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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소 걸음

황소 걸음

: 스승 만우 박영준을 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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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소 걸음
[도서] 황소 걸음
박기동,이덕화,전인초,정현기 등저 동연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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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소 걸음

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08년 07월 14일
쪽수, 무게, 크기 343쪽 | 516g | 153*224*30mm
ISBN13 9788985467674
ISBN10 8985467670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관련자료 보이기/감추기

저자 : 강승희 외
강승희, 1958년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입학. 하라장학회 상임이사.
김녕희, 숙명여자대학교 졸업. 소설가.
김대규, 1960년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입학. 시인.
김동민, 경상대학교ㆍ진주교육대학교 강사, 소설가, 문학평론가.
김석득, 1952년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입학. 외솔회 회장, 연세대학교 명예교수.
김용운, 1960년 연세대학교 국어국문과 입학. 소설가.
김윤식, 1966년 연세대학교 국어국문과 입학. 시인, 학산문학 주간.
김춘석, 1959년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입학. 시인.
민병삼, 1961년 연세대학교 국어국문과 입학. 소설가.
박경혜, 1976년 연세대학교 국어국문과 대학원 석사, 박사. 연세대학교, 상명대학교에서 강의.
박기동, 1963년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입학. 소설가,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박두진, 시인.
박목월, 시인.
박시정, 1963년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입학. 소설가.
박양호, 소설가, 전남대학교 교수.
박영애, 1961년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입학. 현 한국소설가협회 부이사장.
박희연, 1954년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입학. 시인.
백시종, 서라벌예술대학교 입학. 소설가.
성낙수, 1900년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입학. 한국교원대학교 교수.
오동춘, 1958년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입학. 시인, 짚신문학회 회장.
유주현, 1921~1982년, 소설가.
유태영, 1963년 연세대학교 국어국문과 입학. (전)광주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유홍종, 1963년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입학. 소설가.
이덕화, 1969년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입학. 평택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이범선, 소설가,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
이선영, 1951년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입학. 문학평론가, 연세대학교 명예교수.
이영섭, 1967년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입학. 시인, 경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이종순, 1967년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입학.
전인초, 1963년 연세대학교 국어국문과 입학. 연세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정건영, 1959년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입학. 소설가.
정공채, 1958년 연세대학교 입학. 시인.
정구종, 1963년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입학. 동아닷컴 대표이사.
정연희, 이화여자대학교 국문학과 졸업. 소설가협회 이사장.
정현기, 1960년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입학. (전)연세대학교 국문학과 교수, 세종대학교 초빙교수, 문학평론가, 문학박사.
조남철, 1971년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입학.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조정래, 1973년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입학. 서경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작가.
최기준, 1955년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입학. (전)연세대학교 상임이사, (현)CBS 이사장, (현)성공회대학교 이사장.
최유찬, 1971년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입학. 연세대학교 문과대학장.
최인호, 1964년 연세대학교 영어영문과 입학. 소설가.
추은희, 숙명여자대학교 졸업. (전)청주대학교 교수, 시인.
한광구, 1963년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입학. 시인, 추계예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한순옥, 1967년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입학,
박승렬, 만우 박영준 맏아들. (전)동아일보 국장.
박경림, 만우 박영준 딸.
박승일, 만우 박영준 조카. 목사, 아동문학가.
박창규, 만우 박영준 맏손자. 건국대학교 섬유공학과 교수.

책 속으로 책속으로 보이기/감추기

“가난은 자랑이 못 된다. 그러나 부끄러운 일도 아니라 믿는다. 나는 가난 속에서 났고 가난 속에서 자랐고 또 장차 가난 속에서 죽으리라 믿는다. 내가 아는 사람도 내가 본 사람도 역시 가난한 이들뿐이었다. 그 속에서 내 소설이 가난이 아닐 수 없다. 그 가난과 싸워 이기지 못한 것은 물론 내 힘이 부족했던 탓이겠지만 옴짝도 못 하게 사지를 묶었던 죄도 없지 않다. 이제 사슬은 풀리었다.”
--- 첫 창작집 『목화씨 뿌릴 때(1946)』 자서에서

이제 우리는 스승님의 동료이셨던 큰 어른들(예컨대 이미 고인이 되신 박두진 선생님, 유주현 선생님, 이범선 선생님, 박목월 선생님 등)이 우리 스승님께 보내 주셨던 따뜻한 마음의 빛들은 물론이고, 스승에게서 배운 여러 제자들이 마음을 모아 두툼한 그리움의 말글 책 한 권을 묶어낸다. 우리는 만우 박영준을 스승으로 모시는 행운을 누린 후생 제자들이다. 해와 달이 바뀌면 저절로 이 제자들도 나이가 더 들어 이런 그리움을 드러낼 기회가 사라진다.
우리들의 스승님!
만우 박영준 선생님!
늘 부끄럽기 짝이 없는 제자들이 조촐한 이 책을 묶어 바치오니 평안히 계신 그곳에서 독특하고 따뜻했던 웃음 띤 얼굴로 지켜보시고 즐거워하십시오. 그렇게 우리는 여기 다시 엎드려 빌 뿐이다.
--- 「책머리에」에서

