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근대화라는 명목 아래 서구인의 사고방식, 세계관, 가치관을 배우는 데 주력해왔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지적 식민지에 살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 저자의 문제의식이 있다. 바로 서양철학의 기반 위에서 우리는 근대문명을 가장 발전한 형태로 여긴다는 사실이다. 달리 말하면 서구 근대문명 외의 다른 문명을 미개한 문명으로 치부해 버린다는 뜻이다. 그러나 저자는 단정지어 말한다. 서구 근대철학은 그리스철학의 각주에 불과할 따름이며 근대문명이란 것 역시 발전된 형태가 아니라 역사적 지평에서 나타난 여러 문명 중의 하나일 뿐이다. 근대문명이란 오히려 너무나 많은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는 문명인 것이다. 때문에 저자는 동양의 정신, 즉 사회적 정신이나 깨달음의 정신을 새로이 볼 것을 역설한다.
이처럼 서구의 과학적 사고방식을 독특한 하나의 정신으로 보면 뜻밖에 넓은 시야가 열린다. 인간 정신의 다양한 유형들을 성찰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저자는 인간 정신을 신화적 정신, 사회적 정신, 개념적 정신, 깨달음의 정신의 네 가지 유형으로 구분한다.
-믿음과 유사한 방식의 신화적인 패러다임에 기초하여 세계를 보는 신화적 정신
-사회적 통찰, 지혜가 기반이 되는 사회적 정신
-사물과 세계를 개념적으로 분석하고 논리적 과정을 통하여 진리를 발견하는 개념적 정신
-눈앞의 현상을 넘어 영적 차원이나 영원한 진리에 대한 확연한 깨달음을 얻고 그 깨달음을 통하여 세계를 다시 보는 깨달음의 정신
이 네 가지 정신이 모든 인간 정신의 근원인 것이다.
2500여 년 이전에는 신화적 정신이 지배했으며, 신화적 정신은 지금까지도 종교와 서양과학 이외의 분야에는 남아 있다. 고대 서구에서는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서양철학의 논리적 사유(개념적 정신)를 발전시켰으며, 예수의 깨달음의 정신과 개념적 정신이 합쳐져 서양중세를 지배했다. 동양정신은 사회적 정신으로서 관자와 공자가 개척하였으며, 이 사회적 정신과 석가의 깨달음의 정신이 합쳐져 동양의 중세를 이루었던 것이다. 근대는 사회적 정신, 깨달음의 정신이 배제된 채 서구고대의 개념적 정신이 재탄생한 것이다. 오늘날 세계문명은 개념적 정신이라는 편향된 정신에 기초한 문명인 것이다.
이러한 시각은 이 책의 구성에 그대로 옮겨져 있다. 이 책은 크게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1부에서는 관자와 그리스의 철학자들, 석가, 그리고 원시 형태의 정신을 고찰함으로써 사회적 정신, 개념적 정신, 깨달음의 정신, 신화적 정신의 네 가지 원류를 살피고 있다. 제2부에서는 이러한 네 가지 정신의 변형과 결합, 재창조의 모습으로 공자, 노자·장자, 묵가·법가, 예수, 혜능, 주자를 비롯해, 중세 토미즘까지를 다루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3부에서는 바로 이성의 세계로서 근대정신을 고찰하고 있는데, 콜럼버스와 레오나르도 다 빈치부터 하버마스와 푸코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정신을 일별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양으로 규정함으로써 계산적 이성의 대상으로 만드는 화폐의 세계를 심도 있게 다루고 있으며, 게오르그 짐멜이나 칼 폴라니, 케인즈, 마르크스 등 화폐세계의 대안을 제시했던 인물들에 대한 저자의 이야기는 많은 시사점을 안겨준다.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새로운 사회와 새로운 정신을 외친다. 이 책이 그 많은 외침 속에서 제 목소리를 잃지 않는 이유는 바로 넓고 공평한 시야에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입장에서 한 가지만을 외쳤다면 이 책은 지금의 사회를 이끌어 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정신 구석구석을 외면하지 않는다. 우리는 과학적 이성을 믿는 동시에 예수나 부처도 믿는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하여 공자와 예수, 석가와 아리스토텔레스 등 한자리에서 만나기 쉽지 않은 선각자들의 정신을 비교하고 판단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여러 선각자들의 정신이 우리 정신을 채우고 있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이처럼 우리 정신 구석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것들의 역사를 만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역사의 성찰에서 새로운 정신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창조력을 무엇보다 절실히 요구하고 있는 요즘 사고를 유연하고 폭 넓게 하는 데에는 반드시 2500년에 걸친 인간 정신의 탐구가 뒤따라야 할 것이며 그러한 의미에서 이 책은 흥미롭고 새로운 시도로 읽힐 수 있음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