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서나 추억들이 그를 따라다닌다. 어떤 방이든 물건 하나하나에 아내가 있다. 아파트의 공기는 여전히 아내가 숨 쉬던 그 공기. 그는 가구의 위치를 옮기고 모조리 뒤엎어버리고 싶다. 아니, 어디론가 이사를 가버려야 할지도. 하지만 샬로테한테 그렇게 말하자, 아이는 거절한다. 엄만 일단 하늘나라에 도착하면 나한테 편지를 보내겠다고 약속했어요. 그러니까 여기 그냥 있어야 해요. 안 그러면 우릴 찾지 못할 거예요, 소녀는 그렇게 말한다. 저녁마다 소녀는 창가에 앉아서 몇 시간씩 기다린다. 지평선은 어둡고 음울하다. 엄마의 편지가 길을 못 찾고 있는 건 그 때문일지 몰라. 여러 날이 흐른다, 아무런 소식도 없이 --- p.36
샬로테는 여러 주일에 걸쳐 여러 장의 정물화를 그린다. 독일어로는 정물화를 슈틸레벤, 즉, 침묵의 삶이라 한다. 침묵의 삶, 이 표현이야말로 샬로테에게 정말 잘 어울린다. 샬로테는 자신의 느낌을 나타낼 길이 없다. 그럼에도 그녀의 그림은 점점 더 나아진다. 학습된 아카데미즘과 모던 스타일 사이의 길을 찾아낸다. 반 고흐에 깊이 경탄하고 샤갈을 발견한다. 에밀 놀데의 이런 글을 막 읽고 그를 존경해마지 않는다. --- p.78
여러 해를 두고 나는 기록해나갔다. 나는 그녀의 작품을 끊임없이 찾아서 봤다. 내 소설 중 몇몇에는 샬로테를 인용하거나 그녀를 회상했다. 이 책을 쓰려고 몇 번이나 시도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어떻게? 나는 펜을 들고 시도했다가 이내 포기했다. 연이어 두 문장을 쓸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때마다 난 꼼짝도 할 수 없다는 느낌이었다. 도무지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그것은 물리적인 감각, 어떤 억누름이었다. 나는 절감했다, 숨이라도 쉬려면 다음 줄로 넘어가야 해! 그래서 그것은 이렇게 써야 한다는 걸 나는 깨달았다 --- p.90
알프렛은 샬로테의 뺨에 손을 갖다 댄다. 그리곤 말한다, 고마워. 너의 그 그림들, 고마워. 순진하고, 거칠고, 미완성이긴 하지만. 거기 담긴 약속의 힘 때문에 그 그림들이 좋아. 그걸 보면서 너의 목소리를 들었기 때문에 좋아. 일종의 상실을, 그리고 불안을 느꼈어. 어쩌면 심지어 어떤 광기의 시작이라고 할까. 부드럽고 온순한, 슬기롭고 다소곳한, 그러나 생생한 광기. 자, 그래. 내가 너에게 말하고 싶었던 게 그거야. 우린 아주 아름다운 시작이야. --- p.116
우리 가족의 역사를 이야기해줘야 해. 너무 늦기 전에. 어떤 그림들은 거친 스케치에 좀 더 가깝다. 샬로테는 그림을 그린다기보다 내달리고 있다. 작품의 후반부를 위한 이런 광란의 상태에는 숨이 막힌다. 심연의 가장자리에서 이루어진 창조. 두려움에 빼빼 마른 은둔의 샬로테는 스스로를 잊고 몰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