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서지학
1. ‘서지학’이란 무엇인가?
1) 근대 중국에서의 ‘서지학’ 부흥
서지학이란 도대체 무엇인지를 정의하기는 어렵다. 서적에 관한 학문인 것은 틀림없다. 근대 중국에서 서지학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커다란 학문으로 발전하였다. 우선 그 개요를 살펴보기로 하자.
청나라 왕조가 끝나고 중화민국의 시대에 들어가자, 전통적인 목판인쇄에 의한 학술서가 연활자鉛活字에 의한 인쇄(배인排印), 서양식 장정, 서양식 연구방법을 도입한 것으로 많이 바뀌었다. 또 ‘기간期刊(일간을 제외한 정기 간행물)’이라고 불리는 잡지가 증가하여, 문학작품이나 학술논문을 각종 잡지에서 볼 수 있게 되었다. 문헌자료의 정리는 드디어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한편 옛 서적은 청말의 사대장서가 가운데 육심원陸心源의 벽송루?宋樓는 일본의 세카도靜嘉堂문고로 옮겨졌으며, ‘남구북양南瞿北楊’(장쑤성江蘇省 창수常熟 구瞿 씨의 철금동검루鐵琴銅劍樓, 산둥성山東省 랴오청聊城의 양楊 씨 해원각解源閣)과 난징南京의 정丁 씨 팔천권루八千卷樓는 그 일부가 흩어지는 것에 그쳤다. 하지만 대부분 장서가들의 책이 흩어져버렸고, 푸쩡샹傅增湘(1872~1949), 리성둬李盛鐸(1859~1934) 등 새로운 장서가가 활약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눈에 띄는 것은, 이와 같은 옛 책과 새로운 책을 모두 지탱하는 임무를 맡은 것은 청말의 서원書院이나 학당이 개편되어 당시 여기저기에 세워진 도서관이라는 조직이었다는 점이다. 가령 베이징에는 선통宣統1년(1909)에 경사도서관京師圖書館이 성립하였다. 목록학자인 먀오취안쑨繆?孫(1844~1919)이 감독하였으며, 돈황경敦煌經이나 『사고전서四庫全書』 등의 특수한 자료를 비롯하여, 각지의 장서가로부터 선본善本을 수집하여, 1912년에는 장환江澣 관장의 주도로 일반인들에게 문을 열었다. 상하이에서는 나중에 동방도서관東方圖書館으로 이름이 바뀌는 함분루涵芬樓가 장위안지張元濟에 의하여 출판사 상무인서관商務印書館의 부설도서관으로서 광서光緖30년(1904)에 설립되었으며, 위대한 영인사업인 『사부총간四部叢刊』을 출판하였다. 또 1907년에 난징南京에 강남도서관江南圖書館이 성립되자, 각지에서 근대 도서관 체제가 성립하였다. 그리고 도서관의 주요한 사업은 편목반編目班에 의한 목록 제작인데, 『경사도서관선본서목京師圖書館善本書目』(도1)?『장쑤성립국학도서관도서총목江蘇省立國學圖書館圖書總目』 등, 각 도서관은 다투어 목록학의 성과를 발표하였다. 또한 『베이핑도서관관간北平圖書館館刊』(1928~1937) 이나 『도서관학계간圖書館學季刊』(1926~1937) 등, 서적에 관한 전문잡지가 도서관의 주도 아래 충실해진 것은 주목할 만하다. 요컨대 이 시기는 근대 중국 서지학의 전성기이었다고 할 수 있으며, 그 중심적 역할을 한 것이 도서관이었다는 것은 특히 강조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전성기도 잠깐이었으며, 1937년의 루거우차오사건盧溝橋事件을 계기로 서적 문화사업은 커다란 타격을 입었으며, 수많은 서적이 불에 타서 재가 되었다.
