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으으음. 나는 생각했다. 그건 내 기준으로 보자면 재미있는 대화 축에 못 끼는걸.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자 난 조금 울컥 화가 치밀었다. 나는 남들에게 머리가 텅 빈 호들갑스럽고 경박한 애로 비치고 싶지 않다. 당연하지. 난 그런 애가 아니니까. 학교 성적도 좋고, 또 여러 가지 것들에 대해 나름대로 생각이 많단 말이야. 예를 들어, 내일은 뭘 입을지, 머리 스타일은 어떻게 할지, 내가 제일 좋아하는 남성 밴드는 누군지, 뭐 그런 거. 하지만 어쩌면 '진지한' 것들에 대해 얘기를 나누는 것도 좋을지도 모르겠다. 책이라든가. 음. 이번 기회에 책을 한 번 읽어 볼까? 어른들이 읽는 두껍고 진지한 걸로 말이다. 나도 어렸을 적에는 책을 꽤 많이 읽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점점 안 읽게 된 것 같다. 왜 그랬는지 이유는 모르겠고. 어쨌든 좋아. 나는 결심했다. 오늘 집에 돌아가자마자 실천해 봐야지. 진짜 어렵고 지적이고 폼 나는 책을 하나 고르는 거야. 그런 다음에 거기 나온 말을 인용해서 나도 그런 어려운 책을 읽는다는 걸 친구들에게 보여 줘야지. 그리곤 나중에 괜찮은 남자 애를 만나면 내가 얼굴이 예쁠 뿐만 아니라 속도 꽉 차 있는 지적인 애라는 걸 과시해서 깜짝 놀라게 만들어 줄 거다. 그러면 친구들도 누가 진짜 바보인지 알게 되겠지. 흥, 어쨌든 나는 경박한 애가 아니라고. --- p.29
* 그래. 내 인생은 이제 끝이야. 이젠 죽어도 집 밖으로 나가지 않을 테야. 난 해리 포터가 될 거야. 호그와트에 가서 마법사가 되는 게 아니라, 자진해서 계단 밑 벽장으로 들어가서 아무하고도 말 한 마디 하지 않는 은둔 생활을 하겠다는 뜻이다. 절대로 내 얼굴을 사람들 앞에 내놓지 않겠어. 적어도 1년 동안은. 내가 미소를 다시 지을 수 있는 그 날까지. 그래, 친구들의 말이 옳았다. 나는 가볍고 얄팍한 애다. 내 외모를 엄청나게 중요하게 여기니까. 하지만 어쩔 수 없는걸. 남자 애들이 날 쳐다보는 게 좋다. 남들에게 예쁘게 보이는 게 좋다. 그런데 이게 뭐람? 이젠 아무도 나에게 눈길을 주지 않을 거다. 우와, 쟤 좀 봐. 저 번쩍이는 강철 이빨 봤어? 이런 애들만 빼놓곤. 그리고 내 무대 인생은 어떻게 해? 한동안은 꿈도 못 꾸겠지. 그런 상태로 무대 조명을 받을 수는 없으니까. 하! 인생이란 정말 끔찍하다니까. --- pp.52-53
* "만약에 그 애가 너랑 사귈 만한 자격이 있는 애라면 치아 교정기 때문에 널 싫어하지는 않을 거야."
티제이가 말했다.
"넌 좀 용감해질 필요가 있어, 네스타. 그냥 네 진실한 모습을 보여 줘. 그랬는데도 그 애가 널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런 애 따윈 잊어버려."
"네 말도 맞아."
내가 말했다.
"하지만 남자 애들은 여자 애들을 볼 때 제일 먼저 외모부터 보는걸. 하나라도 자기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으면 그냥 가 버린단 말이야. 진정한 내 모습, 무성한 다리털, 이상한 버릇, 치아 교정기, 그런 건 다 나중에 보여 줘도 돼. 어쨌든 먼저 나한테 빠지도록 만드는 게 제일 관건이니까. 너도 알잖아, 티제이." --- pp.94-95
* "꼭 <로미오와 줄리엣> 같다."
티제이가 말했다.
"기억나? 몬터규와 캐풀렛 가문도 이탈리아 사람들이잖아. 꼭 너희들처럼 말이야. 두 가문이 서로를 너무 싫어해서 로미오와 줄리엣도 몰래 만나야만 했지. 꼭 너랑 루크처럼 말이야."
"대단히 고맙구나, 티제이."
내가 말했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게 맞는다면 둘 다 마지막에 죽지 않니?"
"그건 두 사람이 같이 도피하려고 했던 계획이 어쩌다 모조리 어긋나서 그렇지."
티제이가 말했다.
"줄리엣은 그냥 죽은 척한 거였는데 로미오가 줄리엣이 진짜로 죽은 줄만 알고 자살해 버렸고, 줄리엣이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로미오가 죽은 걸 보고 자기도 자살해 버리잖아."
루시가 눈을 굴렸다.
"그럼 코미디가 아니었구나?"
루시가 말했다.
"아니야."
내가 말했다.
"그리고 난 그놈의 '그대'니 '-했소'니 같은 이상한 말들 때문에 재미없어 죽을 뻔했어."
"네스타!"
티제이가 말했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셰익스피어가 쓴 희곡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 중 하나야. 정말 굉장한 이야기라고. 혹시 희곡을 읽는 게 싫으면 리오나르도 디캐프리오가 나오는 멋진 영화가 있으니까 그거라도 한번 봐."
*아아, 또 시작이로군.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단지 내가 다른 친구들만큼 책을 안 읽는다는 이유 때문에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한다니. ----- pp.160-161
* 완전히 엉망이 되어 버렸다. 내가 원래 하려고 했던 게 바로 그거였다. 아빠를 안아 드리는 것. 아빠를 어렸을 적 친구와 재회하고 화해하게 만드는 것. 하! 사이가 나쁜 사람들을 중재하고 평화를 널리 퍼트리고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기에는 난 너무 역부족이었다. 생각도 없이 입만 살아가지곤. 도대체 뭘 제대로 하는 법이 없다니까. --- p.230
* "아직도 많이 아파?"
티제이가 물었다.
"아니, 이젠 하나도 안 아파."
내가 말했다.
"가끔은 내가 치아 교정을 하고 있다는 것도 까먹는걸."
루시가 콜라가 놓인 쟁반을 들고 오자, 나는 루시를 향해 씨익 웃어 보였다.
"끝내 준다! 치아에 보석 박아 넣기라."
루시가 내게 콜라를 건네주며 말했다.
"새로운 유행이 시작되겠는걸."
"생각해 봤는데,"
내가 입을 열었다.
"내가 가볍고 얄팍한 애라는 거 말이야. 그게 그렇게 나쁜 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 사실 난 지금 이대로의 내가 좋거든. 그러니까."
나는 콜라 잔을 집어 들었다.
"우리 경박함을 위해 건배하자."
--- pp.246-2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