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저녁, 살구나무에 기대앉은 나.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연방 훔쳐 내 본다. 그때 어둠을 밟고 오는 누군가가 보였다.
“얘야, 가슴을 때리는 슬픔이 아니라면 함부로 눈물을 보이는 게 아니란다.”
낯선 아저씨의 말에 울음을 그대로 삼켜 버렸다. 그 아저씨는 한쪽 어깨에 자동차 바퀴를 걸머진 채로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방 안에서 들려 오는 할머니의 푸념 소리.
“저 맘 아픈 거야 알고도 남지. 아무리 그래도 남아 있는 사람을 생각해야지. 에구, 무정한 것!”
할머니 말에 의하면 엄마는 내가 네 살 되던 해에 집을 나갔다고 했다. 물놀이 사고로 나보다 두 살 위인 오빠와 아빠를 한꺼번에 잃고 엄마는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한다.
다음 날, 학교에서는 어제 내가 보았던 낯선 아저씨에 대한 이야기가 한창이었다. ‘타이어맨’이라 불리는…….
아이들은 타이어맨이 월남전에 참전한 동안 아내가 죽고, 남은 두 아이는 해외로 입양되어 미친 사람이 되어 버렸다고 했다. 나는 정신이 멍했다. 아빠와 오빠를 한꺼번에 잃고 미칠 수밖에 없었던 엄마처럼, 타이어맨 아저씨도 그랬을 거라는 생각에……. 그리고 어제 들었던 ‘가슴을 때리는 슬픔’을 알 것도 같았다.
새끼돼지 구경을 갔던 영옥이네를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데, 타이어맨 아저씨와 다시 마주쳤다. 아저씨는 자동차 바퀴를 걸머진 이유에 대해 자신도 바퀴가 되었으면 싶기 때문이라고 했다. 바퀴가 되어 이 세상 구석구석을 굴러가 보고 싶다고…….
“누구,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으세요?”
난 아저씨 아이들 이야기를 돌려 물었지만 아저씨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헤어진 후, 타이어맨 아저씨는 내 기억 속에서 조금씩 조금씩 사라져 갔다.
갑작스레 비가 내린 어느 날. 친구들과의 일상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던 내게 또 다시 나타난 타이어맨 아저씨가 무척 반가웠다. 나는 집 나간 엄마의 이야기를, 아저씨는 참혹한 월남전의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서로를 이해했다. 다들 미친 사람이라고 하지만, 나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그새 정이 들었는지 아저씨와의 헤어짐이 아쉬웠다.
이후로, 타이어맨 아저씨는 그 어디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정신병원에 보내졌다거나, 간첩이 틀림없어 경찰서로 붙잡혀 갔다는 소문만이 들려 왔다.
그 무렵, 할머니는 외가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 놓으셨다. 지금껏 엄마가 고아인 줄로만 알고 있던 나는 이내 어안이 벙벙해지고 말았다. 오랫동안 숨겨 놨던 비밀을 듣고는, 외갓집으로 어설프게나마 편지를 적어 내려갔다.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정다래라고 해요…….”
영옥이네서 벌어진 잔치 와중에 찬웅이가 헐떡이며 달려 왔다.
“다래야, 너희 집에 손님 오셨어. 어서 가 봐. 빨리!”
편지의 효과가 있었던 걸까. 손님은 바로 외할머니와 외삼촌이었다. 외할머니는 날 두 팔로 꼭 안은 채 눈물을 흘리셨다. 외갓집에 가는 날, 우연히 만난 타이어맨 아저씨는 자동차 바퀴를 벗어 버린 채 말끔한 양복 차림이었다.
“해외로 입양되었던 아들이 친부모를 찾으러 왔다는 소식을 받고 가는 중이란다.”
나는 너무 기뻤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지금 이 순간부터 내 마음속에 둥근 바퀴 하나를 품고 살아가리라고. 타이어맨 아저씨의 바퀴가 아저씨와 아들을 만나게 해 주었듯이, 내 마음의 바퀴 역시 나를 엄마에게로 데려다 줄 것이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