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에서 우리는 오늘날 제국주의와 신자유주의에 대항해 생겨나고 있는 ‘반발의 발화지점’들에 주목하고, 그러한 발화지점들을 만들어내는 정치적 추세에 대한 신중하고도 냉정한 분석을 시도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분석의 초점은 전적으로는 아니더라도 주로 중동과 중남미에 맞췄다. 반발의 발화지점들이 집중돼 있는 이들 두 지역 가운데 하나는 제국의 모순이 가장 첨예하게 나타나는 곳이고, 다른 하나는 신자유주의의 모순이 가장 첨예하게 나타나는 곳이다. 그렇지만 제국적 권력의 모순과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모순이 서로 연결돼 있다는 점에서는 두 지역에 차이가 없고, 이 두 가지 모순에 대한 반발의 움직임도 두 지역 모두에서 서로 연결돼 있음은 물론이다. 이러한 반발을 뒷받침하고 있는 정치운동의 잠재력과 한계에 대해 면밀한 검토를 하는 것도 또한 우리의 목표다. --- pp.5~6
그렇다면 이슬람주의 운동의 반제국주의를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 이슬람주의는 새로운 제국에 대해 강력하게 반대하는 모습을 일정하게 보여줌으로써 서구의 강대국들, 특히 미국의 전략적 이익에 흠집을 내는 역할을 해온 것이 사실이다. 이슬람주의자들은 미국의 중동정책, 그 중에서도 특히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미국의 정책에 대해 오랜 세월 이어져온 대중적 항의의 선봉에 서왔다. 그들은 중동지역의 비종교적 권위주의 정권과 맞섰고, 중동지역 가운데서도 특히 이란, 이라크 및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미국의 통제체제를 위축시키거나 교란시켜 그 체제가 안정화하지 못하게 방해했다. 그러나 과연 그동안 이슬람주의가 현실적으로나 이론적으로나 제국주의의 지배에 대한 실현가능한 대안을 제시할 수 있었던가? 사회주의는 현실적으로는 결국 실패했지만 사회적 정의와 피억압 계층의 해방을 위한 강력한 이론적 모형을 만들어냄으로써 일정 기간 영향력을 유지했고, 그 모형은 자본주의의 헤게모니에 대한 견고한 대안을 제시했다. 한동안은 사회주의가 부르주아적 가치의 이데올로기적 토대와 자본주의 경제모형에 타격을 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슬람주의의 경우는 달랐다. --- pp.98~99
이슬람 근본주의는 좌파의 몰락으로 생겨난 빈 공간을 메웠고, 곧이어 서구의 지배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반대세력으로 떠올랐다. 이슬람 근본주의는 서구의 지배에 반대하는 측면을 처음부터 갖고 있었지만, 세속주의 민족운동의 시대에는 이슬람 근본주의의 이런 측면이 약했다. 그러다가 시아파 이슬람교에서는 1979년에 이란에서 일어난 이슬람혁명 이후에, 수니파 이슬람교에서는 1990년대 초 이후에 각각 서구에 대한 강한 반대가 지배적인 조류가 됐다. 특히 수니파의 경우에는 소련이 미국과의 경쟁에서 패배하면서 해체되고 미국이 군사적으로 중동에 복귀한 뒤로 전투적인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싸움의 대상을 소련에서 미국으로 바꿨다. --- p.123
그렇다면 현재 이라크의 실제 상황은 어떠한가? 첫째, 제국주의 군대, 민간인 용병, 반관반민의 민병대 등이 이라크를 점령하고 있고, 이들 세력 모두가 아무런 법적 제약도 받지 않는 가운데 활동하고 있다. 둘째, 시민의 권리나 국가적 합의보다는 지배와 예속의 관계망에 토대를 둔 지역적 정치체제가 형성돼있다. 셋째, 선거와 헌법제정에도 불구하고(또는 그것 때문에) 정부가 권위도 정당성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과거의 사회적 계급을 대표하는 집단들이 의기양양하게 복귀해 정부행정을 장악하고 국가기구를 지배하고 있다. 이는 커다란 역사적 퇴보에 해당한다. 넷째, 2003년 3월 이후로 엄청난 사회적, 경제적, 인간적, 환경적, 제도적 파괴가 수반되는 전쟁의 상황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 전쟁은 이전의 지배집단을 상대로 하는 전쟁이 아니라 국민 모두를 상대로 하는 전쟁이다. --- p.146