아랫목에는 갓 100일이 지난 아기가 잠자고 있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 잠든 아기를 내려다보시다가 당신도 아기 옆에 동그랗게 몸을 말고 누워서 잠드시는 게 아닌가? 석유곤로에 닭백숙을 앉히고 쪽문을 통해 방으로 들어온 아내도 숨을 죽이고 내 옆에 와서 앉았다. 따뜻한 겨울, 밖은 캄캄한 밤이었고 어둑한 방 안에 잠든 선생님과 우리 아기, 우리 내외는 아주 오래 그 옆에 쪼그리고 앉아서 잠든 선생님과 우리 아기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 모습이 어쩌면 그렇게도 감동스러웠던지, 나는 자칫 눈물을 흘릴 뻔했다. 아마 아내도 나와 같았을 것이다.
6개월쯤 후에 선생님께서 돌아가셨다. 영안실에서 못 흘렸던 눈물이 집에 돌아와 우리 아기를 보는 순간 봇물처럼 터졌다.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그날, 우리 아기가 백일을 갓 지난 그날, 닭백숙이 익어가고 있던 그날 이래로 여태 주무시고 계십니다. 참 오래도 주무시는군요.
--- 본문 「참 오래도 주무신다」(박기동)에서

나는 선생님께서 내게 준 인생의 키워드(keyword)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본다. ‘끈끈함’ ‘진실’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나는 선생님만의 그 끈끈함과 진실은 선생님의 글도, 말씀도 아닌,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의 움직임과 체취에서 느끼고 배울 수 있었다. 내가 조금이라도 학생들을 아끼고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뭔가 힘이 되고자 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만우 선생님으로부터 보고 배운 것이다.
선생님과 조우한 지 반세기에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생각할 때마다 더욱 그리워지는 당신! 만우를 내 스승으로 가질 수 있어, 힘들고 어렵고 복잡한 이 세상을 흔들림 없이 살고 있다는 고백을 큰 소리로 외치고 싶다.
--- 본문 「끈끈한 인간적 진실」(전인초)에서

선생님 너무 일찍 가셨습니다. 그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고 그 뒤의 제 작품 활동도 모르시고 저의 삶도 모르시지만 비시시 웃으시면서 “다 알아, 다 알아……” 하고 다독여 주시는 것 같습니다.
저도 열심히 살았습니다. 선생님의 그 꾸밈없는 순수성 그리고 문학에의 진지함 그것을 저는 사사하고 그대로 독행으로 진지하게 지금도 문학의 진지성과 애정을 지니고 그대로 살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결국 선생님의 문학 정신을 그대로 사사했습니다. ??선생님 정말 보고 싶습니다!
--- 본문 「그립고 그리운 선생님」(추은희)에서

나는 박영준 교수님을 대할 때마다 “뚜벅뚜벅 걸어도 황소걸음”이라는 옛 격언을 나 스스로 되뇌곤 했다. 스스로 높은 도덕률에 갇혀 사셨으면서도 그처럼 거침없고 자유분방한 소년처럼 살 수 있었던 것은 박 교수님의 가장 큰 덕목 중의 하나였다. 박 교수님께서 그런 삶의 모습을 보여 주셨기에 민들레의 씨앗처럼 그 향기는 멀리 오래 남아서 지금까지도 우리들 가슴에 그리운 추억의 그림자로 우람하게 남아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 본문 「뚜벅뚜벅 걸어도 황소걸음」(유홍종)에서

선생님은 부정입학 고발 신문 제작을 결단함으로써 학내의 비리를 표면화하고 이를 바로잡는데 기여하였고, 다시 편집위원장으로 올 수도 있었으나 고사하였다. 비리는 바로잡되 임명권자에 대한 인간적 의리는 지키고자 했던 선생님의 고뇌에 찬 모습이 새삼 되새겨진다.
내가 연세춘추 수습기자에 지원했을 때 그렇게 섭섭해 하시고 걱정하시면서도 선생님은 뒤로는 나에게 따듯한 사랑을 베풀어 주신 것을 내가 사회에 나가 결국 동아일보에 들어가 기자 생활을 시작한 지 수년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내가 동아일보 입사시험을 통과할 수 있었던 것은 연세춘추에서의 2년 반 동안 학생기자로서 훈련받은 결과라고 생각한다. 결국 나를 오늘날의 언론인의 길로 이끌어 주신 것은 연세춘추 때에 이끌어 주신 선생님의 음덕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비록 작가의 길은 선생님의 우려처럼 걷지 못하였지만 이 시대를 몸으로 살아가는 언론의 길로 매진할 수 있게 된 것은 만우 선생님의 이끌어 주신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그처럼 많은 은혜와 사랑을 받은 내가, 선생님 생전에 한 번도 따스하게 모시지 못한 것을 지금도 후회한다.
--- 본문 「만우 박영준 선생님을 사모함」(정구종)에서

