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신탁통치 찬반 문제는 지식인들끼리의 관념적인 문제였던 반면, 위조지폐 문제는 전 국민을 금방 빨아들여 흥분시키는, 무섭도록 폭발적인 문제였다. 은행에서 100원짜리 지폐 수취를 거부하는 사태가 발생하는 가운데 공산당은 불법 단체로 낙인찍혔다. 주범 박낙종과 이관술은 종신형에 처해지고(한국전쟁 중 처형), 조선공산당 당수 박헌영은 북으로 도망갔다. 『해방일보』는 매각되어 오늘날 『경향신문』으로 전환되었다. 이것이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의 전말이다. 해방 직후 순진했던 남조선은 소공동 74번지(오늘날 조선호텔 앞) 지하에서 벌어진 위조지폐 사건을 계기로 순식간에 반공 사회가 되었다. 돈의 타락은 자본주의를 붕괴시키지만, 그 실패는 공산주의를 추방시킨 것이다. 그런 점에서 돈의 ‘짝퉁’은 그 어떤 ‘짝퉁’보다도 위태롭다. 원래 ‘돈의 타락’은 위조지폐를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레닌이 말한 돈의 타락이란, 진짜 돈의 범람이었다. 레닌은 인플레이션이 극심해지면 자본주의가 붕괴된다고 믿었다. 즉, 무능한 중앙은행에 의한 화폐 남발이 화폐 불신을 초래해서 자본주의의 씨앗인 화폐를 사라지게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2 위폐 사건을 계기로 반공 사회가 된 한국」중에서
중국인들은 금융기관을 ‘전장錢莊’ 즉, ‘ 돈錢이 모인莊 곳’이라고 불렀고, 일본인들은 ‘료가에兩替’ 즉, ‘돈兩을바꾸는替곳’이라고 불렀다. 중국은 국내금융(여수신)에, 일본은 국제금융(환전)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그것이 중국과 일본의 차이였다. 차이는 그뿐만이 아니다. 중국의 ‘짱께’들은 회표會票를 발행하고, 조선의 개성상인들은 어음於音을 발행했다. 중국, 조선 모두 개체로서 금융기관과 결제 수단은 발달했으나, 시스템을 보는 눈은 없었다. 그런데 일본은 미국의 은행법을 보자마자 ‘bank’를 ‘은행(집합체)’이라고 번역했다. bank를 집합명사로 번역한 것은, 동업자들이 서로 얽혀 망網을 이룬 채 어음과 수표를 교환하는 지급결제 업무가 은행업의 핵심이라고 파악했기 때문이다. 일찍이 ‘료가에’들이 그렇게 해왔기 때문에 가능한 해석이었다. 그렇다. 동업자 간 네트워크야말로 은행산업의 가장 큰 특징이다. 그 네트워크가 없었을 때는 직접 돈을 운반하는 수밖에 없었다(송금-배달-결제). 이제 막 시작된 한국의 ‘카톡 결제’와 중국의 ‘알리페이’도 은행 네트워크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들의 서비스는 은행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은행 네트워크에 기생하는 것에 가깝다. 오늘날 은행 네트워크의 중심에는 중앙은행이 있다. 은행을 상대로 지급준비금을 관리하는 중앙은행의 지급결제망이 없다면, 정부의 세수와 재정지출도 아주 불편해진다. 그런 점에서 중앙은행의 지급결제망은 국가경제의 중추신경이다. 미국은 중앙은행 없이 연방정부가 홀로 국고금을 관리하다가 1914년 연준 설립과 더불어 야만상태를 벗어났다. 처음에 미국을 모방했던 일본은 그 점에서는 미국보다 빨랐다. 중앙은행을 중심으로 경제 전체를 엮는, 지급결제망의 큰 모습을 32년 먼저 완성한 것이다.
