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자기 존재의 정당성을 얻고자 한다. 또 자신의 우월성을 확인하고 싶어 한다. 사람만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들은 무엇이나 그렇지 않은가? 스스로 그렇게 느끼고 생각하기를 원한다. 하지만 눈앞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자신이 원하는 기준이나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
자, 이때 비교의 원천이 되는 기준과 수준은 누구의 모습인가? 이 또한 자신의 모습이다. 자신이 떠올리는 자신의 모습이다. 스스로를 뛰어나고 우월한 모습으로 느끼고 생각하는 것이다. 실제 현실이 어떻든 내면에서는 그게 ‘사실’이다.
그런 나는, 아직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현실의 내 모습에 실망과 한계, 부족감과 불완전함을 느낀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자신을 보완하고 보호하려 한다. 자신은 그렇게 열등하고 못나면 안 되겠기에.
이제 우리의 마음은 아주 교묘한 전략을 세우고 실행한다. 열등하고 못난 자기를 진짜(?) 자기와 분리시키고, 이제 우월한 자기가 되어 못난 자기를 대상화하고 멸시하는 것이다. 이로써 아주 이상한 자기 구원이 이루어진다. 자기를 희생함으로써 자기가 구원받는 것이다.
---「1장, 자기 사랑은 어떻게 자기 미움이 되었나」중에서
드물기는 하지만 외부의 혐오나 비난을 막기 위해 자기 미움이 동원되는 경우도 있다. 말 그대로 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타인의 혐오와 미움을 사전에 방어하는 것이다.
어떻게 자학이 타인의 혐오를 사전에 방어한다는 것일까? 여기에는 일종의 심리전략적 착오가 있다. 즉 그런다고 방어되는 게 아닌데도 그렇게 믿는 것이다.
차근차근 살펴보자. 만약 우리가 뭔가 잘못했을 때 취할 바람직한 행위는 무엇일까? 먼저 잘못을 인정하고 자기반성을 하거나 상대에게 사과하거나 용서를 구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이가 뭔가 잘못했는데 부모가 그것을 알게 된다고 가정해보자. 그럴 때 아이가 먼저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면,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부모는 아이를 기특하게 여기며 간단하게 주의를 주고 용서해준다.
자신에 대한 미움의 심리에도 이런 기제가 나타날 때가 있다. 즉 뭔가 내가 부족하고, 모자라고, 불만족스럽다. 그런데 이것을 타인들도 알고 있거나 알게 될 것 같다(물론 이 자체가 과도한 걱정인 경우도 많다). 그들의 부정적 반응을 나는 감당할 수 없다. 그런 상황이 발생한다는 것 자체를 허락할 수 없다. 그래서 그들이 눈치 채기 전에 내가 나를 야단친다. 마치 아이가 먼저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하듯이 말이다. 물론 자기 미움에서는 이 과정이 다분히 무의식적으로 일어난다.
문제는, 다른 자기 미움의 기제들처럼 이 또한 ‘효과 없는 전략’이라는 것이다. 행하는 나는 효과를 바라지만 실제로는 아니다. 하긴, 이런 방법이 효과 없다는 것을 선명히 알았더라면 미리 자학하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무의식적으로 효과를 믿는 한 힘들어하면서도 자동으로 반복되게 된다.
사전 자학이 행해지는 또 다른 기제도 있다. 일종의 ‘자기단련’이라 할 수 있는데, 남들이 나를 미워하거나 싫어하게 되기 전에 내가 먼저 스스로를 미워해서 미리 단련시켜 버리는 것이다(물론 이 ‘단련’은 묘하게 뒤틀린 착각이며 무의식적인 측면이 있다). 그래서 후에 남들이 나를 실제 미워하게 되더라도 내가 이미 나를 미워하고 있기 때문에 충격이 줄어든다. 시쳇말로 하면 ‘이미 버린 몸, 이미 포기한 몸’이라고나 할까.
---「1장, 자기 사랑은 어떻게 자기 미움이 되었나」중에서
우리가 내 잘못, 내 실수, 내 무능, 내 착오라 여기는 많은 부분이 실제로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 만약 실제로 그런 부분이 있다면 나 스스로 외면하거나 피하지 말고 객관적으로 잘 파악하고 챙겨서 차후에 되풀이되지 않게 하자. 지혜롭게 그렇게 하면 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의외로 많은 일이 ‘그냥’ 일어난다. 즉 ‘내 잘못’이 아니다. 우리는 그 ‘그냥’을 눈치 채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 맞지도 않는 이유와 근거를 억지로 만들지 않고 말이다.
