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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인의 사정

히로인의 사정

정경윤 | 가하 | 2016년 07월 04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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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6년 07월 04일
쪽수, 무게, 크기 448쪽 | 570g | 148*200*21mm
ISBN13 9791130007496
ISBN10 11300074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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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1명)

책 속으로 책속으로 보이기/감추기

“지구가 아예 멸망해버리면 내가 망한 것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 되겠지?”
- 야! 듣고 있어? 돈 갚으라고 이 X년아!

[조금 전 미 항공우주국에서 발표한 바에 따르면, 이 괴 비행체가 인공위성과의 충돌로 비행 능력을 상실했다는 가정 하에 낙하 위치는 아마도 우리나라와 일본 사이, 즉 동해 해상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문제는 그 오차 범위가 상당하다는 것인데요. 만약을 대비해 국민 여러분은 이 시각 이후로 절대 외출을 하지 마시고…….]

휴대전화와 텔레비전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목소리들을 안주 삼아 두 병째 소주 병나발을 불기 시작한 나나는 창문으로 다가가 밖을 내다보며 절망 섞인 어조로 울부짖기 시작했다.
“어디 나만 망하란 법 있냐? 나만 망하란 법 있냐고오오, 아앙? 망해! 망해! 지구 따위 아주 다 쫄딱 망해버리란 말이야아아아!”
그때 동쪽 먼 하늘에서 반짝, 아주 작은 빛이 나타났다.
술에 잔뜩 취한 데다 꺼이꺼이 우느라 그 빛을 미처 발견하지 못한 나나는 소주병을 들고 휘청휘청 방을 가로지르더니 달팽이 케이지 앞에 쪼그려 앉아 미친 사람처럼 웃으며 노래와 율동을 시작했다.
“우주선에서어어 외계인이 내려와아 하! 는! 말! 디비디비딥!”
소주병을 든 손으로 힘겹게 가위 액션을 취했건만 달팽이는 여전히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하, 하하……. 흑! 으흐흑! 에라이, 흐아앙! 흐흐흐, 으아하하하하!”
꺼이꺼이 울다 미친 듯이 웃다, 마침내 방바닥에 널브러진 나나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계속해서 주문처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제길. 망해라, 망해. 다 망해버리라고…….”

