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빛 아래 그의 눈이 희미하게 떨렸다. 그는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였고, 나는 눈을 감았다. 이윽고 그가 잠긴 목소리로 나지막이 물었다.
“……살아 있어도 괜찮은가?”
그 물음은 오랜 염원처럼 간절했다. 나는 그가 긴 시간 어떤 굴레를 쓰고 살아왔는지를 사무치게 느꼈다. 그의 기다림은 정말 길었다. 그래서 나는 그 해묵은 문제를 풀기 위해 조용히 답했다.
“부디 그래 줬으면 해요.”
그것으로 우리의 문답은 끝났다. 내가 다시 눈을 떴을 때 하늘은 여전히 별빛을 퍼붓고 있었다. 기달티는 내가 아니라 그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전보다 긴 침묵이 흘렀다. 별빛은 성급하게도 계속 새로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대는 나를 구했다.”
한참 후, 그가 고개를 돌린 채 말했다. 나도 고개를 돌린 채 그 말을 들었다.
“그대에게 내 모든 것을 바치겠다. 난 이제 그대의 것이다.”
나는 답하지 않았으나, 분명히 받았다. 정녕 별빛이 억수같이 퍼붓는 밤이었다. --- p.18
이윽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세상은 이전과 달라 보였다. 상냥한 바람이 불어왔다. 별이 빛나고 있었다. 땅의 다정함이 느껴졌다. 아, 이세상은 그토록 아름다웠다. 나는 당신이 어떤 마음으로 이 세상을 만들었는지 보고 있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세상은 당신의 선물이었다. 그렇기에 이 세상을 선물로 받은 이들은 언제나, 늘 언제나 사랑받고 소중히 여겨져야 마땅하다. 그들 하나하나가 이 세상보다 귀하다.
당신이 우리를 그렇게 여긴다는 사실을 깨달아 나는 울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 사실이 감사하고도 안타까워서 나는 울었다. 가슴이 미어지듯 아파서, 많은 사람이 눈에 보이듯 떠올라서. 눈밭에서 죽어 간 어린아이가, 속박된 채 유린당하던 사람들이, 이성을 잃고 싸우던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은 그래서는 안 됐다. 그들은 그렇게 여겨져도 좋은 존재가 아니었다. 그들은…….
그 밤, 나는 오래도록 엎드려 울었다. 그렇게 세상을 마음에 품었다. --- p.19
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타오르는 용광로를 바라보았다. 이 세계 곳곳은 다 왜 이런 걸까, 누구의 탓이고 무엇의 탓일까? 이 세계를 볼 때면 마치 어두운 밤 망망대해를 바라보는 기분이 든다. 길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고 한 발짝 내디디면 칠흑 같은 바닷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다. 너무나 많이 일그러진 이 세계에서 나는 정말 길이 될 수 있을까? 뜨거운 쇳물을 이끌어 주는 저 틀처럼, 길이 될 수 있을까? 또 한 번 두려운 마음이 들었지만 나는 스스로를 다잡았다. 망설이지 말고 걸어가라고 했던 그의 말을 떠올리면서.
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아크제리유트는 자신이 이 세상의 주인인 것처럼 행동하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을 도구처럼 쓰고 버린다. 필요에 따라 더 만들어 내라고 닦달하기도 한다. 하지만 사람은 그렇게 취급해도 좋은 존재가 아니다. 모든 사람 한 명 한 명이 얼마나 무거운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그는 조금도 알지 못한다. 그들의 가치는 그렇게 쓰이다 버려질 만큼 가볍지 않다. 절대 그렇지 않다. 나는 어금니를 꾹 깨물었다. 저 오만한 폭군에게 똑똑히 가르쳐 줄 생각이다. 그 포악한 만행의 끝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이 세상의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를. --- p.55
―모르는 것만이 가치 있다면 우린 항상 새것을 찾아야 할 거야. 하지만 이미 알더라도 계속 듣고 싶은 말이 있어. 내가 듣기를 원하는 이유는 모르는 걸 알고 싶어서도, 아는 걸 확인하고 싶어서도 아니야. 내가 여전히 기뻐한다는 걸 알려 주고 싶은 거야. 똑같은 말이라도, 이미 밝혀진 마음이라도. 이렇게 말하면 알겠니?
내 물음에 소년은 고개를 저었다. 대신 옆에 있던 어린 소녀는 어렴풋이나마 이해한 듯 수줍게 웃었다. 또 한 번 소외감을 느낀 소년이 볼멘소리로 물었다.
―잘 모르겠어요. 그런 거예요?
―네, 그런 거예요. 사랑한다는 건요.
나는 소년의 말을 따라 하며 웃었다. 그리고 그 소년을 보며 언젠가 그도 어른이 되어 이 마음을 알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조만간 이들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 그때 이미 알았지만, 그래도 그러기를 소망했다. 바로 그 소망을 포기할 수가 없어서 훗날 나는 그 길을 걸었다. --- p.111
그 밤에 제미라는 내게 말했다. 무아카를 용서하겠다고. 생각나면 또다시 미워질 테지만 매일매일, 매 순간 무아카를 다시 용서하겠다고. 그러니 전해 달라고 했다. 자신이 어떻게 무아카를 용서했는지. 두미야가 어떤 사람인지. 이것으로 무아카는 갚지 못할 빚을 졌으니 남은 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나는 모든 것을 전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런 내게 제미라가 마지막으로 물었다.
“저는, 기적을 일으켰나요?”
나는 답했다. 이보다 큰 기적은 세상에 없을 거라고.
나는 제미라와 한참을 서로 꼭 안고 있다가 그 방을 나왔다. 그리고 곧장 무아카에게로 향했다. 그 아이에게 해줄 말이 많았다. 그 아이에게 전해 줄 선물이 차고 넘치도록 많았다.
아아, 이 성. 개구리도 폭군도 이제는 없는 평화로운 성. 하지만 이 성에는 망가진 여자와 부서진 아이가 있었다. 그들은 나날이 말라 죽어 가고 있었다. 그들의 상처는 쉼 없이 가속하며 번지고 있었다. 기적이라도 일어나지 않는 한, 그들은 정말 곧 죽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오늘 밤 그들에게 기적이 일어났다. 나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눈물에 슬픔은 단 한 조각도 섞여 있지 않았다. --- p.185
“하지만 누가 우리의 가치를 폄하할 수 있죠? 저 하늘이 우릴 이토록 귀하다고 말하는데.”
내 눈에는 보인다. 이 세계가 몸부림치며 우리에게 전하는 목소리가. 지금은 비록 많은 것이 어긋나 있지만 세상은 본디 이런 곳이 아니었다. 우리는 이렇게 울며 아파해도 괜찮은 존재가 아니다.
“하늘이 말해요. 단 한 사람도 쓸모없지 않고 단 한 삶도 의미 없지 않다고. 그러니 여러분, 부디 사랑하세요. 우릴 지켜보는 이를, 여러분 자신을, 그리고 서로를.”
네, 지금처럼 그렇게, 서로를 아끼고 소중히 여기세요.
“그러면 그때 이곳은 정말 낙원이 될 거예요.”
이 땅, 지옥 같았던 이 땅. 하지만 누가 이 땅을 지옥으로 만들었던가. 피네하스, 그 혼자인가? 아니었다. 그의 사주를 받아 우리 모두가 이 땅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 p.2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