---「4 ‘돈이 모이는 곳’인가‘돈을 바꾸는 곳’인가」중에서
일본은 국가총동원 체제 유지를 위해 국적 선택이나 포기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조센징’은 어디에 있건 내선일체의 원칙이 적용되고 징병의 대상이 되었다. 안수길의 소설 『북간도』에는 중국인과 일본인 사이에 끼어 변발흑복과 창씨개명을 동시에 강요받는 1등 국민이자 ‘3등 국민’들의 애달픈 삶이 그려진다. 조선족의 또 다른 별명은 ‘가오리방쯔高麗棒子’였다. ‘방쯔’는 거지라는 뜻이다. 20세기 초 만주로 간 조선인들은 사실 거지꼴이었다. 몸뚱이밖에 없던 여자들 중에는 성매매로 빠지는 일도 많았다(다른 민족에 비해 매춘 인구 비율이 높았다). 하지만 성병 감염률이 낮다고 알려져서 몸값은 비쌌다. 『동아일보』편집국장이던 춘원 이광수는 현지 조사를 마친 뒤 “중국인보다 청결한 조선 여자들은 인육 장사(성매매)에서도 환영을 받는다”며 기쁜 듯이 기록했다. 남자들도 비슷했다. 초기에는 거의 대부분 농사에 매달렸고, 일부는 중국인 밑에서 소작농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악착같은 생활력을 발휘해 곧 형편이 나아졌다. 부농 출신인 시인 윤동주 집안이 그랬다. 1930년대에 이르러서는, 상업과 운수업에서도 놀라운 약진을 보였다. 오늘날 동남아시아의 화교들처럼 재력을 바탕으로 상당한 세력을 형성하는 경우도 있었다. 조선의 똑똑한 젊은이들은, 일본 주류 사회에서 만주 인맥의 부상과 만주 동포들의 성공 사례를 보고 만주행을 결심했다. 그들 중에는 의사, 변호사, 교사뿐만 아니라 행정관료(최규하·강영훈)나 장교(박정희·정일권·백선엽)를 꿈꾸는 사람도 있었다. 비좁은 조선을 벗어나 광활한 만주를 향했다는 점에서 그들의 꿈은 호연지기였으나, 체제에 순응했다는 점에서는 지극히 소시민적이었다. 대한민국 역사에서 누구보다도 혁혁한 공로를 세운 그들이 소시민적이었다는 사실은, 암울한 시대가 만든 역설이다. 선계 일본인들이 1등 국민인 동시에 3등 국민이었던 것처럼.
---「18 일선만 블록, 일만 블록으로 대체되다」중에서
6월 5일 대통령은 한은법에 따라 총재, 금통위원과 대리위원들을 임명했다. 대부분은 조선은행과 인연이 있던 사람들이었다. 대리위원 김교철(훗날 조흥은행장)은 아들 김정렴(재무장관)과 함께 2대가 조선은행과 한국은행에 근무하는 진기록을 세웠다. 조선은행은 커녕 금융업 경험이 전혀 없는 비전문가도 있었다. 윤보선(제4대 대통령)이 그랬다. 윤보선은 상공장관직이 힘들다고 사퇴한 뒤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서 낙선했다. 6촌 형님인 윤영선 농림장관이 마침 쉬고 있는 그를 금통위원으로 추천했다. 이승만은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윤보선은 끈기가 없어서 그것도 얼마 못할 것”이라면서도 그를 임명했다. 과연 윤보선은 6개월 뒤 대한적십자사 총재로 옮겼다. 윤보선도 처음에는 의욕적이었다. 금통위원으로 임명된 6월 5일 오후 회의에 출석해, 한국은행의 정관과 직제를 승인했다. 다음 날에는 재무부가 15억 원의 자본금과 3억 원의 적립금을 납입했다. 이로써 한국은행이 설립되었지만, 한국은행 직원들은 자본금 따위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은 금통위 회의가 이미 세 차례나 개최된 뒤인 6월 12일, 해군 군악대를 불러 창립 기념 파티를 열었다. 그러나 6월 12일은 조선은행 직원들이 중앙은행 직원으로 신분을 세탁한 기념으로 사진을 찍고 명함을 바꾼 ‘그들만의 잔칫날’에 불과했다. 법률적 의미가 더 큰 6월 6일이 잊힌 것은, 재무부와 심리적 거리감 때문이다. 한국은행은 재무부에서 은행감독 권한을 흡수하는 데도 인적 교류나 조직 흡수를 고려하지 않았다. 새로운 법률에 따라 생기는 새 일자리는 그들이 독식하겠다는 태도였다.
---「31 힘들게 세상에 나왔으나 생일을 잊은 한국은행」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