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이 없다면 세상은 생기를 잃어버리고 의미도 사라진다. 당연하게도 이런 주장은 미국인들이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자아 개념에 반대되지 않느냐고 물어볼 수 있다. 우리는 대부분 이성적 자아란 감정이 없는 자아고 감정은 이성적 이해를 방해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우리 자신의 감정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더 근본적으로 이해할수록, 우리는 우리 주변의 세상을 더 잘 알 수 있게 되며 거짓된 이성도 더 잘 발견하게 된다. 나치 수용소의 운영이나 소비에트의 공개 재판, 캄보디아의 킬링필드, 정치범들의 고문처럼 아주 비이성적인 사건들은 자기가 이성적이라고 주장한 사람들의 감정 없고 규칙적이며 기계적인 행동들을 거쳐 일어났기 때문이다. --- p.17~18
애착 경보는 우리 내부에서 울리며, 이 경보는 우리가 무엇을 느끼는지보다는 어떤 것을 얼마만큼 느끼는지에 관한 반응에 가깝다. 개인의 친밀한 삶이 시장으로 편입되면서, 우리는 이 시장이라는 폭넓은 유통 체계에 접해 있는 은행들의 위치만 끊임없이 묻기만 한 채 이런 행동이 옳다고 느낀다. 시장의 경계가 움직이면 관계에 관해 말하고 생각하는 방식과 의사 표현도 바뀌며, ‘옳다고 느끼는’ 애착의 정도에 영향을 미치는 감정 규칙들도 따라서 바뀐다. --- p.48
일하는 동안 감정노동자는 어쩔 수 없이 고객이 하는 요구에 자기를 맞추고, 고객하고 공감하며, 자기 자신의 감정을 관리한다. 이 노동자는 집에서 아이가 아프다든지, 집이 털렸다든지 하는 안 좋은 소식을 들을 수도 있다. 또는 고객 몸에서 기분 나쁜 냄새를 맡을 수도 있고, 고객이 하는 변덕스런 행동 탓에 신경이 거슬릴 수도 있다. 돌봄 노동자들은 종종 자기 자신을, 정신 분석가 도널드 위니캇이 이름 붙인 ‘안아주는 환경’으로 만든다. 불안이나 분노, 질투, 슬픔 같은 감정이 환자를 불안하게 하고, 두렵게 만들며, 위험하다고 느끼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감정들이 새어 나오지 못하게 미리 막는 분위기나 환경을 ‘안아주는 환경(holding environment)’이라고 부른다. --- p.54
지구 온난화로 해수면이 올라가 물에 잠기는 몰디브 섬에서 하루하루 걱정하며 살아가는 주민들과 미국의 기업가들이 서로 자기의 공감 경계를 확장한다면 이길 수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흑인 빈민 지역 행상인과 런던의 잘나가는 경영인 사이의 유대 관계를 이끌어내면 이길 수 있다. 뉴욕 맨해튼의 부촌인 어퍼 이스트사이드에 사는 한 엄마가 자기 아이의 처지에서 생각할 뿐 아니라 그 아이를 돌보는 돌보미의 아이들, 곧 돌보미가 돈을 버느라 미국으로 오면서 멕시코에 떼어놓고 온 아이들 처지에서도 생각할 때, 우리가 그 엄마를 격려하면 이길 수 있다. 우리는 전세계 사람들하고 공감해야 한다. …… 사회 계층과 인종과 성별의 장벽을 넘어 우리는 공감해야 한다. --- p.64~65
사람은 가족 안에서 살고, 가족은 여러 상황 속에서 산다. 오늘날 미국인들은 시장, 곧 (우리 견해로 볼 때) 자유 기업 체제 속에서 움직이는 크고 작은 회사들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상황 속에 살고 있으며, 그 영향력은 점점 더 강해지고 있다. 기업은 우리에게 살면서 꼭 필요한 것들을 많이 제공하지만, 체제 안에서 움직이는 회사들은 본질적으로 가족의 가치가 아니라 주주의 (자유 선택과) 가치를 인정하게끔 설계돼 있다. 회사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그밖에 다른 것들(정부, 비영리 단체, 지역 사회 공동체)의 영향력은 줄이려는 ‘자유 시장 가족관’ 지지자들의 바람은 바로 우리가 주주들의 가족생활 관점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 p.116~117
장면 재구성, 참고 견디기, 미루기, 부지런해지기, 위임하기, 늦추기, 혁신하기, 탈출하기 같은 시간 전략들은 모두 감정 관리에 관련돼 있다. 그리고 이런 전략들은 ‘우리는 사랑이 넘치는 가족이야’라든가 ‘사랑해’ 같은 생각들을 확인하던 상징적 행동들이 갑자기 재구성되는 상황을 지지하는 듯하다. 그리고 각각의 전략은 개인이 맺고 있는 특정한 관계를 기업의 관계로 바꿔놓는다. 가정이라는 공간을 직장 환경으로 재구성하는 ‘가족 360’의 전략은 기업의 강력한 요구하고도 일치한다. ‘가족 360’의 코치들은 상대적으로 측정하기 힘든 감정보다는 누군가가 측정할 수 있고 계산할 수 있으며 보상할 수 있는 ‘개인의 습관’에 초점을 맞추라고 고객에게 권한다. --- p.134