지난 4월 어느 날, 참으로 오랜만에 꿈속에서 선생님을 뵈었다. 다른 때와 달리 하얀 양복을 입으신 멋진 모습으로 환하게 웃으셨다. 아마 나를 위로하러 오셨나 보다. 그런데 나는 또 펑펑 울었다.
얼마 전, 밤하늘에 별을 보며 선생님께 말씀드렸다.
“선생님!
선생님께 ‘고맙습니다.’라는 말도 그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어요.
말로는 표현할 수가 없어요.
내 마음 속의 선생님!
나 이제 조금만 울게요…….
편안히 쉬세요.”
--- 본문 「선생님을 생각하며」(한순옥)에서

사실 오늘 내가 국문과 대학 교수로서 인생을 살아오게 된 중요한 계기는 선생님께서 마련해 주셨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이런 저런 이유로 대학 4학년 생활을 모두 마치고 졸업하자마자 군에 입대하게 되었다. 졸업식은 2월 23일이었는데, 2월 10일 논산 훈련소 입영 영장이 떨어져 졸업식에 참석할 수가 없게 되었다. 박기동 형과 문영순 씨, 한순옥 씨 등은 그런 사실이 안쓰러웠는지 만우 선생님께 사정을 말씀드렸는가 보다. 연세가 많으신 선생님께서는 추운 겨울 먼 인천까지 마다않고 내려오셔서 나이 어린 제자를 각별히 송별해 주셨다. 지금도 누추한 본가에 들어오셔서 동갑이신 선친과 늦게 보신 막내를 군대에 보내시니 마음이 불편하시겠다고 위로하시며 담소를 나누시던 선생님의 모습을 떠올리니 육순이 된 늦은 나이에도 눈시울이 새삼 뜨거워진다.
--- 본문 「만우 박영준 선생님의 초상」(이영섭)에서

그리고는 다시는 선생님 방에 가지 못했다. 군대에 갈 때도 인사를 드리지 못하고 떠났다. 제대를 하고서도 한 해를 더 쉬고 복학을 했을 때 비로소 선생님을 다시 뵈었다. 문과대학장으로 계셨지만 당뇨 때문에 안색이 더 검어지시고 상당히 여위셨던 것으로 기억된다. ‘현대소설연습’을 강의하셨는데 앞에 나가 발표할 때 잘했다고 하시며 칭찬해 주셨다.
명동 쪽 다방 이름은 잊었는데, 가끔 소설가 최정희 여사와 다정하게 앉으셔서 말씀을 나누시던 모습이 영 잊히지 않는다. 선생님은 내가 10년에 걸친 그 오랜 대학 생활을 끝낸 이듬해인 1976년에 돌아가셨다. 옛날을 생각하면 목이 멘다.
--- 본문 「만우 선생님에 대한 추억」(김윤식)에서

그리고 선생님을 뵙게 된 것은 다음해 봄이다. 전국 지방문학 순회강연 차 광주에 들르신 것이다. 현대문학이 주최했거나, 한국문인협회가 주최했거나 두 가지 중 하나다. 김동리, 박영준, 최정희, 서정주, 안수길 등 기라성 같은 문단 거물들의 봄나들이로 문향의 도시 광주가 떠들썩했던 터다. 강연을 한 시간 앞두고 문학애호가들이 강당 주변을 가득 매우고 강사 분들과 상견례를 하고 있는데, 박영준 선생님 모습만 보이지 않는다. 내가 궁금해 하자 누군가 ‘만우 선생 당구장에 계실걸’ 한다. 아직 시간은 널널하지만, 그래도 졸갑증이 나 선생님을 찾아 나섰는데 웬걸, 말 그대로 삼매경이시다. 어느 부위를 칠 것인가, 외눈박이로 엎디어서 보고, 일어서서 보고, 좌로 보고, 우로 보고 여념이 없으시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함께 큐대를 든 사람은 소설과 박양호를 비롯하여 연세대 출신 광주 문인들이었던 것 같다. 선생님은 그토록 신중을 기하던 쓰리 쿠션에 성공하시고 당구장 바닥이 울릴 정도로 펄쩍 뛰며 즐거워하신다. 어린아이 그대로다. 선생님 옆에 서서 한참을 기다렸는데도 나를 보시지 못하다가 문득 발견했다는 듯이 말씀하신다.
“오, 자네 왔구만.”
퍼런 초크 묻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시며 계속 하신다.
“그래. 이번 신춘문예에 또 당선했더구먼. 내가 잘 뽑았던 것 같애. 내 눈은 예리하거든.”
--- 본문 「‘만우 선생, 당구장에 계실걸’」(백시종)에서

