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혼돈과 부조화가 그렇게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이 현상은 갑자기 찾아온 새로운 기회와 잘살 수 있다는 자각을 통해 통제되지 않은 에너지가 분출되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런 현상은 이제껏 한반도에는 없었던 새로운 자각이다. 괴리가 만들어지는 속도와 새로운 기회를 찾는 동력의 크기가 엄청나게 빠르고 크다는 것 또한 새로운 현상이다. 문제는 이 에너지를 어떤 그릇에 어떻게 담을 것인가이다. 혹자는 그것을 옛 그릇에 담으려고 하지만 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또 새로운 그릇을 찾을 때 외국의 수단을 그대로 수입하는 경우가 많은데, 우리 도시에서 벌어지는 이 현상은 외국의 어떤 곳에서도 없었던 것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새롭게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건축 역시 그렇다. 건축은 새로운 것을 하는 것이라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건축의 문제는 내일의 문제이고, 그래서 어느 정도는 확인되지 않은 문제이면서 새로운 문제인 것이다.
---p. 12(유걸, “열린 사회, 열린 공간” 일부분)
건축을 공간에 관한 것이라고 하는데 이는 주로 내부 공간을 의미한다. 그래서 건축은 시각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이다. 건축을 동결된 음악(frozen music)이라고도 하지만 건축을 고정된 것으로 생각하는 데는 동의할 수 없다. 건축은 사람들의 생활을 돕는(serve) 환경이다. 그 기능을 제외하고는 건축을 생각할 수 없으며, 그래서 사람을 제외할 수 없고 사람들의 생활과 함께 이해되어야 한다. 그리고 사람은 돌같이 고정된 물체가 아니라 항상 살아 숨 쉬며 움직이기 때문에 환경 역시 이 움직이는 사람과 함께 동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p. 12(유걸, “열린 사회, 열린 공간” 일부분)
처음 방문한 사람들이 늘 오던 곳처럼 친숙하게 느끼고, 방문자가 자기 소유물처럼 편안하게 느끼는 그것이 열린 공간의 성질이 되어야 한다. 소유자의 소유권을 내세우는 듯한 건축물의 모습은 개인 또는 집단의 폐쇄성을 잘 드러낸다. 방문객, 즉 남을 배려하는 공간은 남을 배려하는 사회의 얼굴이다. 어느 곳에서든 살 수 있고 내 것처럼 사용할 수 있는 도시의 건축 환경은 내 생활의 지평을 넓히는 것이고, 그로 인해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p. 13(유걸, “열린 사회, 열린 공간” 일부분)
나는 우선 건축의 주체는 내부 공간이라고 본다. 그러면서도 도시를 포기했다고 보는 게 맞는 점도 있다. 서울이라는 도시는 와일드 와일드 이스트다. 카우보이의 총싸움이 언제 벌어질지 모르는 미국 서부 개척기의 상황이 오늘날 서울의 문화적 상황이다. 문화적으로 난장판을 벌이고 있다. 요즘은 이 난장판에서 발생하는 에너지를 즐기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서울시 신청사는 상징성의 표현보다는 이 에너지의 가능성에 도전하고 있다. 광장을 만들기 위해 방향성을 전면에 두었고, 도시 공간과 연계가 가능한 건축적 형태를 제안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 가능성과 미래로의 도전이다.
---p. 138(유걸, “보통 건축과 꿈의 건축” 일부분)
나의 망설임과는 대조적으로 건축가는 대단히 직설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솔직하게 말하는 흔치 않은 건축가다. 당대의 주류에 끌려가지 않고 일체의 변명 섞인 말을 하지 않는다. 직설적인 말은 직설적인 반응을 불러낸다. 동료 건축가 조병수는 그를 “한국 건축의 조지 W. 부시”라고 평한 적이 있고, 비평가 이종건은 그의 인문학에 대한 “기본적인 소양마저 의심”하면서 그를 ‘기술인’이라고 부른 적이 있다. 또 한국의 저명한 사회이론가 조명래는 “공공공간에 대한 이해가 결여되어 있다”고 유걸을 비판하기도 했다. 재미있는 것은 건축가의 지성과 윤리에 대한 이런 부정적인 평가 뒤엔 거의 언제나 그의 건축에 대해 보다 우호적이고 긍정적인 평가가 뒤따른다는 점이다.
---p. 6(배형민, “건축의 불안정한 경계” 일부분)
유걸의 개별 작품의 특별한 힘과 함께 그의 전체적인 작업의 흐름은 변화와 어긋남의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이것이 한국 건축계에서 그가 차지하는 특별한 자리라 하겠다. 건축가로서 그가 걸어온 여정을 볼 때, 강변교회가 매우 중요한 이정표가 된다고 생각한다. 설계 기간이 길었기 때문에 강변교회의 초기안부터 그의 작업 방식이 변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강변교회의 계획안은 구성의 기하학을 근간으로 하는 초기안에서 시작해 완전히 투명한 유리박스를 거쳐 최종안에서는 공간, 형태, 구조를 노련하게 절충하고 조율하는 변화를 볼 수 있다. 그의 건축이 지금도 계속 변화하고 있다는 인식은 한국에서 극소수의 건축가만이 가지는 특별한 힘이다. 한국에서 변화는 곧 의식을 뜻하지 않던가.
---p. 8(배형민, “건축의 불안정한 경계” 일부분)
건축가 유걸의 세계는 독특하다. 그는 대단한 것과 평범한 것 사이를 쉽게 오간다. 그는 실용주의와 그에 반하는 조형 의식 사이 또한 편안하게 오간다. 그에게 건축 구조는 이 두 가지 접점 혹은 합일점이다. 또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그에게 건축 구조는 실용주의와 조형 의식 사이, 상식과 꿈 사이의 피난처이자 서로간의 구실이라고. 이러한 면에서 그 관계는 모순이기도 하다. 하지만 커다란 갈등은 없다. ‘건축을 완벽하게 만들려는 건 잘못된 생각이다’라는 건축가 유걸의 편안한 혹은 도발적인 말이 이를 뒷받침한다. 나는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현대건축이 지니는 불편함의 근원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이것은 현대건축이 보여주는 미학적 양상 이전의 ‘태도’에 관한 문제로 원활하고 유연한 커뮤니케이션의 핵심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가 이순을 앞둔 지금까지도 꾸준하게 작업을 하며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바탕이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건축가 유걸. 그는 누구를 대변하지도 않고, 어디에 속하지도 않으며, 어떠한 사고의 일관성이나 정당성을 애써 고집하지도 않는다. 이것은 대담 내내 받은 인상이다. 이러한 사정의 연원은 아마 그가 목수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p. 139(김광수, “보통 건축과 꿈의 건축” 일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