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운명처럼 찾아온 코믹 연기! 20여 년을 그렇게 사랑하는 코믹 연기를 해오다 보니 가끔 ‘연기 변신할 생각은 없는지?’ 물어온다. 굳이 대답하자면 나는 절대 연기 변신할 생각이 없다. 추호도 없다. 내 캐릭터를 왜 바꿔야 하는지 아직 잘 모르겠다. 아니, 땀 흘려가며 애써 쌓아온 걸 왜 허물어야 하는 걸까? 내가 존경하고 닮고 싶은 선배들을 보자. 박원숙, 김수미, 김혜자 선배…, 모두 각자 자신에게 맞는 포스들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 개성이라는 건, 지금껏 그들이 피땀 흘려 만들어온 것이다. 그렇듯이 안문숙은 안문숙 나름대로 지금껏 만들어온 개성이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코믹 연기로 승화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군복이 잘 어울리는 연예인 1위에 뽑혀 그 남자들도 어렵다는 훈련을 받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웃겨야 사는 나는 요즘도 시트콤에 목말라하고 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살아 있음을 느끼고 싶다.”라고 할 수 있다.
나의 웃음 철학을 말한다면, 라디오에서도 틈만 나면 얘기했지만 나는 ‘내가 행복하면 상대방도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앞에서도 언급했듯, 행복하기 때문에 웃는 게 아니라 웃기 때문에 행복한 것이란 얘기다. 그런 의미에서 울 엄니나 나는 웃음에 대해선 부자다. 우리 집은 웃음부자다. 지금껏 웃음에 대한 재테크를 해본 적이 없을뿐더러 웃음저축도 해본 적이 없다. 그 이유는 우리 집 안방에서 석유가 느닷없이 폭발해 쏟아져 나오듯 울 엄니를 그냥 찌르면 웃음이 나온다. 그렇게 엄니에게 훈련을 받아서인지, 우리 세 자매는 우스갯소리를 들으면 잘 웃는다. 그 가운데 나는 특히 들은 우스갯소리를 옮기기도 잘하는데, 그것 역시 하늘이 내게 주신 달란트가 아닐까.
주변을 살펴보면 유독 첩 연기를 많이 하고 또 잘하는 동료나 선후배가 있다. 정말이지 간통 연기 전문배우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남의 가정을 파괴하는 연기를 잘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들의 얼굴을 보면(나만 그렇게 느끼는 건지 모르지만) 늘 우울해 보인다. 늘 우울하고 눈 밑에 그늘이 있으며, 오래된 다크서클이 근육으로 굳어버린 걸 보게 된다. 그래서 ‘왜 그럴까?’, ‘정말 연기와 생활이 연결되는 걸까?’라는 의문을 가진 적이 있다. 연기는 아무리 가짜 인생이라고 해도 몰입하다 보면 실제 생활 속에도 젖어드는 모양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연기도 일단 내 안으로 들어갔다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그 역할 역시 ‘나’라는 것이다.
주변의 연기자들을 살펴보면 심각한 연기를 하는 사람은 그 심각함에 젖어 있는 걸 볼 수 있다. 무당 역할을 하는 사람은 정말 무당 같고, 사극에서 항상 상감 역할만 해온 사람은 실생활에서도 상감 같다. 왕 역할을 자주 하는 사람은 그 역할 때문인지 왕처럼 느껴지고, 내시 전문 연기자는 말투까지 내시처럼 변하는 걸 볼 수 있다. 그래서 내가 일찍이 결심한 것이 있다. 그건 바로 ‘우울한 연기는 하지 말자.’는 것이다. 나는 내 목소리, 생김새, 내 성격을 빨리 파악한 것이다.