그날 오후, 정이 대학원 수업에 들어가고 연구실에 교수님 혼자 계셨다. 박사과정에 있으면서 강의를 맡고 있는 강사들이 교수님을 방문했다. 이런 저런 주변 이야기를 하다, 정과 같이 그룹 스터디를 같이 하고 있는 강사가 교수님께 물었다.
“조교 마음에 드셔요?”
“내가 그 애의 조교다. 학교 9시 이후에 오는 것은 다반사고, 오늘은 열쇠를 안 가지고 와 창문으로 넘어오다 도둑인 줄 알고 내가 지른 고함에 창문 아래로 떨어져 발목까지 삐었다.”
“왜 그런 애를 가차 없이 자르지 않아요? 지난번에도 수건을 한 달 내내 떨어뜨린 채 그대로 나뒀다고 조교를 바꾸지 않았어요?”
“그랬지, 그런데 그 경우하고는 다르거든, 그때 그 여학생은 비인간적이고, 지금 조교는 내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을 뿐, 너무나 인간적이거든, 내가 조교한테 적응해야지…….”
“네????”
--- 본문 「박영준 교수님을 추억하는 에피소드 3개」(이덕화)에서

졸업하고 교사가 되려 했으나,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때 선생님께서 나를 데리고 다니시며, 이 학교 저 학교 문을 두드리셨다. 주로 기독교 재단의 학교였다. 그러나 일이 안 되려고 그랬던지, 나는 그 전날에 이미 억병으로 취해 있었고, 교장 앞에서 술 냄새를 팍팍 풍겼던 것이다. 물론 내 옆에 선생님이 계셨다.
그때 교장이 술 냄새를 풀풀 날리고 있는 나한테 짓궂게도 술을 얼마나 마시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나도 내 자신을 알아, 곧이곧대로 실토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그 학교에서 나를 교사로 받아주겠는가.
그 날 그 학교 교문을 빠져나오면서 선생님께서 눈을 흘기시며, 융통성 없다고 핀잔을 주셨다. 술을 못 마신다고 했어야 되는 것 아니냐는 말씀이셨다. 그러나 나 스스로도 술 냄새가 역겨운 마당에, 어찌 거짓을 말하겠는가.
결국 나는 선생님만 난처한 입장에 빠뜨린 못된 제자가 돼 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선생님께서 나를 또 부르셨다. 경남 거제도의 한 학교에서 국어교사가 필요하다는데, 내 친구 중에 한 사람을 천거하라는 것이었다. 차마 나를 낙도로 보내고 싶지 않으셨던 것이다.
그 말씀이 떨어지는 순간에, 내 생각이 환히 트이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가겠다고 말씀드렸다. 선생님께서 내 생각을 믿지 못하셨는지, 고개를 갸웃거리시는 것이었다. 그래서 소설을 쓰자면 농어촌에서의 경험이 필요할 것 같다고 말씀드렸다. 거기에서 선생님이 나를 기특하게 생각하신 것 같았다.
내가 서울역으로 나가자, 뜻밖에 선생님께서 배웅하러 나오셨다. 그러고는 딱 일 년만 있다가 올라오라고 말씀하시면서, 민망하게도 담배 한 보루를 건네시는 것이었다. 만우 선생님이 그런 분이셨다. 요즘에도 모교에 그분 같은 교수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 부디 많기를 바란다.
--- 본문 「사부(師父) 만우 선생님을 그리워하며」(민병삼)에서


삼 년 전이었던가요. 원주에 지방 강연 가셨을 때 제가 따라갔었는데 깊은 밤중에 잠이 든 선생님이 노래를 부르셨습니다.
“불 밝던 창에 어둠 가득 찼네. 내 사랑 니나 병든 그때부터…….”
그렇습니다, 선생님은 주무시면서 노래를 부르고 계셨습니다. 깜짝 놀라 선생님이 깨신 후에 여쭈어 보니 선생님은 빙그레 웃으시면서 “자면서 노래 부르는 게 내 버릇이지” 하셨습니다. 일제 강점기 감옥소에 독서회 사건으로 끌려들어가 한 반 년가량 고생하셨을 때 생긴 버릇인데 꿈속에서 노래를 부르시는 버릇은 그 후로 계속 되어 오셨다는 것이었습니다. 꼭 노래도 명곡만 부르신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음날 나는 잠을 한 잠도 안 잤습니다. 선생님의 노래를 듣기 위해 마치 알 놓은 닭을 보기 위해 밤을 새우는 아이처럼 나는 밤을 새웠습니다. 새벽녘이었던가요, 선생님은 노래를 부르시기 시작했습니다. 평소의 그 두껍고 중유 같던 목소리는 더 짙고 둔중한 목소리가 돼서 도도히 흘러가듯 노래를 부르셨습니다.
“불 밝던 창에 어둠 가득 찼네. 내 사랑 니나 병든 그때부터…….”
나는 왜인지 자꾸 눈물이 나왔습니다. 선생님도 자신이 노래를 부르시는 것을 느끼셨던지 노래 중반에 눈을 뜨셨습니다. 선생님 눈가엔 눈물이 고여 있었습니다.
“선생님 깨셨어요?” 하고 내가 말을 거니까 선생님은 눈물을 닦으시며, “최 군 들었군, 또 들었어. 잠 안 자고” 하시며 군밤을 한 대 쥐어박아 주셨습니다.
선생님을 볼 때마다 이상하게도 그 노랫소리가 잊히지 않습니다.
선생님이 즐겨 부르시듯 불 밝던 창에 어둠만이 가득 찼습니다.
이제 선생님은 주무시면서 노래를 부르시지 못하십니다. 아아, 가엾은 내 선생님.
--- 본문 「어둠만이 가득 찼습니다」(최인호)에서

