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영국에서 가질 수 있는 직업으로 선생을 생각한 이유는 이렇다.
한국에서 한국 사람들과 일해 본 경험이 있는 필은 내가 한국 회사에 취직하는 걸 원치 않았다. 나 역시 휴일도 없이, 가정을 포기하고 회사에 온 몸을 바치는 한국 회사 분위기는 영국에 있더라도 마찬가지일 거라는 생각이 컸다.
그렇다면 영국 회사는, 회사라는 특성상 전화 통화를 해야 할 텐데, 나는 전화 통화에 자신이 없었다. 얼굴을 보지 않고 소리만 듣고 하는 대화. 모르는 동네 이름이라도 갑자기 튀어 나오면 나는 분명 정신이 멍해져서, “뭐라구요? 아, 스펠링이 어떻게 되는지?”할 거다. 영국 사람이라면 다 아는 동네, 예를 들어 ‘천안’ 정도 되는 동네를 몰라서 상대방한테 “치읓, 어, 니은 받침, 이응……” 이렇게 불러달라고 해야 된다는 얘긴데 전화 건 사람이 얼마나 황당하고 답답하겠는가. 늘 얼굴을 보고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는 선생이 ‘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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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교실에 들어가 아이들 출석을 부를 때부터 ‘까짓거 정신’은 동원된다.
김철수, 김순이, 김영희…… 하고 부르면 참말로 뱃속 편하겠건만, 영국 선생이라면 일도 아닌 일이 나에게는 엄청난 과업이 된다. 상상이 되는가. 한국에서 ‘톰 행크스’라고 하는 이름도 ‘톰 행스’라고 제대로 불러줘야 되는 거, 하다못해 맥도날드도 ‘맥도널ㄷ’ 라고 발음하다 보면 ‘한국에서 이렇게 맥도날드를 발음하면 사람들이 왕재수라고 하겠지’라는 쓰잘데기 없는 생각까지 든다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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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가 아들 이름을 지원이로 지었다네?”
“지원? 그래? 그럼 우리는 유원으로 할까?”
“나는 유원, 하니까 유원지가 생각나는구먼 뜬금없이 웬 유원?”
“영어 이름에 발음이 유원처럼 되는 게 있어. 정확히 똑같지는 않지만, 그렇게 하면 이름도 하나고, 한국이름 같고 좋잖아?”
듣고 보니 좋은 생각이긴 한데, 왠지 자꾸 유원지가 생각나서 썩 내키질 않는다.
“근데 말이야, 유원이라는 이름, 들어본 적 없는데 정말 그런 이름이 있기나 한 거야?”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 아들 이름도 유원이고, 유명한 배우 중에도 하나 있는데.”
“배우 누구? 내가 유명한 배우면 그래도 좀 아는데, 유원이라는 배우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걸?”
“Which actor? I know famous actors but I’ve never heard of Euon(유원).”
“그 외 있잖아, 이상한 영화 찍은 사람인데 맞아, 트레인스포팅!”
“이완 맥그리거?”
하며 한국식으로 발음을 해주니,
“맞어 맞어, 유원 매그레거.”
스펠링이 ‘Ewan’이라 우리나라에서는 이완으로 불리는 거 같은데 오리지널 발음이 유원에 가깝게 된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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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살짜리 아들을 보면서 나는 속으로, 저 아이가 낙서를 remove(제거하다) 해야겠네, 어려운 단어만이 익숙한 내 머리에서는 그 단어가 제일 먼저 떠올랐다. 엄마가 시킨 거니까 일단 열심히 하는지 지켜보다가, “I will help you to remove it(아줌마가 지우는 거 도와줄게).”하면서 도와줘야지, 했다. 그런데 정작 2살박이 그 아들은 이렇게 말하며 열심히 라디에이터를 문지르는 것이었다.
“I can’t get it off(안 지워지잖아)!”
그렇지. 우리나라 아이들이라도 저 순간에, ‘제거가 안 돼’라고는 절대 말하지 않겠지. get off를 쓰면 되는 것을. 저런 자연스런 영어를 해야 되는데 어려운 단어만 수백 개 알고 있으면 뭐하누.
--- p.131
“선생님 맘에 드세요?”
‘이거 무슨 며느리감 맘에 드냐고 묻는 것도 아니고, 나 참.’
“우리 아들놈이 여자 보는 눈이 있다니까. 영어에도 이런 말이 있을 거 같은데, 뭐니? 내가 뭘 말하려는지 알지?”(한국말로 ‘여자 보는 눈이 있더라’ 딱 그 말을 하고 싶어서 아이들한테 물었다. 사람 사는 일이 다 똑같을진대 영어에도 딱 떨어지는 표현이 있겠지.)
“I think my son’s got an eye for judging girls. What’s the right expression in English in this case? Do you know what I mean?”
서로 가르쳐 주겠다고 대답들을 한다.
“He’s got good taste.”
‘맞어. 이 말이었어. 내가 찾던 말이.’
학생들이 이렇게 가르쳐주면 열심히 배우는 척 하느라 한두 번 정도 따라한다.
“He’s got good taste. He’s got good taste.”
--- p.158
허구한 날 부수고 헐고 뚝닥거리는 엄마, 아빠랑 사는 유원이. 망치, 드라이버 같은 공구쯤은 우습다. 필이 단순한 건 많이 가르치면서 같이 하기에 일등 신랑감으로 잘 크고 있다. 어느 날 집수리를 할 때였다. 유원이가 꽤 어려운 일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잘 해내자 필이 아주 흡족해했다. 그때 떠오른 말이 있었다. ‘이럴 때 한국에서는 이렇게 말하지. 밥값 한다고.’ 이 말을 뭐라고 영어로 바꿔야 하나 생각하다가 “It was worth feeding him(해석을 하자면 밥 먹인 보람이 있다).”라고 했더니, 필이 “어머 정말 딱 맞는 말인 걸!(I like that!)"했다.
--- p.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