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1990년대 초부터 「장미와 주판」(‘장주’,www.sophy.pe.kr)을 중심으로 인문학 공동체 운동을 꾸려오면서 겪고 누리고 공부하고 실천한 일들을 토대로 씌어졌다. 인문(人紋)으로 존재를 증명할 수 없는 시대에, 체제와의 창의적?부사적 불화를 촉매로 연대한 동무들의 인문 좌파적 실천이 이 글들의 바탕이었고 그 결실이었다. ‘동무’라는 새로운 관계를 생활양식의 슬기와 근기, 그리고 온기로써 살아내지 못하면 이론도 제도도 상상도 공허하다는 실감이 그 바탕이었다. 무능과 부재의 급진성만으로 가능한 ‘지는 싸움’은 걷다가 죽는 것인데, 기꺼이 걷다가 죽으려는 동무들에게 이 책이 작은 위안과 지침이 되기를 바란다. --- 서문 중에서
삶의 인드라망 속에서 피할 수 없는 노릇이긴 하지만, 결심, 고백, 약속, 참회, 그리고 용서와 같은 심리적 결절로 세상을 바꾸려는 노력은 안타깝지만 대체로 실패한다. 의도와 관념에서 출발하는 방식은 필경 자신이 만든 거울 속에 갇히기 때문이다. 종교나 도덕이, 호의와 다짐이 대한민국을 바꾼다면, 우리는 지금쯤 천국에 살고 있을 테다. ---p.22
글이 이해되지 않는다고 할 때, 그것은 글의 문제이기 이전에 보다 중요한 뜻에서 그것은 세속이 구비하고 있는 응답의 가능성과 그 한계의 문제다. 세속과 읽히는 책의 공모는 그 응답의 가능성과 한계를 규제하고 조작함으로써 계속된다. 그리고, 글쓰기의 신뢰는 바로 이 가능성과 한계에 대한 새로운 통찰이 열어주는 공간 속에서 낯설고 힘들게 건설되는 것이다. 내 글이 나의 타자가 되는 그 어려운 응답 속에서 내 글은 길게 돌아오는 나의 손님이 된다. ---p.107
당신이 아는 한, 그 현실의 코드, 혹은 그 코드의 환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소식은 ‘친구’밖에 아무것도 없다. 왜 ‘친구’밖에 없는가? 그것은 바로 당신이 ‘친구’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며, 아니었고, 또 아닐 것이라고 주문하며 반복하기 때문이다. 그 모든 인간들이 소비자로 살아가는 이 ‘마지막 인간’(니체)의 시대에, 당신의(이라는) 친구는 그 소비자적 존재와 부질없이 대치하는 물신(物神)이기 때문이다. 끝내 당신의 공부도, 경험도, 연륜도, 종교도, 운명도, 당신을 바꾸지 못했기(하기) 때문이다. ---p.199
말이 인문학적 실천의 전부는 아니되 그 생략할 수 없는 본령이므로 세상과 간여하려는 인문학도들의 노력은 말/글의 다양한 실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물론 “말이 통해서 말만큼 살 수 있는 세상”이란 이같은 노력의 시행착오가 조금씩 열어가는 생활의 진경(進境)이자 진경(珍景)을 가리킨다. 이 글은 이 진경을 향한 도상의 모습을 몇 가지의 제도적 표상--친구, 연인, 가족, 종교, 관료제 등--에 집중해서 묘사하거나 분석한 것이다. 이 논의의 맥락을 다소 과장되게 일반화한다면, ‘가족’이나 ‘친구’는 ‘말이 필요없는 관계’이며, ‘연인’이란 ‘말이 통하지 않는 관계’인 셈인데, 이와 대조적으로 ‘동무’란 무엇보다 말이 중요하고, 또 말이 통하는 관계를 향한 지속적이며 부사적(副詞的)인 섭동(攝動)의 노력이다. ---p.222
세속이 슬픈 이유는 악(惡) 때문이 아니다. 전두환의 폭압이나 내 돈을 떼먹고 달아나는 악덕 상인이 세속을 슬프게 하는 것이 아니다. 굳이 분류하자면, 그들은 세상을 ‘아프게’할 뿐 슬프게 만들진 못한다. 나치의 홀로코스트나 소련의 굴락(Gulag)은 뼈아픈 현실이지만, 정작 슬픈 것은 아픔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아픔의 그늘 아래 피해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미시적 오해와 상처의 착종이다. 마치 부모의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부모의 유산을 놓고 하이에나처럼 으르렁거리는 자식들의 욕심과 그 상처가 슬프듯. 조국을 되찾기 위한 의열단원의 죽음이 슬픈 게 아니라 되찾은 조국에서 김창룡과 조소앙의 뒤바뀐 운명이 슬프듯.
슬픔은 적(敵)들의 횡포 탓이라기 보다 오히려 친구들의 선의와 그 무모함에, 연인들의 호의와 그 어리석음에, 가족득의 애착과 그 타성에 얹혀 생긴다. ---p.265
그러나 인문-종교-예술은 그 무능의 텅 빈 중심 속에서 미래의 급진적 가능성을 배태하는 존재론을 고집해야 한다. 그것은 늘 소수의 것이며 미래의 것이며 끝내 이룰 수 없는 것이며 지는 자들의 것이다. …… 인문-종교-예술은 워낙 더 떨어질 곳이 없는 자리에서 운신하며, 그 낮은 빈 자리를 급진화시키는 방식을 통해서만 자신의 의미와 가치를 (미래완료적으로) 증명한다.
지는 방식, 혹은 무능의 어떤 것 속에서 인문은 오히려 타락한 현재의 공시와 세속의 통시를 고스란히, 힘없이, 그러나 미증유의 비판적 풍경으로 드러낼 것이다. 그 타락한 세속과 사회적 관계를 맺지 않으려는 희생양들의 속절없는 죽음과 그 무능은, 역사귀류법적 진실이 되어 그 모든 희생된 가치의 비판적 무게로써 자본주의적 유능을 내리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 pp.458~4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