예를 들어보자. 깜깜한 길을 걸어가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그 이유는 하필 ‘그냥’ 거기에 돌부리가 있어서다. ‘내 잘못’이 아니다. 누구라도 깜깜한 그 구간을 지나가다 그 돌부리에 걸리면 속절없이 넘어질 수밖에 없다. 혹은 버스에 탔는데 뒷좌석에 앉은 사람이 심하게 기침을 한다. 결국 나도 감기가 옮았다. ‘내 잘못’이 아니다. ‘그냥’ 감기 걸린 사람이 근처에 있어서 그런 것이다. 낯선 외지 마을을 걸어가는데 갑자기 덤불에서 미친개가 뛰쳐나와 내 다리를 물었다. 이 경우도 ‘내 잘못’은 아니다. 알고 보니 그 동네 길을 가던 이들이 여럿 물렸다고 한다.
우리가 경험하는 일상적이거나 복잡한 일들도 엄밀히 보면 돌부리, 감기, 미친개와 별반 다르지 않은 경우가 많다. 그런데도 우리는 ‘없는 내 잘못’을 만들어내 자책과 죄책감에 스스로 빠져 허우적대곤 한다.
그러니 혹시라도 ‘좌뇌의 강박’에 시달리고 속아왔던 부분이 있다면 앞으로 눈치 채고 그 의미 없는 수다를 멈추자. 내 잘못이 아닌데도 스스로 괴롭히고 힘들게 하지는 말자. 이것이 더 당당하고 떳떳하게 존재하는 방법이다.
---「1장, 자기 사랑은 어떻게 자기 미움이 되었나」중에서
예를 하나 들어보자. 누가 굉장히 비겁해 보이는데 나는 그 비겁도 싫고 비겁한 그 사람도 싫다. 그러나 (그 사람이 실제 비겁한지 아닌지와 별개로) 사실은 그러한 ‘비겁의 요소’가 내 안에 있고, 나는 그 요소를 인정하거나 받아들일 수 없어 그것을 억압하거나 회피하는 것이다. 그 요소도 내 내부의 혹은 인간의 정상적인 일부로 엄연히 존재하는데 나는 그것을 인정할 수 없어서 ‘그림자’로 억압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더 중요한 것은, 그걸 ‘비겁함’이라고 규정한 것은 오해다. 실제로는 비겁함이 아니라 단순한 ‘조심성’일 수도 있다. 아니면 나름의 ‘합리적 반응’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것의 존재를 인정하거나 허용하지 못하는 바람에 그림자로 여기며 억압, 회피, 무시하는 것이다. 그냥 쿨하게 인정해버리면 아무것도 아닌데.
그런 상태에서 상대방에게 그런 요소가 보이는 것 같으면, 실제 그 사람이 어떤지와 상관없이 ‘저 사람은 비겁하다. 나는 그게 싫다’고 느끼고 생각해버린다. 물론 그 사람이 실제로 비겁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아니라 나와 나의 내면이다.
성적으로 보수적인 사람이 성적으로 자유로운 사람에게 거부감이나 혐오감을 느끼는 것도 같은 기제다. 자기 내면에 있는 ‘성적 자유에 대한 추구나 욕망’을 인정하지 못한 채 그러한 내적 긴장을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느끼며 살다가 외부에 투사한다. 미움이나 분노 혹은 혐오로 그 대상을 ‘징벌’함으로써 자신을 면죄하는 것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미봉책일 뿐 해결된 건 전혀 없으며, 차후에도 계속 반복된다.
---「2장, 자기 미움은 어떻게 그들을 향한 혐오가 되는가」중에서
선택과 결정만이 전부는 아니다. 오히려 결정은 시작에 불과하다. 결정한 후에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리고 이제 솔직하게 보아야 한다. 우리는 사실 결정을 두려워하는 게 아니다. 즉 ‘결정장애’가 아니다. 우리가 정말 두려워하는 것은 결정 후의 과정이다.
우리는 자꾸만 ‘좋은 결정 후에 있을 좀 더 좋은 과정, 좀 더 편한 과정’ 등을 꿈꾼다. 그러나 어떤 결정을 하든 ‘후 과정’은 동일하다. 모든 내용과 흐름이 똑같다는 의미가 아니라, 체험과 경험으로서 전체적인 흐름이 같다는 말이다. 결정을 망설이거나, 미루거나, 하지 않을 정도로 그렇게 본질적인 차이가 있는 게 아니다.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무심할 수 있는 차이다. 그러므로 애초에 ‘결정 후의 과정은 모두 동일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가장 좋다.
