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날(4월 13일), 왜적의 배가 대마도로부터 바다를 덮고 왔는데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부산 첨사 정발이 절영도絶影島(부산 영도)에 사냥을 나갔다가 허겁지겁 성으로 들어왔다. 왜병이 뒤따라 상륙하여 사방에서 구름같이 모여드니 순식간에 부산성이 함락되었다.
경상좌수사 박홍은 적의 세력이 큰 것을 보고 군사를 출전시키지 못하고 성을 버리고 도망갔다. 왜군은 군사를 나누어 서평포西平浦(부산시 사하구 구평동)와 다대포多大浦(낙동강 하구 최남단에 있는 포구)를 함락시켰는데, 이때 다대포 첨사 윤흥신은 힘껏 싸우다 전사했다. 경상좌병사 이각은 소식을 듣고 병영에서 동래로 들어갔는데, 부산성이 함락되자 이각은 겁을 집어먹고 어쩔 줄 모르다가 ‘성 밖에 나가 양면 작전을 펼치겠다.’라고 핑계를 대고 성에서 나와 소산역蘇山驛(부산시 금정구 선동 하정마을에 있던 역)으로 물러나 진을 쳤다. 부사 송상현이 함께 머물며 성을 지키자고 했으나 이각은 따르지 않았다. ---「권1, 8 4월 13일에 왜적이 쳐들어 오다」중에서
그러나 불행하게도 경상도 수군과 육군의 장수들이 모두 겁쟁이였다. 바다에 있어서는 좌수사 박홍은 한 명의 병사도 출병시키지 않았으며, 우수사 원균은 비록 물길이 좀 멀기는 하지만 거느리고 있는 배가 많았고, 또 적병이 하루에 한꺼번에 쳐들어 온 것도 아니었으니, 모든 군사를 거느리고 전진하여 군대의 위세를 보이고 서로 대치했어야 했다. 다행히 한 번이라도 이겼다면 왜적은 마땅히 배후를 근심하여 갑자기 깊이 쳐들어오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바라만 보고도 멀리 피해서 단 한 번도 싸우지 않았다.
왜적이 육지에 오르자 경상도 좌병사 이각은 도망쳤고 우병사 조대곤은 교체되었다. 왜적은 북을 치며 거침없이 전진하여 무인지경의 수백 리의 땅을 밟고 밤낮으로 북상하였지만, 단 한 곳도 용감하게 대항하여 조금이라도 그 기세를 누그러뜨리려는 자가 없었다. ---「권1, 17 신립이 충주에서 패하다」중에서
얼마 후에 이순신은 판옥선 40척을 거느리고 이억기와 함께 약속하여 거제도에 이르러서는 원균과 군대를 합쳐 진격하여 적선과 견내량에서 맞닥뜨렸다. 이순신이 말하였다.
“이곳은 바다의 폭이 좁고 수심이 얕아서 뱃머리를 돌리기가 어렵습니다. 거짓으로 물러나 적을 유인하여 바다가 확 트인 곳에서 싸우는 것이 더 좋습니다.”
원균은 화를 내면서 곧장 앞으로 나가 부딪쳐 싸우려고 하였다. 이순신이 말하였다.
“공은 병법을 모르오! 이와 같이 하면 반드시 패할 것이오!”
드디어 깃발로 배를 지휘하여 물러나게 하니 왜적들이 크게 기뻐하며 다투어 배를 타고 쫓아왔다. 이미 좁은 곳을 빠져나오자마자 이순신이 북을 한번 치자 모든 배들이 일제히 노를 돌려서 바다 한가운데에서 열을 지어 벌려 섰는데, 정면으로 적선과 맞부딪치니 서로의 거리가 수십 보에 지나지 않았다. (중략) 여러 배가 일시에 합세하여 공격하니 연기와 불꽃이 하늘에 가득하였고 적선을 수도 없이 불태워버렸다. 어떤 적장이 누각이 있는 커다란 배에 타고 있었는데 그 높이가 몇 길이나 되었고, 배 위에 망루도 있어서 붉은 비단과 채색 담요로 그 밖을 두르고 있었다. 그 배 역시 대포에 맞아 부서졌고 적병은 모두 물에 빠져 죽었다. 그 뒤에도 왜적들이 계속해서 싸움을 걸었지만 모두 패하였다. 마침내 부산과 거제로 도망쳐 들어가 다시는 나오지 못했다. (중략) 이보다 앞서 적장 평행장이 평양에 이르러 글을 보내 말하였다.
