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가 쓰러졌으니 회사가 무사할 리 없었다. 어쩌면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 터였다. 구직하러. 아무 기약도 없이 입사지원서를 쓰고 쓴 만큼, 죄송하지만 다음 기회 운운하는 답장을 받아야 할 터였다. 자기소개서에는 뭐라고 써야 하나? 배가 쓰러졌다고, 그래서 회사가 망해버렸다고? 넘어온 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때였고 이전 경력은 조선업과 아무 상관 없는, 잡지사 기자였다. 망할! 곧 서른이었다. 내게 열린 문은 거의 없었고 그나마도 오므린 듯 좁았다. 겨우 한시름 놓으신 부모님에게는 뭐라고 해야 하나. 중국에서 일한다니 부럽게 나를 쳐다보던 친구들에게는 또 뭐라고 해야 하나. 아, 왜 이곳으로 왔을까. 왜 그렇게 도망치듯 서울에서, 한국에서 빠져나왔을까. --- pp.16~17
“회사란 집단이 원래 포기가 빠르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돈이 나가도 내 돈이 아니고 책임을 져도 나 혼자 지는 책임이 아니니까요.” --- p.43
“그래 좋은 학교 나와가 뭐할라꼬 이까지 왔습니꺼?” 오 대리는 종종 그렇게 말했다. 늘 자조가 있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밖에서 만나면 가장 먼저 회사의 불합리와 부당을 말했고 정 대리처럼 꾸미거나 에둘러 말하는 법조차 없이, 있는 그대로, 어느 놈 하나 때려잡을 듯이 말했다. 그러면서도 나나 부청, 또 혁준이 그것을 거들면 되레 회사를 감쌌다. “그기 그런 게 아이래예, 회사는 말입니더” 하고 말하는 오 대리의 눈에는 순진한 열정과 오만한 애정이 함께 있었다. (…) 회사가 커오는 것을 오 대리는 두 눈으로 봐왔고 그렇게 될 때까지 생산 일정 관리부터 파리들이 새까맣게 꼬여 죽어 있는 끈끈이를 사무실 천장에서 떼 소각장에 버리는 일까지 안 한 일 없이 다 했으며 볼 꼴, 못 볼 꼴 가릴 것 없이 보고 겪은 사람이었다. 그 많은 일화와 세월이 오 대리에게 무엇을 남겼을까? “회사 좋아하세요?” 일전에 내가 물었을 때 오 대리는 낯 뜨거운 소리라도 들었다는 듯 웃었다. “회사가 뭐라꼬 좋아한다, 만다 합니꺼.” 잠시 후 덧붙였다. “그래도 이기 우리 회사다, 그런 생각은 가끔 하지예.” 나는 동생을 내 동생이라고 말하지 않고 우리 동생이라고 말하는 부산 사람들의 말버릇을 생각했다. --- p.116
월급이란 젊음을 동대문 시장의 포목처럼 끊어다 팔아 얻는 것이다. 월급을 받을수록 나는 젊음을 잃는다. 늙어간다. 가능성과 원기를 잃는 것이다. 존재가 가난해진다. 젊음이 인생의 금화라던 황 사장의 말 역시 수사가 아니다. 이대로 10년, 20년 또 어느 회사에서 삶을 보내든 그 회사가 모두 이렇다면 내 인생의 금화는 결국 몇 푼 월급으로, 지폐로 바뀌어 녹아버릴 테고 나는 그저 노인이 돼 있을 터였다. 그다음은 끔찍하다. 명예퇴직, 권고퇴직, 그런 말 아닌 말로 수십 년 회사 일에만 길들고 늙은 사람인 채 양계장에서 풀어준 노계처럼 세상에 나올 것이다. 남는 것도 끔찍하기는 마찬가지다. 잘해야, 그것도 아주 잘해야 조 상무나 곽 상무 같은 사람이 될 터였다. 그 사람들은 그 방면에서 운과 능력이 모두 탁월한 사람들이었고 그래서 그 나이가 되도록 그 지위와 권세로 회사에 남아 있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황 사장은 어떤가? 불굴의 투사, 불요의 혁신가는? 결국 싸움에서, 이 끝없는 전쟁에서 내쫓기고 내쫓겨 패배하고 실패한 것이 황 사장의 종말이었다. 그래도 어떤 사람이 된다면, 황 사장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또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이렇게 쫓기든, 저렇게 쫓기든 다 그만 아닌가? 모두 늙고 쭈그러든다. 희미하게 옅어지고 사라진다. 그렇지 않은가? --- p.301