당시 〈별들의 고향〉이란 소설로 인기 절정에 있었던 최인호 선배는 문학회 후배들에게는 하나의 전설이었다. 10년 가까이 대학을 다닌다는, 영웅들에게는 늘 드리워지게 마련인 신비까지 갖춘 전설 속의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승과 제자 사이에는 엄연히 구별이 있는데 저런 이야기를 해도 되나 하는 의아심을 갖게 한 이야기 한 토막.
“선생님, 저 이번에는 드디어 궁금증을 풀 수 있게 되었네요.”
“뭔데?”
“선생님 노상 크다고 자랑하셨는데, 오늘 밤 확인할 수 있지 않겠어요?”
“빌어먹을 놈!”
두 분은 파안대소를 하셨다. 나는 지금도 그때 박영준 선생님의 웃음 띤 얼굴과 제스처를 기억한다. 제자의 농지거리를 조금도 꺼려하시지 않고 받아들이는 소탈한 모습. 나는 그 소탈한 모습이 만우라는 호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은 조선 농민의 풍모를 간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삶의 애환을 넉넉히 짐작하면서도 결코 사람의 도리를 저버리지 않는 기품을 지닌 존재. ??
--- 본문 「덕소로 가는길」(최유찬)에서

양 볼에 이미 팔자 주름이 깊게 패어 있던 선생님의 시선은 너무도 뜻밖에 따뜻했다. 그리고 그리도 순박한 미소……. 낭랑하지 못한 음성이었지만 선생님과의 대화는 누구에게나 다정한 소곤거림이었다.
절대로 다변가(多辯家)하고는 거리가 멀었고 달변도 아니었으며 표현에도 익숙하지 못했던 분이었지만 선생님의 가슴속에는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당신만의 사연과 그리움이 늘 가득 차 있던 분이었다. 예쁜 소녀를 지극하게 사랑하셨고, 예쁘기만 하면 무슨 떼를 쓰던지 한량없이 받아주시기도 한 분이었다. 소박 순박하기만 한 분이었으니 사랑의 표현이나마 여한 없이 했을 리가 없었으리라는 짐작이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선생님은 자주 하늘을 올려다보셨다. 다소 멋쩍거나 하고 싶은 말을 다하지 못했을 때, 그리고 견딜 수 없을 만큼 그가 사랑스러울 때 늘 그러하셨다.
더러는 찻집에서, 더러는 거리에서 행복해 하시는 얼굴로 그 소녀와 함께 다니시는 것을 우리는 오래도록 바라볼 수 있었다.
--- 본문 「수줍음 속에 감추어져 있던 낭만」(정연희)에서

만우 선생에 대한 강렬한 인상과 아름다운 기억의 샘물을 길어 올리고자 하는 글의 머리에서, 우리글 신문인 만선일보사 출간 작품집에 대해 위와 같이 장황한 사설을 늘어놓은 것은, 그것이 선생의 ‘끈끈한 진실 지키기’를 천착해 보기에 적합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한국 문인에 대한 일제 감시가 서슬 시퍼렇게 살아 있던 그 시절에, 그것도 고국 땅이 아닌 척박한 만주 땅에서 ‘우리글’을 통해 작품을 발표했다는 사실은 예사롭지 않다.
학생들에게 만우 선생에 대해 물으면 십중팔구 〈모범경작생〉이란 답변이 돌아오기 마련이다. 과연 〈모범경작생〉이야말로 선생의 대표작이요 한국소설의 중요한 한 획을 그은 걸작임이 분명하다. 주지하다시피 일제 치하에서 현실적 실리를 좇는 농촌 청년 ‘길서’의 이중적 인간성을 그려냄으로써 가장 진솔한 인간 유형을 추구하고자 하는 반어적 기법―그것은 허구적 성격과 현실 자각 과정을 실감나게 포착한 미학이 아닐 수 없다. ‘농촌작가’라고 불리기도 한 만우 선생의 시대를 증언하는 기록으로서의 소설쓰기는 진실을 담아내기 위한 도구였을 것이다.
--- 본문 「호미와 바가지-그 진실의 이름」(김동민)에서