이라크에 대한 제국주의적 지배의 목표는 국가를 다시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정치적으로 통합돼있던 국가적 공간을 조각내는 것이다. 그 결과로 민족별, 문화별, 종교별 조각들의 모자이크와 같은 것이 형성되고 있고, 이런 상황은 다시 정치적 질서 회복을 명분으로 하는 개입을 정당화하는 이유로 제시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정부가 제국주의 군대와 정치적, 경제적 국제기구는 물론이고 다양한 비정부기구(NGO)의 도움까지 받아가며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정치제도의 배열과 국가기관의 형태가 이라크 국민에 의해서가 아니라 제국주의 세력과 그 세력을 대변하는 조직에 의해 결정되고 있다. --- p.155
포위(또는 폐쇄)는 팔레스타인에 대한 식민주의적 통제와 응징을 위해 이스라엘이 동원한 수단 가운데 가장 파괴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팔레스타인에 대한 이스라엘의 포위란 근본적으로 수백 개의 도로차단 시설과 모두 546개에 이르는 검문소를 설치하고 이를 통해 팔레스타인 사람들로부터 이동할 자유를 박탈한 것을 말한다. 이런 폐쇄조치는 요르단 강 서안지구와 가자지구 사이에 물자나 사람이 이동하는 것이나 이들 두 지구에서 이스라엘을 비롯한 외부세계로 나가는 것을 막는 데 그치지 않고 요르단 강 서안지구 안에서 이동할 자유까지 막는다. 일차 인티파다 때인 1991년부터 이스라엘이 취하기 시작한 이러한 조치는 오슬로협정에 반영되면서 더욱 강화됐고, 이차 인티파다가 시작된 뒤로는 더욱 더 대대적으로 강화됐다. 그 결과로 오늘날 요르단 강 서안지구의 40퍼센트에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접근할 수 없다. --- pp.178~179
차베스는 “볼리바르 혁명은 ‘21세기 사회주의’를 건설하려는 것”이라는 선언을 2005년 1월에 브라질에서 열린 세계사회포럼(World Social Forum)에서 처음 했다. 그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자본주의로 우리의 목표를 달성하기는 불가능하다. 중간의 길을 찾는 것도 불가능하다. 나는 베네수엘라의 국민 모두에게 새로운 세기의 사회주의로 가는 길로 행진하기를 권한다. 우리는 21세기에 새로운 사회주의를 건설해야 한다.” 이어 그는 2006년에 실시된 대선에서 63퍼센트에 가까운 득표로 다시 대통령에 당선된 다음 2007년 초에 일련의 연설을 통해 이렇게 선언했다. “볼리바르 사회주의 혁명의 새로운 단계가 시작됐다. 1998년부터 2006년까지는 이행의 시기였다. 이제 볼리바르 사회주의를 구축하는 단계가 시작됐다.” --- p.253
브라질에서는 대체로 보아 밑으로부터의 자율적인 대중적 행동 없이 노동자당이 국가권력을 확보했고, 그래서 브라질의 민중적 계급들은 노동자당 정부가 지구적 자본주의에 대항해 민중적 정책 프로그램을 실시하도록 대중적 압력을 가할 수 없다. 브라질 모델은 혁명적인 집단이 국가권력을 장악하더라도 그 집단으로 하여금 국가기구를 통해 민중적 계급들의 이해관계를 돌보도록 압력을 가할 밑으로부터의 민중적 대항력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지구적 자본의 구조적인 힘이 국가권력에 직접 작용해서 지구적 자본주의의 기획을 강요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바로 이런 방식으로 지구적 계급투쟁이 국민국가를 통해 관철되는 것이다. 이처럼 브라질에서 밑으로부터의 민중적 압력이 대중적으로 동원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 나라의 지배집단이 노동자당 정부를 통해 자기들의 이익에 대한 도전을 흡수해낼 수 있다는 뜻이다. --- pp.264~265