“기사, 대리, 과장 한창 젊고 일 잘하고 많이 할 때지. 열심히 해다가 회사에 갖다 바쳐. (…) 임원들은 안 그래도 빡세게 일하는데 더 빡세게 시킬 궁리나 하면서 정작 자기들은 회사 차 타고 골프나 치러 다니고, 내가 니들 때는 그것보다 더했다, 개소리나 하겠지. 그래, 좋아. 그 사람들은 그게 좋고 그렇게 해왔고 또 그만한 터전 다 있으니까 좋다 이거야, 그렇게 살라고. 하지만 그 사람들 밑에서 일 같잖은 일이나 하는 사이에 우리는 늙는다고. 갈 데도 없어지고 새 일을 배울 기력도 점점 더 없어지는 거야. 남는 게 뭐야? 내 인생, 고작 그런 인간들 뒤나 닦아줬다는 거, 그거 하나뿐이잖아. 여기서 지내는 거 좋아. 집값, 술값, 그런 거 다 싸지. 하지만 그렇게 즐기고 누릴 때조차 우리는 늙어, 늙잖아.” 부청은 고개를 끄덕였고 술잔을 비운 뒤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겠냐. 흙수저 물고 태어났으면 다 그런 거지. 별수 없잖냐.” 혁준이 말했다. “야, 다 그렇게 살아. 그냥 다 그렇게 사는 거 아니냐?” 나는 반문했다. “그럼 다 그렇게 죽냐?” 혁준은 잠시 말이 없다가 해죽 웃었다. “아님 말고.” --- p.304
난 조 상무가 너무 싫지만 실은 나랑 비슷한 점이 있다고 봐. 그렇게 위로 올라가고 싶어 하고 또 인정받고 싶어 하고. 그러니까 더 싫어하고 욕하고, 그런 마음이 드는 거지. 사실 마음속으로는 그 사람이 그렇게 나쁜 사람이란 생각이 안 들어. 내가 좋아하지도, 잘할 생각도 없는 일을 그 나이 될 때까지, 또 자기랑 똑같은 윗사람에게 시달리면서 하다 보면 나도 조 상무처럼 될 수밖에 없을 거야. 문제는 너무 고생하면서 일을 한다는 거야. 그 고생을 했으니 나중에 위에 올라가서도 밑에 있는 사람들 고생이 고생처럼 보이지도 않는 거지. 군대에서도 그렇잖아. 별것도 아닌데 체육복 위에 깔깔이 입고 돌아다니는 병장들 보면 대단해 보이고 병장 되자마자 그것부터 하고. 밑에서 개고생해봤으면서 자기도 모르게 까라면 까, 그러고. 다 똑같은 사람인 거야. 내가 뭐라고 그 자리까지 올라가면 다르겠어? 다르게 살지 않으면 다 똑같아지는 거야. 몰라, 아직 다 안 살아봤으니. 하지만 정말 그럴 것 같아. --- p.305
그렇게 죽기는 싫었다. 적어도 나는, 정말 그렇게 죽기 싫었다. 말도 안 되는 인간들 뒤치다꺼리나 하면서, 그런 것이 회사 생활이라고 스스로 강박하고 세뇌하면서 일생을 보내다 늙고 병든 닭이 돼 죽기는 싫었다. 그렇게 살기에 나는 아직 젊었고 내게 남은 인생은 너무 길었다.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젊음이라는 것을 회사 안에서만 놓고 보자면, 내다 팔 수밖에 없는 것으로만 보자면 결국 아무 답도 찾을 수 없었다. 모든 것이 허무했다. 하지만 젊음은 내 위에 앉아 있는 임원들의 것도, 회사의 것도, 월급이나 연금에 저당 잡힌 것도 아니었다. 내 젊음이었고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내게 있는, 또 모든 사람에게 있는 유일한 대지였다. (…) 나는 내 젊음을 되찾아야 했다.
--- p.3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