를 좀더 넣어야 하나', '흙이 너무 무겁지 않을까, 모래를 좀더 넣을까' 하는 따위의 생각에만 골몰해서 생활하는 인간이다. 그러나 오늘날에 이르러 원예는 일종의 과학이 되어 있다. 옛날에는 "창가에서 키우던 덩굴 장미의.."라고 처녀들이 노래를 불렀지만, 지금은 오히려, "창가에서 보이는 칠레초석, 석회에 잘게 썬 짚을 잘 섞어서..."라는 노래를 떠오르게 한다. 한마디로 장미는 아마추어 원예가를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즉, 원예가의 즐거움은 더욱 심오한 대지의 태내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래서 원예가가 죽어 다시 세상에 태어난다면 아마 꽃향기에 취하는 나비가 되는 대신 십중팔구는 질소를 포함한 온갖 향내가 진동하는 검은 대지의 진미를 찾아서 땅 속을 헤집고 다니는 지렁이로 태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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