오악사카의 봉기는 전국 교사노조의 제22지부가 2006년 5월 초에 일으킨 파업에서 시작됐다. 제22지부의 교사들은 오래 전부터 민중운동에 대해 ‘유기적 지식인’의 역할을 수행해왔고, 이와 동시에 전투적 노조활동을 하면서 노조와 노동자들 사이의 폭넓은 연대를 실현시키는 촉매의 역할을 해왔다. 그들은 또한 권위주의적인 전국 교사노조 안에 존재하는 민주적인 교사들의 전국적 연대에서 핵심적인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들이 오악사카 주의 곳곳에 포진해 있다는 점, 학부모들과 곳곳의 마을들과 연결돼 있다는 점, 아이들을 위해 더 나은 학교를 짓고 학용품과 식사를 공급하라는 것을 자기들의 요구사항에 포함시켜 주장해왔다는 점 등으로 인해 민중계급 사이에 그들의 영향력이 컸고, 그들에 대한 민중계급의 신뢰도가 높았다. 그들은 교사의 봉급을 올려달라는 요구와 가난한 학생들에게 학자금 보조를 해달라는 요구를 함께 내걸었다. 협상이 완전히 깨지자 교사들은 자기들에게 동조해주는 사람들과 함께 중앙광장과 그 주변의 도로에서 점거농성에 들어갔다. --- pp.424~425
그러나 서유럽 젊은이들의 항의에 담긴 시대정신과 동유럽 젊은이들의 항의에 담긴 시대정신은 매우 다르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도 중요하다. 서유럽 젊은이들이 팔레스타인산 스카프와 수건을 흔들고, 두건과 마스크를 쓰고, 돌을 던지는 등 갖가지 시위방식을 구사하는 모습을 텔레비전에서 보고 부러워하던 동유럽 젊은이들이 아무리 그런 모습을 흉내 낸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흉내와 결합되는 것은 권위주의와 인종주의 같은 것들이라는 점에서 다르다는 것이다. --- p.481
2005년에 방리외 지역에서 일어난 봉기는 오늘날 프랑스 사회에서 작동하는 저항과 파편화의 사회적, 정치적 과정을 잘 보여주는 강력한 사례다. 2005년 10월 27일의 늦은 오후에 파리의 외곽인 클리시수부아(Clichy-sous-Bois)에서 아프리카 말리에서 온 이주노동자의 아들인 부나 트라오레(Bouna Traore, 15살)와 역시 이주노동자로 터키계 튀니지아인의 아들인 지에드 베나(Zyed Benna, 17살) 등 두 명의 십대 청소년이 경찰을 피해 한 변전소에 숨다가 감전사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두 청소년의 사망에 자극되어 프랑스 내 여러 도시의 방리외 지역들에서 3주간에 걸쳐 소요가 일어났고, 경찰과의 충돌이 발생했다. 그것은 경찰 및 치안병력과 충돌한 소요로는 1968년 5월 이래 가장 심각한 것이었다. --- pp.494~495
신자유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대안의 축적체계를 건설하는 것을 통해서만 이루어낼 수 있는 경제적 변혁과 정치적 변혁 둘 다가 필요하다. 이런 기획은 일련의 근본적으로 재분배적이고 민주적인 경제정책 이니셔티브들을 통해 신자유주의의 물질적 토대를 체계적으로 해체하는 작업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러한 정책은 소득, 부, 권력의 분배구조가 보다 덜 불평등한 형태로 결정적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뒷받침함으로써 민주주의의 기본적인 조건을 실현할 것이다. 이러한 정책의 실행을 단순히 정부에 일임할 수는 없다. 이러한 정책은 정치적으로 재조직된 노동계급이 그 자신을 경제적으로 재구성하는 주된 방법의 하나로 밀어붙여야 한다. --- p.561
신자유주의는 정치적 발화지점을 계속 만들어내고 있고, 그러한 정치적 발화지점들은 신자유주의의 흡인력을 약화시키고 지배계급으로 하여금 어쩔 수 없이 지구적 야망의 수준과 내용을 재조정하게 만들고 있다. 세계무역의 불균형, 군사적 점령의 모순, 소득과 고용의 사회적 불평등, 사유화된 공공자산의 비효율성과 독점화, 지구적 생태위기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서 탄소거래제를 비롯한 오염권 거래시장이 보여주고 있는 실패…. 이 모든 것이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사회적, 정치적 투쟁을 불러일으키고 있고, 그 가운데는 우리에게 새로운 영감을 주는 투쟁도 적지 않다. 그러나 좌파가 생명력 있는 집단적, 민주적 조직화 역량을 새롭게 기르지 않는 한 지구적 신자유주의라는 야만은 지구의 모든 곳에서 앞으로도 매일같이 공포를 야기할 것이다.
--- pp.586~5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