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객석에서 누군가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몽희는 엄마라는 걸 직감했다. 엄마는 책을 좋아하고 의젓하던 딸이 자퇴서를 내자 충격을 받아 우울증까지 앓았다. 그리고 딸의 자퇴를 친척이나 친구들이 알게 될까 봐 전화선까지 뽑아 놓았다.
“네가 내 인생을 구렁텅이에 빠뜨릴 줄은 정말 몰랐다.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혀도 유분수지. 누굴 탓하겠냐. 널 너무 방치해서 키운 내가 잘못이지…….”
엄마는 몽희와 눈만 마주치면 한숨을 푹푹 쉬며 신세 한탄을 했다. 분노 조절이 안 되면 전화기며 주전자며 닥치는 대로 집어 던졌다.
--- pp.15~16
아이가 까르르 웃자 엄마도 소리 높여 웃었다. 은규에게는 한 번도 보여 주지 않던 모습이었다. 늦게 공항에 나온 아빠도 마찬가지였다.
“할아버지가 잘 하시는 거다. 남들은 유학 가고 싶어도 못 가잖니? 넌 돈 걱정 없이 공부만 하면 되잖아. 기회라고 생각해. 어차피 아빠도 널 이 좁은 땅덩어리에서만 키우고 싶진 않았다.”
아빠는 어깨에 힘을 주며 너스레를 떨었다. 재혼하자마자 자식을 헌신짝 버리듯 할아버지에게 떠맡긴 아빠다웠다. 은규는 그날 분명히 보았다. 아빠의 얼굴에 번지던 해방감을
--- p. 35
몽희는 자신이 실험실의 흰쥐 같다는 생각을 했다. 새로 생긴 대안학교의 실험용 쥐. 너무 비약하는 건가 싶다가도 모든 일에 회의가 들었다. 또다시 어디로 갈 것인가. 그 질문을 할 때마다 벽 앞에 선 것처럼 암담했다. 그나마 은규와 소통하지 않았다면 벌써 무슨 일인가 벌였을 것이다.
“제가 대학을 갈지 안 갈지…… 그건 아직 모르겠지만요. 최소한 고등학교 졸업장이라도 있어야 뭐라도 할 수 있는 세상이잖아요. 우린 뭐예요? 이도 저도 아닌 어정쩡한 자리가 불안해요.”
--- p. 67
아영은 저녁마다 마을 이장의 집을 찾았다.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이장님이 탄원서를 써 주시면 태수가 감옥에 안 간대요. 원래 속은 정말 착한 애예요. 제가 보장할게요. 이장님, 꼭 좀 부탁드려요.”
아영은 태수를 구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이장이 귀찮다는 듯 일어나 밖으로 나가면 졸졸 따라나섰다. 마을 회관에 장기를 두러 가도 그 옆에 쭈그리고 앉아 틈만 나면 매달렸다.
“교장 선생이 와서 조르더니, 이제 학생들까지 와서 진드기처럼 들러붙으니 뭔 일을 할 수가 있나.”
--- p. 146
몽희가 떠난 뒤 은규는 깊은 슬럼프에 빠졌다. 어디를 가나 몽희의 체취가 느껴졌다. 텅 빈 자리를 보면 가슴이 서늘해지면서 아파 왔다. 게시판에 붙은 자작시를 봐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풀만 먹으면 초식동물 되겠다, 그치?”
식당에서도 몽희가 농담처럼 하던 말이 떠오르면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 하지만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 휴대 전화를 들었다가도 바로 다시 놓곤 했다. 마지막에 한 약속 때문이었다. 몽희 없는 학교가 은규에게는 사막처럼 쓸쓸하게 느껴졌다. 무엇을 해도 재미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약속 때문에 마냥 넋을 놓고 있을 수만은 없다고 생각했다. 아프리카에서 뜨거운 태양과 사투를 벌이고 있을 몽희를 생각하면 정신이 바짝 들었다
--- p.1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