싸늘한 늦가을이었다. 언더우드 동상 곁을 지나 담쟁이 잎이 제 빛을 잃어 가는 문과대학 건물로 올라가는 내 발걸음은 묘한 흥분으로 들떠 있었다. 그때가 오후 세 시쯤 되었을까. 층계를 다 오른 나는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 학생들의 발길이 거의 끊긴 교정과 긴 백양로, 가을날 청명한 햇빛을 받고 드리운 백양나무의 그림자가 한 눈에 들어왔다. 백양로에 비친 햇빛과 적막, 나는 잔잔한 흥분 가운데 온몸을 휘감던 그때의 그 고요를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흥분 가운데 지켜본 그 적막이 수십 년이 흐른 지금도 바로 엊그제 일처럼 다가온다.
선생님은 책을 보고 계셨다. 내가 안으로 들어서자 앉으라고 한 다음 선생님은 뜨거운 물을 컵에 붓고 책상 아래 서랍을 열고는 찻잎을 엄지와 검지로 집어내어 그것을 컵에 띄우셨다. 변변한 다기를 갖추지 못한 선생님은 그런 식으로 차를 즐기시는 것 같았다.
나는 다소곳이 앉아 선생님의 선고(?)를 기다렸다. 선생님은 몇 모금 차를 마신 다음, 문장은 괜찮다는 말로 말문을 여셨다. 문장이 괜찮다니, 그럼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닌가? 순간 치솟는 기쁨을 가눌 길이 없었다. 나도 모르게 얼굴이 달아올랐다. 선생님은 접어놓은 서너 곳을 펼치면서 잘못된 문장을 지적해 주셨다. 그러시면서 이런 것은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간단히 처리될 문제라시면서 문장은 괜찮다는 말을 다시 되풀이하셨다.
--- 본문 「만우 선생님」(유태영)에서

내가 만우 박영준 선생님을 처음 뵌 것은 모교에 합격하고 면접을 하는 자리에서였다. 그때 문과대학 1층에 있는 두 방을 각각 세 분씩의 교수님들이 차지하고 앉아 면접을 하고 계셨지만, 합격이 이미 결정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긴장감이나 두려움이 가득 차 있는 그런 자리는 아니었다.
만우 선생님은 무언가 자료를 들여다보시더니 나에게 “자네는 (입학시험) 국어 성적이 좋구먼. 그런데 대학에 와서는 무엇을 공부하려는가?” 이런 요지의 질문을 하셨다. 나는 정말 국어국문학과에 문학을 하고 싶어 왔지만, 막상 소설을 쓴다거나 시를 쓸 계획은 가지지 않았으므로, “평론을 하렵니다”라고 대답을 하였다. 만우 선생님은 그 특유의 ‘입을 일자로 닫으며 약간 비웃는 말투’로 “평론은 아무나 하나?”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개학이 된 후 교양 국어를 들으면서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 분은 작가로서 터무니없이 남의 작품을 깎아내리기만 하는 평론가들이 가장 못마땅하다는 거였다. 또한 평론가들은 “남의 작품은 잘 비판하면서 자기들은 작품을 하나도 쓰지 못하니, 결국은 작가가 될 능력이 없어서 평론을 쓰는 사람들”이라는 말씀이었다.
--- 본문 「내가 아는 만우 선생님」(성낙수)에서

십 년쯤 전이었다고 기억합니다. 선생님을 모시고―아니 차라리 ‘따라서’라고 하는 편이 옳을 것 같습니다―설악산(雪嶽山)을 넘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선생님은 젊은 문단 후배들을 데리고 오른 산길에서 자주자주 뒤돌아보시며 도리어 저희들을 걱정하시던 것입니다.
금강굴 앞에서 쉬었습니다. 거기는 도토리묵이 명물이라고 했습니다.
“선생님, 저 명물 한번 먹어 볼까요?”
했더니, 선생님은
“그러지.”
하시며 빙그레 웃으셨습니다. 그런데 막상 먹어 보니 맛이 신통치 않았습니다.
“그거 명물이란 게 형편없군요.”
저희들 젊은 측이 빈정거렸습니다.
그때 선생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명물이란 대개 그런 거야.”
저는 그때 선생님의 그 말씀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그저 우스개로 하신 말씀이었는지는 모르나 그대로 선생님의 성품을 들어낸 말씀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떠들썩하니 이름부터 외치는 것치고 실속 있는 것 없다는 그 말씀.
선생님은 평생을 오로지 작품 창작에만 전념하였을 뿐, 일찍이 그 흔한 문학단체(文學團體)의 장(長) 한 번 지내신 일이 없으십니다.
한마디로 커다란 바위 같은 어른이셨습니다.
--- 본문 「깨끗하고 귀하신 선생님」(이범선)에서

한참을 라이터를 만지작거리시던 선생님께서 문득,
“나는 좋은 계절, 좋은 날에 가고 싶어. 나뭇가지가 촉촉이 젖고 들리는 새소리도 활기찬 날. 푸른 하늘 바라보고 움트는 나뭇가지 사이로 봄이 살랑거리며 오는 날 말야.”
대답하지 않았다.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선생님에게 아무리 좋은 날이더라도 결코 오면 안 되는 날이라 굳게 믿었으므로. 가시다니요? 도대체 어디로 가시게요?
1978년 화창한 봄날. 온 식구가 귀국하여 눈부시게 발전한 고국의 면모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미국 워싱턴에서 얻은 아들아이를 앞세우고 선생님을 찾아뵈려고 연락드리니 2년 전에 가셨다.
학교에도 가 보고, 가화다방에도 가 보고, 만두집에도 가 보았다. 아무데도 안 계셨다. 아주 가셨나 보다.
--- 본문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박영애)에서