좋은 평판은 즐거운 기분이 들게 하지만 나쁜 평판은 마음을 아프게 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영광을 기꺼이 행복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거나, 우리에게 쏟아지는 다른 사람의 불명예를 애타는 심정으로 막아낸다. 악당이든 성인이든 우리는 누군가의 가족, 이웃, 또는 친구다. …… . 좋은 평판 영역 안에서 돌아다니든 나쁜 평판 영역 안에서 떠돌고 있든, 우리는 평판에 관한 우리의 감정을 관리한다. ……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대표하고 다른 사람들도 우리를 대표하면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 직함, 구실, 배지, 왕관은 갖고 있지 않지만,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조용히 외교관의 구실을 수행하고 있다. --- p.164
브랜드화 움직임, 그리고 도덕 감정들의 증가는 모두 직장과 가족이 똑같이 두려울 정도로 크게 개편되는 흐름에 대응하는 반응이다. 그래서 많은 미국인은 한편으로는 냉정하고 힘든 시장에 대비(자기에게 맞는 브랜드를 마련하기)해 자기 자신을 바꾸고, 다른 한편으로는 가족과 친구들 사이의 강한 유대를 형성할 수 있는 권리를 주장(‘충실’, ‘감사’, ‘희생’, ‘책무’를 주장하기)함으로써 이 둘 사이의 균형을 맞추려 할지 모른다. 토크빌의 망원경을 갖고는 부푼 배에 광고를 문신하는 임산부, 아기 이름을 딴 상품명, 광고 게시판에서 웃고 있는 가족, 이런 모든 변화를 받아들이는 방법을 배우려 갈피를 못 잡고 힘들게 싸우는 사람들을 예견하기 힘들었다. 그렇지만 이런 사람들에게 이런 행동들은 문제 자체가 아니라 문제의 해결책처럼 보인다. 시장과 자아의 경계가 흐릿한 문화에서, 왜 안 그렇겠는가? --- p.195
사업 이름을 ‘임대 엄마’로 하게 된 이유를 묻자 그 여성은 이렇게 대답했다. “12년 동안 결혼 생활을 하면서 빨래에다 음식에, 애들 키우고, 정원도 가꿨습니다. 그렇지만 남편은 그런 일에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남편은 돈만 벌면 된다고, 그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혼한 뒤에 저는 제가 가정에서 공짜로 하던 이 모든 일을 돈을 받고 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임대 엄마’라는 이름 속에서 그 여성은 가정에 있던 자기의 ‘가치’를 시장에서 매기는 ‘가격’으로 명시했다. 다른 사람들이 삶의 의미를 찾으려 시장의 세상에서 벽을 뛰어넘어 이쪽으로 건너올 때, 이 여성은 반대로 벽을 뛰어넘어 시장의 세상으로 갔다. --- p.208
자유 시장에서 교환은 정부의 규제나 도움을 거의 받지 않고 일어난다. 한밤중에 다른 사람 집으로 쳐들어가는 군대나 다름없는 경찰도 없지만, 반대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도우러 가는 사람도 없다. 정말로 이 악몽 속에서 정부는 좋은 학교도, 시설 잘 갖춘 병원도, 믿음직한 경찰도, 아름다운 공원도, 안전 점검을 마친 식수나 음식도, 효율적인 안전망도 제공하지 않는다. 우리는 공공 서비스가 턱없이 모자란 세상에서 살고 있으며,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사람들이 괴로운 선택들 중에서 하나를 고르는 ‘자유 선택’을 한다. --- p.253
인도 케랄라의 트리반드룸에 있는 친척들에게 자녀를 맡기고 떠난 간호사가 페르시아 만 두바이에서 환자를 돌볼 때, 그 여성 이주 노동자는 돌봄 사슬의 한 고리로 존재하게 된다. 우리는 이런 현상을 어떻게 봐야 할까 우리는 이런 국제 돌봄 사슬을 ‘돌봄 자본(care capital)’(또는 간단히 ‘돌봄 능력’)이 하나의 가족과 국가에서 다른 가족과 국가로 이전한 현상이라고 이해해야 할까 아니면 감정적 ‘공유지’(또는 위르겐 하버마스가 말한 ‘생활 세계’)의 손상, 다시 말해 돌봄 유출로 이해해야 할까? 아니면 그나마 남아 있는 유대 관계의 변형인 걸까? --- p.277
“이런 모든 일을 각각의 전문가에게 맡기면, 아이들은 자기가 자동차 같다고 느낄 겁니다. 엔진 오일과 바퀴를 교환하고, 엔진 윤활 작업을 하면서 자동차 정비를 하듯이 자기를 정비하고 있다고 느낄 거예요. 이런 아이들이 커서 어린 시절을 어떻게 기억할까요? 아마도 예약, 예약, 예약의 연속으로 기억하겠죠.”
--- p.3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