“일본 수군 10여 만 명이 또 서해로부터 올 것인데, 대왕께서는 이곳에서 어디로 가려고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왜적은 본래 수군과 육군이 합세하여 서쪽으로 가려고 했는데, 이 한 번의 싸움에 힘입어 마침내 왜적의 한쪽 팔을 끊어버렸다. 그래서 평행장이 비록 평양을 점령했으나 형세가 고립되어 감히 더 이상 진격할 수 없었던 것이다. 국가에서는 전라도·충청도를 보전할 수 있어서 황해도·평안도 연해지역 일대까지 군량을 보급하고 조정의 명령이 전달되도록 하여 나라의 중흥을 이룰 수 있었다. 그리고 요동의 금주·복주·해주·개주와 천진 등의 땅도 난리를 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명나라 군사가 육로를 통해 구원해 줄 수 있어서 왜적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모두 다 이 한 번의 싸움에서 이겼기 때문에 가능했다. 오호라! 그러니 이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었겠는가? ---「권1, 32 이순신이 왜적을 크게 무찌르다」중에서
대군이 개성부에 도착한 지 오래되어 군량미가 이미 바닥이 났다. 다만 뱃길을 따라 조와 말먹이 풀을 강화도에서 구해왔고, 또 충청도·전라도의 조세로 바쳐진 곡식을 배로 운반했는데 조금씩만 도착해서 이르자마자 바닥이 났으니 그 형세가 더욱 위급하였다.
하루는 여러 장수들이 군량미가 떨어진 것을 핑계로 제독에게 군사를 돌리자고 청하였다. 제독이 화가 나서 나와 호조판서 이성중과 경기 좌감사 이정형을 호출하여 뜰아래 무릎을 꿇리고 큰 소리로 꾸짖으면서 군법을 가하려고 하였다. 나는 사죄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나랏일이 이 지경에 이른 것을 생각하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권2, 3 이여송 제독이 벽제관전투에서 패하다」중에서
초현리에 이르렀을 때 중국인 세 사람이 말을 타고 내 뒤에서 달려와 큰소리로 외치기를 ‘체찰사는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하였다. 내가 대답하였다. “내가 체찰사다.” 말을 돌리라고 소리쳤는데, 한 사람이 손에 쇠사슬을 들고 긴 채찍으로 내 말을 마구 때리며 “달려라, 달려라!”라고 외쳤다. 나는 무슨 일인지도 모른 채 어쩔 수 없이 말을 돌려 개성을 향해 달려가는데, 그 사람은 말의 뒤를 따르면서 채찍질을 멈추지 않았다. 나를 수행하던 사람들은 모두 뒤쳐졌고 다만 군관 김제金霽와 종사관 신경진만이 힘을 다해 뒤따라 왔다. 청교역靑郊驛을 지나 토성의 모퉁이에 이르렀을 때 또 한 사람의 기병이 성 안에서 말을 달려와 세 명의 기병에게 무슨 말을 하였다. 곧 이어 세 명의 기병이 나에게 인사를 하며 말하였다.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나는 어리둥절하여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돌아왔다. 다음날 이덕형의 통지를 받고서야 비로소 그 까닭을 알게 되었으니, 이러한 연유가 있었다. (중략) 대개 제독은 내가 강화를 늘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평소에 불평하는 마음이 있었던 까닭에 다른 사람의 말을 듣자마자 다시 살펴보지도 않고 갑자기 이처럼 화를 내었던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내가 위험해졌다고 여겼다.
---「권2, 7 유성룡이 이여송의 강화 제의에 반대하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