그리고 다음날 아침.
“이, 이, 이…….”
말을 잇지 못하고 줄곧 더듬거리고만 있던 나나는 본인 소유의 가게를 멍하니 쳐다보다 이내 머리를 쥐어뜯으며 소리쳤다.
“이게 뭐어야아아아아아아! 우, 우웨엑.”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던 중 어제 먹은 술이 신선한 위액과 함께 식도로 역류했다.
돌아가신 모친에게서 물려받은 고물 소형차의 보닛을 붙잡고 한참이나 숨을 고른 그녀는 ‘이건 꿈이다.’를 세 번 되뇐 후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다시 좌절했다.
모든 것은 다 현실이었다.
허허벌판 위에 생뚱맞게 자리한 나나의 커피전문점 ‘로또’의 전면 창이 밤사이 쫄딱 멸망해 있었다.
여기저기 어지럽게 널려 있는 유리 파편과 상호 ‘로또’ 중 너덜너덜한 유리창에 남아 있는 글자 ‘또’를 보는 나나의 멘탈도 그 자리에서 함께 멸망했다.
“으아아! 또! 또! 또오오오! 도대체 내 인생은 왜 이 모양인 거지? 하는 일마다 왜 자꾸 꼬이는 거냐고! 이럴 줄 알았으면 지난주에 세콤이랑 화재보험 해지하는 게 아니었는데! 아아악!”
아담한 커피숍 앞, 중형차 세 대 정도가 나란히 주차할 수 있는 주차장에는 지름 1미터 정도의 움푹 팬 자국이 나 있었다. 그리고 거기서 뭔가가 튕겨 들어가기라도 한 듯 가게 유리창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제기랄. 망하라는 건 안 망하고 왜 나만!”
가게 주위를 돌며 유심히 주변을 살핀 그녀는 도둑이 들었다는 것을 확신한 후 악에 받친 표정으로 이를 악물고 중얼거렸다.
“벼룩의 간을 내 먹지, 감히 망해가는 커피숍을 털어? 이 도둑노무시끼! 어떻게든 잡아서 아조 듁여버리가써!”
가게 안엔 적지 않은 금액의 잔돈과 전시용으로 구입했던 고가의 장식품들, 그리고 아직 할부도 다 끝나지 않은 에스프레소머신이 있었다.
참담한 기분을 금할 길 없던 나나는 애써 울음을 삼키며 문을 열고 커피숍 안으로 들어섰다.
깨진 창문 안쪽엔 바깥과 마찬가지로 날카로운 유리조각들이 흩어져 있었다.
원목 테이블과 의자가 엉망으로 쓰러져 있는 가운데 나무 마룻바닥에 뭔가가 질질 끌린 자국을 본 나나는 절규했다.
“아악! 긁혔다! 긁혔어! 저 바닥 공사하는 데 내가 돈을 얼마나 때려부었는데에에!”
속으로 울컥 피를 토한 나나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울상을 지었다.
“아아,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람.”
한탄은 나중 일이고 일단은 피해 파악이 우선이었다. 나나는 애써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장식품들은 다행히도 모두 제자리에 놓여 있었다.
에스프레소머신도 어느 한 군데 상한 곳 없이 자리를 잘 지키고 있는 것을 확인한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계산대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잔돈만 쓸어간 건가?”
금고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계산대 쪽으로 다가가던 그녀의 표정이 묘해졌다.
“어……?”
계산대 밖으로 기다란 무언가가 나와 있었다. 황금빛 갑옷 같은 것으로 둘러싸인, 분명 사람의 다리 한 쌍이었다.
도둑인가? 아니, 도둑이라면 벌써 도망치고도 남았을 테고, 그게 아니라면 깨진 창문을 통해 들어온 노숙자? 노숙자라고 생각하기엔 또 금빛 갑옷이 설명 안 된다. 아니, 아니, 잠깐. 애초에 금빛 갑옷이란 게 아무나 입고 거리를 활보할 수 있는 패션아이템인가?
병든 자다. 어딘가 살짝 맛이 간, 위험한 놈이 틀림없었다.
나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원목 스툴을 집어 들고 살금살금 계산대로 다가갔다. 상황이 안 좋으면 그대로 휘둘러 버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세상에나……!”
계산대 안쪽, 손님이 없어 늘 지루하게 앉아 하루를 보내던 하이체어 밑을 내려다본 나나는 눈이 부신 나머지 저도 모르게 움찔하고 말았다.
아름답고 긴 금발, 흰 피부에 짙은 갈색 눈썹, 길고 숱 많은 속눈썹과 눈을 감았음에도 선명한 쌍꺼풀을 본 그녀의 입술 사이로 저도 모르게 경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우와아아.”