만우 선생은 담배를 자주 피우셨다. 특히 글을 쓸 때는 담배를 물어야 생각이 잘 풀린다고 하셨다. 1973년, 프랑스 파리에서는 제8차 동양학자 대회가 열렸었다. 이는 남북한의 학자들이 동양학의 각 분야에서 불이 튀는 논전을 편 첫 번째의 학술토론회였다. 이 대회에 나도 한몫 끼게 된 것을 아시고, “프랑스에는 뒤퐁(라이터)이 있다는 데, 나 그것 하나 구해다 줘”라고 부탁을 하셨다. 나는 잊지 않고 그것을 사다 드렸다. 원하던 것을 얻고 기뻐하시던 순진한 모습이 이제도 선하다.
1976년 어느 날 위중하시다는 연락을 받고, 세브란스 중환자 방을 들어섰다. 숨이 몹시 급하다. “이 분을 어떠한 일이 있어도 살려 내!” 옆에 있던 이우주 총장의 다급한 불호령이 담당 주치의에게 떨어졌다. 안타까워서 내리쳐 본 호령이었지만 이미 때는 지나, 만우는 몰아쉬는 숨을 이내 거두셨다.
몸은 비록 가셨어도, 그 어질고, 순진하기까지 하면서, 진실로 사리를 꿰뚫어 보는 슬기와 창의의 힘을 바탕으로, 근ㆍ현대 한국문학사의 큰 나무를 이루었으니, 만우 박영준 선생의 진실한 삶은 영원하시다.
--- 본문 「만우 박영준 선생님」(김석득)에서

2년 넘게 강의를 들었지만 지금 뇌리에 강하게 남아 있는 것은 6ㆍ25 이후 그 어렵던 때, 남대문 근처에선가 마늘 장사를 하셨다는 체험담이다. 그 시간에 소설가는 진실은 체험임을, 그 체험은 농부나 서민들의 것임을 강조하셨다. 시골 출신의 시인 지망생은 얼마나 감동을 받았던지.
그러하다. 사제지간의 척도는 지식의 전수가 아니라 감화의 농도로 형성되는 것이다. ‘흙’을 통해 인간 영혼의 승화를 구가하려던 나의 시세계에 선생님은 실천자로서의 ‘모범 경작생’이었던 것이다.
4ㆍ19 세대 60학번인 우리들(1941년생)과 선생님(1911년생)과는 꼭 30년, 한 세대의 연차가 있다. 그리고 서거 30주년을 맞아 대학시절을 회상해 보려니, 그때의 선생님은 지금의 우리들보다 15년이나 젊으신 50대 초반이셨구나. 이 나이인데도 그때의 선생님만한 인생의 진실에는 끝내 못 미치고 있구나.
집안에 어른이 안 계시면 늙은 소라도 한 마리 있어야 한다고 했는데, 지금 우리의 주변에는 ‘만우’와 같은 사람 냄새의 어른을 찾아보기 정말 어렵다. ‘만우’와 함께했던 시간이 그리운 까닭이 거기 있다.
--- 본문 「‘만우’와 함께한 시간」(김대규)에서

문학사적 공적도 공적이지만 만우(晩牛)라는 아호(화가 청전 이상범이 명명)가 말해 주듯 평생 문학을 위해 소처럼 우직한 끈기로 자신의 생명과 영혼을 불태웠고 소박하고 성실한 언행으로 일관한 생애였기 때문에 지금도 많은 이의 흠모를 받고 있다.
70년대 초 후배의 결혼식 주례를 맡으신 박 선생님을 사회자로 만나 뵀었다. 흔히 주례사는 미사여구와 딱딱한 교훈이 많기 마련인데, 그 날의 주례사는 평범한 듯싶은 선생 자신의 인생관이 진솔하게 담겼는데, 그 가운데 ‘그래도 인간은 산다’라는 명언이 지금도 또렷이 생각난다. 선생이 겪으셨던 그 많은 고난 속에서 ‘그래도 열심히 살아 온 것’이 그의 작품 속에서 불화산의 열기로 내뿜어졌고 그 많은 작품 속에서 불길로 타오른 것이다.
--- 본문 「박영준의 문학과 사랑」(강승희)에서

선생님의 솔직하고 담백한 사랑을 특히 절감한 것은 필자가 조그마한 사고로 병원에 입원했을 때였다. 마침 연고전 기간인지라 병실을 지키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다. 그때 놀랍게도 선생님께서 병문안을 오셨다. 2학년이었을 때이니 선생님을 뵌 지가 일 년은 넘었지만 그래도 교수가 학생의 병문안을 오신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죄송스러워 쩔쩔매는 필자에게 선생님께서 놀라운 제안을 하셨다. 오늘 연고전 농구가 있으니 함께 가자고 하시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예의 그 느리면서 편안한 미소를 지으셨다.
그 날 선생님께서 필자의 평상복을 미리 들고 나가셨고, 병원 한 구석에서 선생님의 도움으로 옷을 갈아입고는 농구 경기가 열리는 장충체육관으로 함께 도망(?)쳤다. 농구경기의 승패는 지금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선생님과 함께 농구 경기를 보는 필자를 부럽게 바라보던 동료들의 시선과 어린 제자를 위해 농구 표를 들고 제자의 병실을 찾아오신 선생님의 그 따뜻한 사랑과 병원 한 구석에서 옷을 갈아입는 필자를 위해 망을 봐 주신 선생님의 천진난만한 동심(?)이 새삼스러울 뿐이다.
--- 본문 「만우 선생님을 그리며」(조남철)에서

