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4월, 중국공산당 제7회 전국대회에서 마오쩌둥은 「연합정부론」이라 이름 붙인 「정치보고」를 했다. 여기에서는 국민당이 제6회 전국대회에서 제기하려고 했던 국민당 중심의 정권 구상에 맞서, 제2차 세계대전 종결을 목전에 두고 앞서 말한 신민주주의론을 기본으로 한 신국가 건설구상을 제기했다. 마오쩌둥은 이 구상에서 실현되어야 할 국가와 사회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중국은 신민주주의 제도가 실행되는 모든 기간 동안, 한 계급이 독재를 하거나 한 정당이 정부기구를 독점하는 제도를 실시할 수도 없고,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 러시아 제도와 구별되는 특수한 형태로, 여러 개의 민주계급이 연맹한 신민주주의 국가 형태와 정권 형태는 오랜 기간을 거쳐 마침내 태어날 것이다”(『마오쩌둥 선집』 2권).
국민당 일당독재의 공포, 내전의 혼란에 따른 극도의 피폐, 식량부족, 격심한 물가상승에 따른 기아 등등에 고통스러운 민중, 민주적이고 공정한 정부의 출현을 원하는 반국민당, 비공산당 계열의 민주세력과 지식인들은 마오쩌둥이 제창한 신민주주의의 연합독재정권을 강하게 지지하게 되었다. 공산당은 이에 부응하여 새로운 국가의 기본강령으로서 민주 제당파와 무소속 인사들과 함께 작성한 「중국인민정치 협상회의 공동강령」을 1949년 6월에 채택하고 새로운 국가의 근간으로 정했다.
-35~36쪽, 「새로운 중국 구상」
왜 이다지도 처참한 정치적 사건이 대약진운동의 비극으로부터 불과 5년도 못 되어 다시 발생했을까? 이러한 물음에 답할 수 있으려면, 우리는 그것을 단순히 권력 투쟁으로만 묘사해서도 안 되며, 숭고한 이념이 정치 투쟁의 거센 파도 속에서 배반당해 침몰하는 ‘역설적인’ 비극으로 묘사하는 것만으로도 불충분하다. 문화대혁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오쩌둥을 정점으로 한 지도층의 국내·국제정세에 대해 갖고 있었던 강렬한 위기의식과 권력장악 의도를 파악하는 동시에, 학생·노동자·농민 등 일반 서민 사이에서 싹트고 있던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불만 등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눈을 돌려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요소들이 서로 영향을 끼쳐 발생한 현상으로 인식해야만, 그것이 얼마나 격렬했으며 대규모였는지를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서도 결국 문화대혁명을 이해하기 위한 가장 핵심적인 요소는 역시 마오쩌둥을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에 달려 있다.
-79~80쪽, 「문화대혁명이란 무엇인가」
1972년 2월 닉슨의 중국 방문은 중국의 국제노선이 변화하고 있음을 전 세계에 알린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1970년대 중국의 대외 노선은 미 제국주의와 소련 사회제국주의라는 두 패권주의에 맞서는 것으로 곧잘 언급되는데, 겉으로 아무리 소리 높여 주장했어도 실질적으로 중국과 미국 관계는 급속히 개선되었고 소련과의 적대관계는 심화되었다. 그리고 그 기점은 닉슨의 중국 방문이었다.
-122쪽, 「닉슨의 중국방문」
1989년 4월 15일, 자유주의적인 지도자로서 실각 후에도 인기가 높았던 후야오방 전 총서기가 심근경색으로 갑자기 타계했다. 이 뉴스를 접한 학생과 지식인들은 그를 추도하고, 업적을 찬양하는 집회를 개최했는데, 이러한 움직임이 후야오방의 ‘명예회복 요구’로 바뀌고, 곧 ‘독재주의, 봉건주의 타도’·‘헌법에 규정된 기본적인 인권 옹호’·‘자주적인 학생 조직의 결성’·‘민영신문 발행 허가’ 등을 요구하는 민주화운동으로 확대되었다. 이에 대해 당국은 처음에는 묵인했지만, 4월 25일에 덩샤오핑이 학생운동을 “계획적인 음모이고 동란이다. 그 실질은 당의 지도와 사회주의를 근본부터 부정하는 것이다”라고 엄격하게 비판했다. 이에 이어서 다음 날 『인민일보』에는 「기치선명하게 동란에 반대하자」라는 제목의 사설이 발표되었고, 민주화운동은 또 다시 중단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학생들이 이 ‘결정’에 강력히 반발하면서, 운동의 흐름은 오히려 일시에 확대되었다. 같은 시기 당국 ‘결정’이 한창인 때, 북한을 방문하고 있던 자오쯔양이 귀국해 학생운동은 ‘동란’이 아니고 ‘애국적인 민주운동’이라고 발언함으로써, 당내 지도부도 덩샤오핑 등 장로파 및 리펑 등 보수파 집단과 자오쯔양 등 적극적인 개혁파 집단 간에 대립이 표면화되었다.
-168~169쪽, 「후야오방 추도에서 덩샤오핑 비판으로」
2000년대의 10년간을 돌이켜보면, 정치참가의 확대와 지도자 권력 남용에 대한 효과적인 견제 장치의 형성, 언론보도의 자유를 뜻한 정치의 민주화와 법치화는 거의 발전하지 않았고, ‘화해사회’, 혹은 중국발전의 보편적 가치와의 융합도 실현되지 못했다.
이것이 실현되기 어려웠던 원인을 꼽자면 첫째, 가득 쌓인 사회적 불만보다도 공산체제의 안정이 최우선이었기에 비판세력을 철저하게 탄압했던 것과 둘째, ‘강대국 중국’ 실현을 위한 강력한 요청을 위해 성장주의노선을 최우선으로 삼았던 것, 그리고 셋째, 엘리트 계층을 중심으로 강대한 기득권층이 형성된 것, 넷째, 장쩌민세력이 ‘보편적 가치’ 비판을 하면서 원자바오의 주장에 반기를 들고, 중국 특수론과 보편주의의 대립을 한층 더 선명하게 만들었다는 것 등이 있겠다. 후진타오도 원자바오도 스스로 지위를 지키기 위해서 기득권층 그룹, 특히 장쩌민과 군 지도층에 양보하고 타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종장에서도 다루지만, 그래도 정치적 민주화를 둘러싼 새로운 움직임이 싹트기 시작한 것만큼은 확실하다.
-226쪽, 「중앙공산당 제17회 전국대회의 시도와 좌절」
‘중화민족의 꿈’은 중국인에게 이상세계의 실현일 것이다. 그러나 자신만의 방법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꿈’을 강요한다면 저항과 반격이 있을 수밖에 없다. 시진핑을 위시한 지도층들이 다시금 명심해야 할 가장 중요한 점은 이제까지의 중국의 발전은 오직 중국 혼자의 힘으로 거둔 성과가 아니라, 다른 국가와의 협력과 국제사회의 협조, 상호의존관계가 심화되는 가운데 실현된 것이라는 점이다. 국제사회의 가치와 규칙을 존중하고, 국제사회와 함께 살아가며, ‘중국의 고뇌’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 마주하고 새로운 접근을 하는 것이야말로, 참된 ‘중화민족의 꿈’을 가능하게 하는 길일 것이다.
-245쪽, 「중국 위협론 극복의 열쇠는?」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