구팅룽顧廷龍의 활약
중일전쟁이 한창이었던 1939년, 베이징으로부터 ‘고도孤島’ 시기의 상하이上海에 이주해온 한 사람의 청년 학자가 있었다. 후에 도서관계의 중진이 되는 서지학자 구팅룽顧廷龍(도2)이다. 같은 해에 장위안지張元濟?예징쿠이葉景葵 등이 사립인 합중도서관合衆圖書館(상하이도서관上海圖書館의전신)을설립하여, 구팅룽을 그 간사로 초빙한 것이다. 쑤저우蘇州의 선비 집안에 태어나, 청말의 학자 왕퉁위王同愈에게 배우고, 베이징에서 구제강顧?剛과 함께 『고문상서古文尙書』를 연구하였던 구팅룽은 1937년에 교감학자인 장위章鈺의 장서를 정리하여, 목록학사상 특필할만한 『장씨사당재장서목章氏四當齋藏書目』을 몇 개월 만에 완성하여, 장위안지와 예징쿠이의 눈에 띄었던 것이다. 두 사람의 열의에 마음이 움직여, 구팅룽은 베이징의 옌징대학燕京大學을 떠나, 합중도서관合衆圖書館에서 자료 탐방, 정리, 목록 작성을 하게 되었다. 셋방살이인 주거와 붙어있던 서고로부터 시작하여, 그때까지는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였던 명인의 필사본이나 편지, 금석金石의 탁편拓片, 일기, 족보, 기간期刊 등의 수집으로부터, 서고의 온도, 습도, 통풍 등 서적의 보존 방법에 이르기까지, 근대 문물보존의 기초를 실천하여, 『합중도서관장서목록合衆圖書館藏書目錄』의 제작을 비롯하여 많은 성과를 얻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에는 ‘난구베이자오南顧北趙’라고 일컬어져, 상하이의 구팅룽과 베이징의 자오완리趙萬里(1904~1980)가 고서적의 감정이나 연구를 지도하였으며, 『중국판각도록中國版刻圖錄』(北京圖書館編, 文物出版社, 1960)?『중국총서종록中國叢書綜錄』(上海圖書館編, 中華書局, 1959~1962) 등 불후의 명작을 세상에 내어 놓았다. 서지학은 과연 안전하고 무사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문화대혁명(1966~1976)에 의한 상처는 깊어서, 서지학은 고사하고 도서관 자체의 학술성이 박탈당하였으며, 학자들도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강요당하였다. ‘초가抄家’라고 칭하여 개인의 도서와 문화의 산물은 모두 압수당하였다. 그러한 압수물로부터 진귀한 자료가 발견된 것은 아이러니컬한 일인데, 구팅룽 씨는 루쉰魯迅의 손편지나 라오서老舍의 『낙타상자駱駝祥子』의 친필원고를 발견하였던 추억을 말하였다. 특히 장칭江靑 등 사인방四人幇의 수법은 악랄하였다. 즉, 상하이도서관에서 근대 잡지에 실렸던 논문의 종합 색인을 편찬하여, 그 카드로서 글자 수가 천만에 이르는 원고를 준비하였는데, 그들의 손에 의하여 모두 제지공장에 버려졌다고 한다. 구팅룽 씨의 분노는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이 암흑시대도 드디어 1976년에 끝이 났는데, 1975년 10월 저우언라이周恩來가 병석에서 “전국의 선본총서목善本總書目을 작성하라”고 지령을 내렸다. 구팅룽 씨는 감동을 억누를 수 없었다고 한다. 스스로 주편主編이 되어 『중국고적선본서목中國古籍善本書目』(도3)의 편찬을 개시하였다. 지수잉冀淑英?선셰위안沈燮元 등을 부주편副主編으로 하여, 국가사업으로서 전국의 도서관을 끌어들이고, 각 도서관으로 하여금 젊은 서지학자를 육성하게 하여, 전국에 산재하는 13만부에 이르는 선본의 목록을 1995년까지 완성하였다.
이로써 중국의 서지학은 금자탑을 높이 쌓아서, 전성기의 부활을 맞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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