그랬기에 일찌감치 코믹 쪽으로 빠질 수 있었다. 그렇게 처음부터 가닥을 잡고 빨리 코믹 연기로 빠지자 사람들 기억에 늘 남아 있을 수 있고, 그게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여 내 존재가 마치 소금에 절인 배추처럼 웃음에 절 수 있었다고 본다. 그리고 다행스럽게 그런 기대는 한 번도 실패해본 적이 없다. 내가 출연한 시트콤은 늘 시청률이 좋았고, 같은 이유로 나 역시 내 이름을 걸고 하는 연기는 소홀히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절대 다작을 하지 못한다. 아니 할 수 없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는 그렇게 하나를 완벽하게 해내기 위해포기했던 게 너무 많다. 그런 이유 때문에 타의로 라디오 〈안문숙의 네 시엔〉을 놓을 수밖에 없었을 때, 그 상실감은 뭐라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컸다. 처음에는 그 상실감을 어쩌지 못해서 너무나 괴로웠다. 그러나 내가 누군가. 긍정의 힘 안문숙이 아니던가! 워낙 태생이 긍정적이었기에 나는 곧 상실감의 구멍을 또 다른 희망으로 채워야 했다. 살아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웃겨야 산다.’ 이 말은 다른 사람에게 들려주는 말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들려주는 얘기다. 웃어야 산다, 웃겨야 산다!
내게는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이 하나 있다. 그건 바로 ‘자고 나면 잊어버리는 성격’, 보석 같은 습관이다. 오늘 누군가와 대판 싸웠어도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그때의 감정은 거의 희미해진다. 이것이 혹시 의학에서 말하는 단기기억상실증이 아닐까, 걱정되지만 나는 그 덕을 자주 본다. 며칠 전 다투었던 상대방은 아직 화가 난 채 꽁하고 있는데 그 사람을 복도에서 만나면 나는 언제 그랬냐는 듯 “야, 밥 먹자.”하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상대방이 얼마나 어이없겠는지 말이다. 모르긴 해도 그 사람, 속으로 ‘뭐야? 저거 미친 거 아냐?’ 할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꽁한 연기를 할 수도 없고, 친해지면 이해하지만 아마 쉽게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금방 털고 뒤끝이 없는 이 성격은 나 자신에게는 보약이지만, 남에게는 황당한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내가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얘기는 바로 이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동안인 내게 “늙지 않는 비결이 뭐냐? 얼굴에 도대체 무슨 짓을 하느냐? 어떤 투자를 하느냐?”고 물어오는데, 그때마다 나는 이렇게 비결을 공개한다.
“첫째는 기도요, 둘째는 타고난 성격이요, 셋째는 웃습니다.”라고. 그렇다. 말 그대로 나는 웃어야 산다.
울 엄니의 유명세
“나가 요새는 어디 가서 뭣을 사들 못 허겄어. 날 겁나 알아봉게, 물건 값을 깎을 수가 있어야제. 토란대로 다 주고 사고…….”
요즘도 울 엄니에게는 방송 출연 섭외가 들어온다. 하지만 엄니는 누군가가 자신을 알아보는 걸 무척 불편해하시기에 1년에 한 번 정도, 그것도 딸인 나와 함께 아니면 출연하지 않는다는 철칙을 세워두고 계신다. 그런 엄니에게 여고생 아이들 몇 명이 엄니를 알아보고 사인을 요청하더란다.
울 엄니, 사인이 뭔지는 알지만 날도 덥고 귀찮았던 나머지, 특유의 큰 목소리로 아이들을 줄 세워놓고 이렇게 외치셨단다. “아가! 에∼, 지금부터 내가 불러줄텡게, 싸인을 받아적어라, 잉?”