어디 그뿐이랴. 시원하게 쭉 뻗은 콧날 아래 남자답게 두툼한 입술은 더없이 섹시한 선을 그리고 있었다.
눈길을 단번에 뺏어갈 정도로 뚜렷한 이목구비로도 모자라, 남자는 감히 범접할 수 없을 기묘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부드러운 카리스마, 아니, 그런 차원을 이미 넘어선 어떤 것이었다. 뭐랄까, 태생부터 고귀한 아우라?
외국인이라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2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그 남자는 나나가 태어난 이래로 단 한 번도 마주친 적 없을 정도로 대단한 미남이었다.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멍하니 남자의 외모를 구경하고만 있던 중, 그녀는 뒤늦게 겁을 집어 먹고서 의자를 내려놓았다.
전신에 황금 갑옷을 두른 채 길게 드러누워 있는 남자는 눈을 감은 채 줄곧 미동도 없었다.
“아니, 잠깐. 이거 혹시……?”
너무 잠잠하다. 죽은 거 아닌가?
만약 죽었다면!
나나의 눈앞에 생생한 파노라마가 펼쳐졌다.
경찰들이 모여든다. 철컹철컹. 수갑을 찬 채 유치장에 갇혀 식사는 분명 곰탕이나 설렁탕을 먹게 되겠지. 그리고 어두운 취조실, 네모진 책상 너머에 앉은 무시무시한 인상의 형사가 소리친다. ‘네가 죽였지?’ ‘아니에요! 제가 아니에요! 아침에 출근해 보니 이미 죽어 있었어요!’ ‘거짓말 마! 네가 죽였잖아!’ ‘아니라니까요! 전 정말 결백해요!’ 손목에 찬 수갑의 섬뜩한 무게, 그리고 눈앞에서 굳게 닫히는 감옥 문, 마지막으로 ‘피고 신나나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땅땅땅!
“으아아아앙! 내 인생은 도대체 왜 이 모양인 거지? 으흑! 이봐요! 일어나요! 죽으면 안 돼요! 죽더라도 여기서 죽으면 안 된다고! 왜 하필 여기야, 왜애애애애!”
나나는 오열하며 정체불명 남자의 몸을 붙잡고 절박하게 흔들어댔다.
바로 그때.
“으음…….”
의문의 남자가 가느다란 신음소리를 내며 살며시 눈을 떴다.
남자가 정신을 차리는 것을 본 나나는 반색을 하며 달려들어 쉴 새 없이 질문을 퍼부어댔다.
“이보세요, 정신이 좀 들어요?”
“음?”
“아픈 데 없어요? 꽤 오래 기절해 있었던 것 같은데, 괜찮으세요?”
“기절한 게 아니다. 피곤해서 잠깐 눈을 붙인 것뿐이다.”
아아. 아이고, 이분이 많이 피곤하셨구나. 너무 많이 피곤하셔서 남의 가게 창문을 깨고 들어와 눈을 붙이셨구나.
일단은 누군가를 불러야할 것 같은데, 경찰이냐 병원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심각하게 고민하는 나나의 얼굴을 올려다보던 남자가 대뜸 물었다.
“이름이?”
“엥……? 저, 저요?”
돌아가신 나나의 부친은 무명 가수였다. 그는 기념비적인 첫 앨범, ‘신나나 안나나, 다 함께 트로트!’가 출시될 무렵 태어난 자신의 사랑스러운 딸에게 앨범 타이틀을 이름으로 붙여 주었다.
평생 신나라고 지어준 이름이었겠지만, 나나의 입장에선 태어나는 순간부터 이미 안 신나는 인생이 시작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나나……인데요. 신, 나나…….”
이름이 콤플렉스였던 그녀가 성과 이름 사이에 애써 간격을 벌리며 대답하자 남자는 가슴이 녹아내릴 정도로 매력적인 미소를 짓더니 중얼거렸다.
“호오. 아담한 눈에 두툼한 눈두덩, 뭉툭한 콧날, 게다가 이마에 뾰루지까지 있다니…….”
뭐야, 이 인간, 지금 초면에 나랑 개파이트 붙자는 거? 나나의 미간이 형편없이 짜부라졌다.
“과연, 그 발랄한 이름만큼이나 천하의 미색(美色)이로다.”
남자를 내려다보는 나나의 얼굴에 시커먼 그늘이 졌다.
경찰 아닌 것 같다. 병원 쪽 같다.
나나는 이 정상 범주를 한참 벗어난 듯 보이는 남자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도움이 필요하신 것 같네요. 처음 보는 분 같은데 누구세요? 어쩌다 여기까지 오신 거죠? 어디서 왔어요?”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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