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이 많은 노련한 수사관이라면 증인의 진술이라는 게 그다지 신뢰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이 사건에서처럼 서로 전혀 알지 못하는 수많은 증인들이 앞다투어 황당한 증언들을 쏟아낸 것은 이성적으로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일이죠. 저마다 이상한 소리를 하는 탓에 사건은 거의 완벽한 퍼즐 놀이가 되지 않았습니까? 모든 진술을 다양한 관점에서 검토를 해야만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혹시 무슨 착각을 한 것은 아닌지, 기묘한 영웅심에 빠져 공상을 늘어놓는 것은 아닌지, 끝없이 살펴야만 합니다. 특히 공개수사의 경우 목격자들이 하는 이야기는 신중하게 가려들어야만 합니다. 의미 있는 정보를 가려내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보충 질문을 던져보는 자세가 꼭 필요합니다.” 두 노련한 수사관들은 입을 모아 이렇게 말했다.--- p.166
따라서 다음의 결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정도로 중요하다. 전문가가 물증을 설득력 있게 해석하기 전에는 어떤 사람이 범인인지 아닌지 절대 판단하지 말라. 사건과 어떻게든 관련이 있는 물증이고 앞뒤 정황이 맞아떨어진다면 세계의 어떤 법정이든, 심지어 여론 재판이든, 이 물증을 꼭 새겨들어야만 한다. 배심원들 역시 마찬가지다. 증거를 요구하고 증거를 올바로 해석하라. 그 밖에 다른 것 이를테면 추측, 억측, 충고, 피의 사실 사전 유포로 인한 여론 따위는 깨끗이 잊어라. 그런 것은 경솔하고 경박할 뿐만 아니라 잘못된 부정이다. 더욱이 우리의 소중한 시간까지 앗아가는 죄악이다.--- p.243
저 남자가 정말 그런 일을 저질렀을까? 하지만 사실 이런 질문은 무의미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어디까지나 물증일 뿐,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만드는 선입견이나 편견은 사건의 실체에 접근하지 못하게 만드는 방해물일 뿐이니 말이다.--- p.249
일반화라는 것은 언제나 잘못이다. 세상과 사람을 미리부터 굳어진 시각으로만 바라보는 것 역시 잘못이다. 그 같은 굳어진 시각으로 바라보는 탓에 이른바 과학수사에 종사하는 많은 법의학자들이 사람들 눈에는 별종으로 보이는 모양이다.--- p.255
이 책에서 소개한 범인들 못지않게 세상에 등을 돌리고 엽기적으로 살아가는 괴짜, 얼간이, 기인, 완벽주의자 등은 차고 넘쳐난다. 그래도 이들은 평생 범죄라는 것을 저지르지 않고 살다가 간다. 과연 선과 악의 경계는 어디서부터 시작할까? 똑같은 환경에서 자랐으면서도 누구는 선량한 시민으로, 또 누구는 악의 소굴로 빠져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같은 유전자를 가졌음에도 아버지는 화학 박사이고, 아들은 희대의 살인마로 갈라지는 지점은 어디일까?--- p.387쪽
사실 선과 악의 경계는 너무나 희미해서 우리가 알아보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컴퓨터 전문가가 마음 한번 삐딱하게 먹으면 해커로 돌변하는 거야 시간문제 아닌가. 또 실험실에서 연구에 몰두하던 과학자가 알고 보니 자기 집 지하실에서 사제 폭탄을 만드는 테러범일 수도 있다. 툭 하면 난동을 부리며 욕설을 일삼는 운동선수에서 걸핏하면 주먹을 휘두르는 남편, 질투에 눈이 먼 나머지 충동적으로 살인을 저지르는 애인에 이르기까지 여차하면 악의 구렁텅이로 빠져드는 인간의 약한 모습을 우리는 너무나 익히 알고 있다.--- p.387
배심원이나 증인이나 법정에서는 똑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 딱딱하고 메마른 자연과학적 사실을 다루어본 일이 없거니와, 그런 것을 가지고 생각할 훈련은 더더욱 되어 있지 않다. 또 어디서 그런 것을 알겠는가?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은 ‘과학적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저마다의 생각과 감정, 관심과 흥미, 나날이 누리는 소소한 재미 등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게 우리네 삶이지 않은가. 법정에서 치열한 공방이 오갈 때에도 법률 전문가가 아닌 보통 사람들은 피고가 대체 어떤 사람인지 그 성격에만 관심을 가질 뿐, ‘자료’니 ‘사실’이니 하는 것에는 눈을 질끈 감아버리기 마련이다. 또 그게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바로 그래서 소송 당사자들 가운데 어느 한쪽이 악의를 품게 되면 온갖 꼼수와 왜곡과 조작이 판을 치며 재판을 엉망으로 만들어버릴 위험이 상존한다.
--- p.4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