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두 살 먹은 수컷이다. 어린 시절부터 읽고 쓰기를 좋아해 교내 백일장에서는 공책 한 권이라도 반드시 타고야 말았고, 이데일리와 우리은행이 주최한 글짓기 대회에서 특선에 오르기도. 대한민국 수컷의 의무는 해군에서 복무했다. 물론 군대 백일장에서도 실력은 유감없이 발휘된다. 군 제대 후부터 본격적으로 글쓰기 공부와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독립 명랑 소녀』의 저자 김혜정 작가 밑에서 교육을 받으며, 인터넷에 『스테로이드』, 『스켈레톤 전기』, 『마인드 리더』 등을 연재했다.
나는 오늘 죽기로 결심했다. 2리터 들이 생수통도 겨우 들어갈까 말까 하는 소형 냉장고 앞에 붙어 있는 달력이 보였다. 그동안 얼마나 무심했던지 달력이 가리키는 날짜는 몇 년 전이었다. 하지만 달력의 연도는 상관없었다. 나는 오늘 날짜에 동그라미를 쳤다. 그곳엔 10월 22일이라고 적혀 있었다. 23일 옆에는 조그마하게 ‘시작’이라는 단어를 적었다. 그리고 한 달 뒤인, 11월 23일 옆에는 ‘죽음’이라는 단어를 적었다.--- p.13
언제부턴가 슬픔이 당연하게 느껴졌다. 길을 걷다 들리는 모든 노랫말이 나에 관한 것처럼 들렸다. 누가 찌르기도 전에 울컥 눈물이 났다. 밥을 먹을 때나 옷을 입을 때 혹은 부모님과 같은 냄새가 나는 사람이 지나갈 때면 항상 눈물이 났다. 안면실인증은 부모님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후 내게 남겨준 유일한 선물이었다. “스물다섯 번째 생일이었어요. 그저…. 그저 같이 놀러 가고 싶었을 뿐이었어요. 같이….” 아랫배에서부터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 솟아오른다. 2년째 받는 심리상담이었지만, 늘 같은 곳, 같은 대목에서 무너진다. 상담사는 파르르 떨고 있는 내 손을 꽉 잡아준다. 한결 마음이 편안해진다.--- p.26
아침에 눈을 뜨니 기분이 이상했다. 흰색 형광등 조명, 이불에 배인 섬유유연제 냄새, 체크무늬 실크로 장식된 조그마한 테이블 등 모두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그런데 기분이 이상하다. 모든 게 새롭게만 느껴진다. 오늘은 수요일. 늘 그랬듯 심리 상담을 받으러 가는 날이었다. 간단한 외출 준비를 마친 후 화장대에 놓여 있는 가족사진에 잘 다녀오겠다는 인사를 한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하다. 나와 닮은 반달 눈, 긴 머리에 눈가에 있는 주름까지 엄마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인다. 순간 꿈이 아닌지 볼을 꼬집었다. 아프다. 이건 꿈이 아니었다. ‘설마….’ 시선을 돌린다. 엄마 옆에 있던 아빠도 보인다. 3년 전과 똑같은 옷, 똑같은 얼굴 내가 기억하던 아빠 얼굴이 맞다. 정말, 정말로 보인다. 그토록 그립고 목매던 부모님의 얼굴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