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인들의 가르침에 망본초란(忘本招亂)이라는 말이 있다. 즉, 근본을 잊어버리면 망한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인간의 삶에서 땅의 건강을 유지하고, 그러기 위해서 땅을 돌보는 일보다 더 근본적인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 사람들에게 ‘땅’이라고 하면 막대한 불로소득을 안겨주는 부동산, 즉 끊임없는 투기의 대상 이외에 어떤 의미가 아직도 남아 있을까. 지금 이 나라는 투기꾼들의 세상이다. 그리고, 바로 그 투기꾼들이 나라의 온갖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탓에 끊임없이 땅을 파헤치고, 죽이는 이른바 ‘개발사업’이 끝도 없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옛 사람들에게 ‘땅’은 만물을 기르는 어머니 대지(大地)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순환적인 패턴으로 돌아가는 자연의 리듬에 순종하면서, 사람끼리 어울려 땀 흘려 땅을 갈고, 씨를 뿌리며, 수확의 기쁨을 나눔으로써만 인간다운 삶과 문화가 유지될 수 있다고 믿었다. 이것은 설명할 필요가 없는 자명한 진리였다. 아무리 잔혹한 전쟁일지라도 땅과 땅을 보살피는 사람들과 그들의 공동체를 뿌리째 파괴한다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그것은 인간생존과 문화의 종언을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땅의 의미는 자본주의 근대의 발흥과 더불어 뿌리로부터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자본주의 문명의 전개는 노동자에 대한 착취의 역사라기보다 세계 전역의 토착문화와 그 문화의 토대인 땅에 대한 체계적인 유린과 공격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는 땅을 사고팔 수 있는 상품으로 전환시킴으로써 그 땅을 기반으로 살아온 사람들의 공동체적 삶을 가차없이 망가뜨리고, 오로지 소수 특권층의 배타적인 ‘행복’을 증진시켜왔다. 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무엇보다도 땅 그 자체의 생명력이 거의 회복불능의 수준으로 훼손되었다.
하지만, 그러한 파괴는 궁극적으로 자본주의 체제 자신의 붕괴를 가져올 밖에 없다. 그 징후는 이미 기후변화, 피크오일, 식량 및 금융위기 등등 수습하기 어려운 다양한 생태적, 사회적, 정치적 위기를 통해서 세계 전역에 걸쳐 갈수록 뚜렷해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가 스스로를 자제하여 파괴의 속도를 줄이거나 멈추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자본주의란 본질적으로 자기제어 능력을 철저히 결여한 메커니즘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사회는 ‘땅’을 유린하는 것을 대가로 하여 얻은 ‘경제적 성공’에 두뇌가 마비되어 침로(針路)를 잃어버린 사회가 되었다. 지금 이 사회는 ‘경제’라는 일원적 가치를 위해서라면 모든 인간적인 가치가 희생되어도 좋다고 하는 분위기가 만연해 있다. 그 결과, 이 사회는 무엇 때문에 ‘근대화’를 지향하고, ‘경제발전’을 추구해왔는지 참으로 알 수 없는 기묘한 사회로 변해버린 것이다. 일찍이 이보다 더 인간성이 파괴되고, 인간관계가 망가진 흉흉한 사회가 있었던가. 말할 것도 없이, 이것은 이른바 ‘압축적’ 근대화에 성공한 사회로서 당연히 치러야 할 대가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 기초적인 사실을 오늘의 한국인들이 순순히 인정한다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경제적 성공’이 바로 인간다운 삶의 ‘실패’를 의미한다는 것은 이제 겨우 ‘선진적’ 삶을 향유하기 시작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로서는 가장 받아들이기 힘든 진실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가혹한 진실이라도, 진실을 언제까지 외면할 수는 없는 일이다. 길게 말할 것도 없이, 이제 ‘단군 이래 최대의’ ‘번영’과 ‘풍요’도 거의 끝나가고 있음이 확실하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금까지 해왔던 것을 더 많이 투입함으로써 사태를 개선하려는 가망없는 노력이 아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사태의 핵심을 직시하고, 우리가 정말 지향해야 할 ‘선진사회’란 대체 무엇이며, ‘좋은 삶’이란 과연 무엇인지, 근원적으로 사색할 줄 아는 비판적 능력을 회복하는 일일 것이다.
이 책은 『간디의 물레 ― 에콜로지와 문화에 관한 에세이』(1999년)를 펴낸 이후 지금까지 내가 주로 『녹색평론』에 썼던 글들을 한 권의 책으로 묶은 것이다. 『녹색평론』 100호를 기하여 내놓는 이 책의 준비과정에서 나는 『간디의 물레』 이후 내 생각에 일어난 약간의 변화의 흔적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변화는, 간단히 말하면, 근년에 이르러 이반 일리치의 생애와 사상이 내게 갈수록 중요한 비중을 차지해온 점과 크게 관계되어 있을 것이다. 일리치는 우리의 삶에서 ‘우정’이 갖는 중심적인 의의에 대해서 나를 깨우쳐주었고, ‘우정’에 기초한 새로운 정치적 공동체의 가능성을 꿈꿀 수 있게 해주었다.
나아가서 일리치는 내게 실제로 좋은 벗들을 불러다주었다. 내가 오랜 직장이었던 대학을 그만두고 서울로 자리를 옮긴 뒤, 나의 제안으로 시작된 ‘이반 일리치 읽기모임’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벌써 4년이 넘었지만 대부분 초기회원들이 계속해서 참가하고 있는 이 모임을 통해서 나는 대학생활에서는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진정한 ‘우정’의 의미를 음미할 수 있게 되었다. ‘우정’은 사심없는 마음, 자기희생의 정신 없이는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우정’이야말로 지금 세계를 황폐화하는 자본과 국가의 논리에 맞설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인지도 모른다.
아무리 암울한 시대일지라도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데 필수적인 ‘희망’을 제공하는 원천이 바로 ‘우정’이라고 일리치는 말했다. 그의 말은 실제로 ‘일리치 읽기모임’을 통해서 빈번히 입증되었다. 나는 이 책이 이 모임의 벗들에게 하나의 작은 선물이 되기를 염원하면서 책을 내놓는다. --- 머리말 중에서
생각하면 할수록 암울한 상황이다. 명백히 파국으로 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금 근본적인 방향전환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 환경이냐 경제냐 하는 양자택일을 늘 강요하는, 그렇게 함으로써 사고를 단순화시키고 비판적인 물음을 봉쇄하기 일쑤인 오늘날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권력들에 대하여 우리는 그들이 세계화의 이름으로 지금 우리더러 가자고 하는 방향은 공멸의 길이라는 것을 말해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한 말을 해줄 수 있는 용기와 자신감은 무엇보다 사물의 근본을 들여다보고, 되풀이하여 물어볼 수 있게 하는 우리 자신의 비판적 상상력에 달려있다. 농민과 농촌공동체가 사라지고, 수천년 동안 인간문화의 핵을 구성해왔던 농적(農的) 가치들의 재생산 기반이 돌이킬 수 없이 상실되어버린 뒤에 과연 우리는 어떻게 인간다운 삶을 계속할 수 있을 것인가 ― 이것은 우리가 지금 무엇보다도 먼저 물어보아야 할 물음이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