가장 강력한 방법은 바로 ‘기꺼이 경험해주기’다.
즉 A를 선택했을 때의 과정이든 B나 C를 선택했을 때의 과정이든 크게 구분하지 않고 ‘모두 기꺼이 경험해주겠다’는 마음이다. 쉽다는 말은 물론 아니다. 하지만 못할 것도 없다. 그리고 사실 다른 선택지도 없다. 결정한 후에 ‘경험하기 싫어~’라고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경험을 망설이는 것도 그렇다. 선택과 결정을 미루거나 망설인다고 해서 특별한 이득도 없고, 오히려 실제로는 겪을 필요가 없는 어려움이나 손해를 겪기도 한다. 그러니 ‘그 순간에 필요한 결정 내리기’를 왜 굳이 피할 것인가.
---「3장, ‘나’는 내용으로 결정되는 존재가 아니다」중에서
어떤 성격이든 고유하며 저마다 강점이 있으므로, 적어도 성격에 관한 한 약점으로 보고 보완하려 하지 말고 그 자체가 강점이 될 수 있다 여기고 그것을 살리는 쪽으로 가야 한다. 생각부터 그렇게 가져야 한다.
예를 들어,
‘예민하거나 민감한’ 것이 아니라 ‘섬세한’ 것이다.
‘거친’ 것이 아니라 ‘대범한’ 것이다.
‘허둥대는’ 것이 아니라 ‘민첩한’ 것이다.
‘소심한’ 것이 아니라 ‘신중한’ 것이다.
‘잘난 척하는’ 것이 아니라 ‘건강한 자존감이 높은’ 것이다.
‘따지는’ 것이 아니라 ‘분석적인’ 것이다.
‘유약한’ 것이 아니라 ‘우호적이고 따뜻한’ 것이다.
‘까부는’ 것이 아니라 ‘활발하고 표현력이 뛰어난’ 것이다.
‘숫기 없는’ 것이 아니라 ‘사색적인’ 것이다.
‘깐깐한’ 것이 아니라 ‘정확한’ 것이다.
‘차가운’ 것이 아니라 ‘평정한’ 것이다.
‘무정한’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것이다.
왜 약점의 보완이 아닌 강점으로의 강화로 가야 하냐면, 본래 성격에는 약점 같은 건 없기 때문이다. 오직 당사자가 잘 이용하느냐 아니냐만 있을 뿐이다. 어떤 성격이든 그 성격의 요소를 잘 사용하면 강점이 된다. 잘 사용하지 못하는 것을 두고 괜히 약점이니 뭐니 하면서 붙잡을 필요 없다. 그래봐야 시간 낭비다. 그냥 그 특질을 본래의 장점으로 전환시키면 된다.
---「3장, ‘나’는 내용으로 결정되는 존재가 아니다」중에서
기억하기 싫은 느낌이나 생각이 자꾸 떠오르는 경험은 무척 힘들다. 며칠 전에 재수없게 굴던 누구누구의 말과 행동이 자꾸만 떠오른다. 그때마다 모욕감, 분노가 고스란히 반복된다. ‘아, 그때 내가 이렇게 화내거나 반박해줬어야 했는데…’ 혹은 ‘별것도 아닌 게 나를 무시하다니…’, ‘그때 이렇게 했어야 하는데….’ 잊힐 만하면 또 떠오르고, 잊힐 만하면 또 떠오른다. 심지어 어떤 기억은 몇 달이 지나도, 몇 년이 지나도 집요하게 들러붙어 사라지지 않는다.
현재의 문제나 미래에 대한 걱정도 우리를 종종 찾아오지만, 특히 강하게 반복되는 건 아무래도 ‘과거의 것’들이다. 과거의 부정적 경험들, 그때 느꼈던 감정과 생각은 현재에 영향을 미친다. 한창 기분 좋다가도 불현듯 떠올라 기분을 망치고, 자신감을 앗아가고, 분위기를 가라앉힌다. 이미 지나간 것들, 죽은 것들인데도 말이다.