선생님과의 끈끈한 인연은 1962년부터였다. 1962년 10월에 연세춘추 편집인으로 오셨다. 나는 당시 연세춘추 주간으로 있었던 때였다. 1964년 9월에 국문학과 과장으로 자리를 옮기시기까지 2년 동안 〈연세춘추사〉에서 함께 고락을 같이 하였다.
선생님은 늘 “기사는 사실대로 진실을 알리는 데 초점을 두어야 하며, 기사는 간결하고 정확하게 써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특히 문장의 구성과 문체에 많은 지도와 가르침을 주셨다.
1964년 새 학기 들어서면서 부정입학의 문제가 캠퍼스를 뒤흔들었다. 쉽게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연세춘추 기자들도 부정입학의 문제를 다뤄야 한다는 의견을 강력히 제기했다. 신문기사를 작성하고 편집인인 선생님께 승낙을 받아야 했다. 선생님께서는 난감한 표정으로 먼 산만 바라보시다가 “진실은 밝혀야지, 정확하게 다뤄야 해” 하고 승낙하셨다. “부정입학 드디어 표명화”라는 표제의 톱기사로 보도함으로써 캠퍼스는 요동을 쳤고, 신문사에는 모든 행정적 압력이 가중되었다.
--- 본문 「스승 20년 추모 30년」(최기준)에서

외로운 아들이 얼마나 아버지를 사랑했던지 한 가지만 이야기해 보지요. 일생을 아버지와 어머니는 소리 내어 싸우신 일이 한 번도 없으셨지요. 싸울 일이 있으면 편지로 싸우셨지요. 편지를 안방에서 건넌방으로, 건넌방에서 안방으로 던지면서 싸우셨지요. 그런 아버지가 어느 날 보따리를 싸가지고 나기시면서
“승렬아, 나 집 나간다. 잘 있거라” 하셨습니다.
눈치를 챈 제가 무어라 했었는지 기억하실 겁니다.
“아버지 나가시려면 한 열흘이나 한 달간 계시다 돌아오세요. 그러지 않고서는 어머니를 다스리지 못하십니다.”
그 말했다가 제가 어머니한테 얼마나 당했는지 아버지는 모르십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날 저녁에 들어오셨지요. 대문에서 계속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음, 음??하는 소리가 나기에 대문을 열어봤더니 아버지가 서 계셨습니다.
“아니 왜 여기 계세요? 한 열흘 후에 돌아오시지.” 아버지는 제 앞에서 무슨 죄인인 듯
“나가긴 나갔는데 갈 곳이 없어.”
“아, 여관이라도 갔다 며칠 후에 오셔야지 그래 가지구서야 어떻게 어머니를 다스리겠어요?”
“그래두 갈 곳이 없는 걸.”
해서 아버지를 안아 드린 일, 기억하시지요? 아버지는 제게 꼭 안기셨지요.
“아아, 이 아버지가 우리 아버지구나. 내가 이 아버지를 모르고 있었구나.”
이런 아버지를 저는 사랑할 수밖에 없었고 또 그런 아버지셨기에 저는 행복했습니다.
--- 본문 「편히 쉬시옵소서」(박승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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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우 박영준

1911년 평남 강서(江西) 출생. 1934년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던 해에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모범경작생」이, 《신동아》에 장편소설 『일년』과 콩트 「새우젓」이 거의 동시에 당선되어 일약 문단의 화제를 일으키며 등장했다. 이후 간도 용정촌 동흥중학교에서 1년 간 근무. 1935년 독서회 사건으로 5개월 간 구류당함. 해방이 되자 귀국하여 월간지 신세대에 입사. 1946년 경향신문 문화부 차장에 취임하고, 1947년 고려문화사 편집장을 거쳐 1951년 육군본부 정훈감실 문관을 역임하면서 6 ? 25 종군작가단의 일원으로 활약하였다. 1954년 연세대학 강사에 취임하였고 1958년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959년 한양대학 부교수가 되었다. 1962년 연세대학교 교수가 되었고, 1975년 연세대학교 문과대학장에 취임하였다. 1976년 별세하였다. 예술원상, 서울시문화상을 수상하였고, 단편집으로 「목화씨 뿌릴 때」(1946), 「자살미수」(1951), 「그늘진 꽃밭」(1953), 「방관자」(1960), 「고호」(1964), 「추정」(1968) 등이 있고, 장편집으로 『태양과 더불어』(1947), 『애정의 계곡』(1953), 『오늘의 신화』(1960), 『고속도로』(1969), 『일년』(1974)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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