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늘 가까이 두고 보는 그림으로 장승업의 〈호취도(毫鷲圖〉가 있다. 그 그림은 내가 실의에 빠졌을 때나, 혹은 만사가 귀찮아지면서 왜 살아야 하는지 회의가 들 때,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 호방함이 온몸으로 전해지면서 삶의 용기를 치솟게 하는 그림이다. 나뭇가지 아래?위에 앉은 두 마리의 매를 몰골화법(沒骨畵法 ; 그림을 선이 아닌 음영이나 농담으로 그리는 기법)으로 단숨에 그렸다는 그 그림에는 강렬한 투쟁과 팽팽한 긴장감이 살아 있다. 먹잇감을 노려보며, 곧 하강할 것 같이 몸을 한껏 도사린 윗매의 날렵한 동작과는 달리, 태연히 목을 꺾고 앉아 당당하게 상대를 올려다보는 아랫매의 여유에는 윗매를 조롱하는 듯한 조소가 전해진다.
오원 자신의 삶을 빗댄 것 같은 그 그림에는 아래에 있는 그를 향해 항상 이빨을 드러내는 상류사회를 향한 그의 분노의 메타포가 서려 있는 듯하다.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온몸으로 맞서려는 아랫매로 상징되는 그의 기상이 너무나 힘차, 볼 때마다 동양화답지 않은 치열함이 느껴진다.
--- p.32
대중문화란 대중의 사랑을 받아야 한다는 유혹 때문에 늘 대중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다. 그래서 때로는 치기나 억지를 부려도 시청률만 올리면 그만이라는 의식이 팽배해 있는 것이다.
나는 30여 년간 연출을 하면서 이름에 혹해 스타를 쓴 일도 없고, 그들 이름에 기대어 내 작품을 띄워보려고 한 일도 없었다. 작품을 내용으로 승부하려 했지, 포장으로 시청자를 현혹하려 들지 않았다는 말이다. 나는 삶에 있어서 무엇을 얻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무엇을 추구하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여기며 살아왔다. 사람이 그냥 사는 일은 조금만 노력하면 그리 어렵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자존심을 지키고 산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자존심을 버리면서 무엇을 얻고자 황망히 뛰어다니지 않았고, 또 앞으로도 그리하지 않을 작정이다.
--- p.150
현대인은 일탈을 꿈꾼다. 하던 일을 집어치우고 어딘가로 잠적해 버리고 싶은 충동을 시도 때도 없이 느끼는 이들이 많다.
자아와 현실 사이의 엄청난 간극을 확인하고 존재의 불확실성에 대해 고뇌하면서 삶의 진정한 모습을 찾아 방황하던 젊은 시절에는 일과 사랑이 삶이 전부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열정보다는 지혜가, 도전보다는 타협이 보다 현명하다는 것을 깨달은 나이라면, 또 사랑이 얼마나 피곤한지를 아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운명은 한 치도 비켜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는 나이라면 누구나 한두 번쯤은 일탈을 시도한다.
--- p.214
TV에서 어떤 발레니나의 발을 본 적이 있다. 도저히 여자의 발이라고는 생각지 못할 정도로 보기 흉하게 망가져 있었다. 그녀는 그런 연습을 통해 세계적인 발레리나로 성장한 것이다. 음악 발표회에 나가는 피아니스트들의 피나는 훈련을 기억하고, 한 게임을 이기기 위해 쏟아 붓는 운동선수들의 땀을 생각하고, 한 편의 참다운 시를 쓰기 위해 쏟는 시인의 코피를 생각해 보자.
한 줄의 적확한 문장을 쓰기 위해 온 밤을 밝히는 작가들의 안타까운 몸부림을 생각하고, 포장마차에서 라면으로 허기를 달래가며 돈도 되지 않는 연극을 위해 무대에서 혼신의 힘을 쏟아 붓는 배우들의 열정을 한번 생각해 보자.
--- pp.237~238
갠지스 강가에 띄워진 수백 개의 소원을 비는 꽃등불이 그렇고, 죽은 사람의 뼈가 뿌려지는 강가에서 빨래하고, 태연히 목욕을 하고, 경건하게 기도를 올리는 그들의 진지한 모습에서, 우리는 마냥 눈살을 찌푸릴 수만은 없는 그 무엇을 느꼈던 것이다. 갠지스 강은 산 사람들의 소망과 죽은 사람들의 영혼이 함께 하는 곳이었다. 죽은 자는 갠지스 강에 뼈를 흘려보내고, 산 자는 죽은 자의 영혼 위에 자신의 소망을 담아 보낸다. 산 자와 죽은 자가 어우러지는 윤회의 강이며, 삶의 고통과 죽음의 번뇌를 초월하는 해탈의 강이었다. 후회 없이 죽으려거든 갠지스 강가에서 인도를 보라. 죽음과 삶이 서로 떨어진 것이 아니다.
--- pp.254~255
누군들, 가는 세월을 잡고 언제까지나 자리를 지킬 수는 없다. 세상은 조석으로 변하고, 권력은 십 년을 가지 못한다. 그 변화무쌍한 세월 속에서 같은 마음으로 웃을 수 있는 사람은 많을지는 몰라도, 같은 마음으로 울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마음 주기 전에 버리고, 버리기 전에 잊어야 한다. 그래서 인생을 아름답게 마무리해야 한다.
나의 서재(書齋)를 ‘석가헌(夕佳軒)’으로 명명(命名)한 이유이다.
석양이 아름다운 집, 그곳에 사는 이의 삶도 그러하리라 믿기 때문이다. 세월이 이리 흘렀으니, 그도 이제는 무상함을 알지 않았을까?
--- p.2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