이 느낌과 생각들은 우리의 통제를 벗어나 있는 듯하다. 내가 느끼거나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마음대로 내 안에서 튀어오르는 것 같다. 이것들에게서 자유로워질 방법은 없을까? 아무 때고 원치 않는 느낌과 생각에 계속 시달리기만 해야 할까?
당연히 아니다. 방법이 있다.
어떤 습관이든 그것을 바꾸려면 두 가지 과정이 필수다. 하나는 ‘눈치 채기(통찰)’이고 또 하나는 ‘구체적 방법’이다. 기존의 잘못된 부분을 눈치 채고, 구체적 방법을 사용해 바꾸는 것이다.
---「4장, 상처, 겪지 않는 게 아니라 별것 아니게 되는 것」중에서
관계에서 ‘의존’은 결코 일방적이지 않다. 양쪽 모두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의존적 관계를 가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의존하는 측은 주로 심리적 의존과 삶에서의 책임전가, 그리고 의존받는 이는 존재감 인정과 고양되는 자존감 등이 주 이익이다. 즉 진정한 사랑이 ‘상대방이 잘되도록 서로가 서로를 기꺼이 내어주는 것’이라면, 의존은 ‘나의 잘됨을 위해 상대방을 이용하는 메커니즘’이라는 뜻이다. 이 때문에 관계가 지속될수록 서로에게 이익이 되기보다는 양측이 모두 희생되고 고통받게 되는 구조다. 때로 겉으로는 화려하고 멋있는 관계로 보인다 할지라도, 실제 각자의 내면은 그 반대로 가게 된다. 그러다 결국 파국을 맞으면 비극적으로 끝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본래 누군가를 일방적으로 의존하거나 의존받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서로 동등하게, 수평적으로, 편안하게 사랑을 나누는 존재이지 어느 한쪽이 다른 쪽보다 더 높아지거나 낮아지며 그에 수반된 수직적 관계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관계는 왜곡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선 나의 내부에서, 기존의 의존이 아니라 성숙한 상호 나눔을 시도해보자. 의존을 하든 의존을 받든 ‘의존 문제’가 생긴다는 것은 아직 내가 한 인간으로서 건강하고 성숙하게 홀로 서지 못함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이 문제를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 외부적으로 떠날지 말지, 헤어질지 말지는 그다음 문제다.
---「5장, 관계의 주인공을 꿈꾸는 이들에게」중에서
연인이나 부부는 별개인 둘이 아니라 ‘극성이 둘인 새로운 하나’다. 한 가족에 엄마, 아빠, 아이들이 있을 때 그들은 별개인 여럿이 아니라 ‘극성이 여럿인 새로운 하나’다. 여러 사람이 연관된 그룹이 있을 때 그들은 별개의 사람들이 아니라 ‘극성이 그만큼인 새로운 하나’다.
둘이지만 하나이고, 하나이지만 둘이다. 완전히 갈라진 둘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획일화된 하나도 아니다. ‘극성이 여럿인 새로운 하나’다. 연인도, 부부도, 가족도, 그룹도. 그러면 그 관계 혹은 집단의 궁극의 목표는 개별체인 ‘나’의 행복이 아니라 ‘새로운 하나’의 행복이 된다.
이 점을 무시하고 여전히 완전히 분리된 별개로 착각한 채 각각의 입장, 관점, 행복만 고집하면 그 새로운 하나는 고통스러워질 뿐이다. 많은 연인, 부부, 가족이 행복하기를 원하지만 결국 누구도 행복하지 못하게 되는 이유다. 엄연히 존재하는 ‘새로운 하나’의 행복을 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전히 따로인 극성만을 고려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각 극성(개인)의 입장이나 행복을 고려하지 않고 전체만 생각해도 문제가 발생한다. 전체는 각 극성으로 구성돼 있는데 마치 극성이 없는 양하기 때문이다. ‘극성이 무시된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극성은 엄연히 계속 존재한다. 그러므로 고려해야만 한다.
개인주의도, 전체주의도 결코 답이 되지 못한다. ‘극성이 N개인 새로운 하나’의 관점으로 접근해야 한다.
만약 연인, 부부, 가족, 구성원 간의 문제가 잘 해결되지 않는다면 상황과 필요에 따라 때로는 극성을, 때로는 하나를, 때로는 두 가지 측면을 동시에 고려하는 방법과 해결책을 유동적이고 능동적이고 지혜롭게 선택할 필요가 있다.
---「5장, 관계의 주인공을 꿈꾸는 이들에게」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