그런 엄니가 방송에 출연하고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시작한 것은 지난 1992년부터다. 당시 히트 드라마였던 〈오박사네 사람들〉에 출연 중이던 내가 깊은 밤, 사람들 배꼽을 앗아가던 〈주병진쇼〉에 초대 손님으로 나가게 되었고, 제작진으로부터 파트너 한 사람을 구해오라는 말을 들었다. ‘나 혼자서도 충분한데, 누굴 데리고 나가나?’ 고민하는 순간, 나는 집에 있는 울 엄니 생각이 났다. 엄니의 천부적인 재질을 믿고 있었기에 나는 동물적인 감각만으로 과감히 엄니를 모시고 나가기로 결정했고, 녹화 당일 진행해야 하는 주병진 씨는 웃느라 말도 못 잇고 의자에서도 수없이 떨어졌다. 그렇게 〈주병진쇼〉가 시발점이 되어 그 뒤 각종 토크쇼에서 출연 섭외가 줄을 이은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것을 시발점으로 해서 훗날, 엄니와 나는 대한민국 방송 역사상 최초의 노처녀 시집 보내기 프로젝트 〈일요일 일요일 밤에〉 ‘결혼대작전’에 쌍으로 출연한 적이 있다.
‘결혼대작전’은 서른이 훌쩍 넘은 딸을 시집보내기 위한 모녀의 진지하고 처절한(?) 프로젝트를 담아 3개월간 방송했다. 당시 우리 집에 카메라를 설치하고 또 내가 남자를 만날 때마다 쫓아다니며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제작된 이 코너는 휴먼다큐 〈인간극장〉이요, 한국판 〈트루먼쇼〉였다. 게다가 이 다큐멘터리에는 포복절도할 사투리 버전 개그가 가미되어 있었으니 비록 ‘결혼’이라는 목표 달성에는 실패했지만 나와 엄니는 방송 사상, 전대미문의 업적을 남기면서 울 엄니를 스타로 부상케 했다.
“넘들도 다 봐서 알지만, 보다시피 야가 보는 사람마다 실물이 더 낫다고 안 허요? 우리는 진실로 이참에 결혼을 한번 해볼라고 했씨요. 근디 참 어렵습디다. 사람 만나는 것도 장난이 아니구 허구한 날 다른 남자 만나고 다닌께…. 에구∼, 이것도 헐 짓이 아닌 거 같소. 암만!”
그렇게 울 엄니에게 쓰디 쓴 교훈을 안겨주고 코너는 막을 내렸지만 엄니를 찾는 곳은 많았다.
딸이 출연하는 시트콤 〈세 친구〉에서는 딸의 실제 엄니로 등장하기도 했는데, 촬영 당시 엄니의 기질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송창의 PD는 엄니에게는 리허설인 것처럼 하고 배가 아파서 뒹구는 딸이 있는 방으로 그냥 엄니를 집어넣었다. 그러자 울 엄니 연습이라고 생각하고 바로 배가 아파 뒹구는 딸을 향해 본색을 드러내셨다.
“아가, 어째 그러냐 잉? 워디가 아프냐?”
“워디? 배가 아퍼? 배 아프면 언능 가서 똥 싸부러.”
이어지는 엄니의 포복절도 에드리브, 물론 실제 방송에서는 엄니의 대사 절반이 ‘삐∼’ 소리로 처리되고 말았지만 그 방송으로 울 엄니는 단독으로 쌀과자 CF까지 거머쥐는 쾌거를 거뒀다. 그런데 걸작은 그 뒤였다. 분명히 당신 마음대로 애드리브로 연기해놓고는 기자들과 인터뷰할 때는 이러는 것이었다.
“에∼, 세 친군가 그거 헐 때는 내 양이 안 찼어. 웃는 소리가 들어가니까 내가 말허는 것이 제대로 안 나가드만. 대본대로만 하라니깐 재미도 읎고….”
그렇게 울 엄니의 프로 기질은 역시 애드리브에서 살아났다. 그 후 엄니는 TV보다 라디오를 더 선호했는데 그 이유는 간단했다. “텔레비전에 나갈려믄 분장도 잘해야 허는디, 라지오는 얼굴이 안 보이니께 분첩 몇 번 왔다 갔다 하고 방송국에 나가면 되니께 겁나 편해 잉?”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