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득신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어. “내가 지금 아주 기가 막힌 시구를 하나 얻었는데 그에 걸맞은 대구를 못 찾겠구나. 마상봉한식, 마상봉한식…….” 그러자 하인이 대수롭지 않게 이러는 거야. “마상봉한식(馬上逢寒食), 도중속모춘(途中屬暮春).” 그걸 들은 김득신은 깜짝 놀라 무릎을 딱 쳤어. “오호라, 말 위에서 한식을 만나니, 길 위에서 늦은 봄을 맞이한다. 허허, 그것 참 그럴듯하구나. 썩 잘 어울린다. 훌륭하구나, 훌륭해.”
(생략)
김득신의 말에 하인은 하도 어이가 없어서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단다.
“아이고, 나리! 제가 뭘 안다고 그러세요. 나리께 배운 겁니다. 나리가 날마다 마상봉한식 도중속모춘 마상봉한식 도중속모춘, 이러시며 외우던 시가 아닙니까요.”
그러니까 하인은 그게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하도 들어서 외우고 있었던 거지. 그런데 정작 김득신은 까마득하게 잊고 하인이 생각해 낸 것인 줄 알았던 거란다.
--- pp.24-25
봄이 되자, 나는 창고로 쓰던 낡은 집을 빌릴 수 있었습니다.
오래도록 아무도 살지 않은 어두컴컴한 집에서는 곰팡내가 진동했습니다. 그러나 나와 크리스토퍼에게는 너무나 멋진 곳이었습니다. 새집에서 첫날밤을 보내고 아침에 출근 준비를 할 때였습니다. 내가 짐을 챙기지 않자 크리스토퍼가 안절부절못했습니다.
“아빠, 빨리 짐을 싸지 않으면 늦어요.”
“이제 짐을 싸지 않아. 우리한테는 집이 있잖아.”
그러면서 집 열쇠를 흔들어 보였지만 크리스토퍼는 선뜻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어린 나이에 떠돌아다니며 잠을 잔 탓에 집이 어떤 곳인지 몰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짐을 둔 채 집을 나서려 하자 큰 옷 가방을 가리키며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저거라도 가져가요.”
마음이 몹시 아팠습니다.
어느 날은 크리스토퍼를 목욕 시키는 데 전기가 나갔습니다. 전기세를 내지 못해 끊긴 것이었습니다. 촛불을 켜 놓고 목욕을 시키자니 서글픈 마음이 들더군요. 그때 크리스토퍼가 나를 빤히 바라보며 그러더군요.
“아빠는 참 좋은 아빠예요.”
그것이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일이 어렵다고 느낄 때마다 그 말을 떠올렸습니다.
--- pp.58-59
경찰서장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사건에 대해 설명을 시작했어.
“혹시 알렉산드르 알렉산드로비치 류비세프라고 들어 보았나?”
“들어 본 것 같기는 해요.”
“우리 러시아가 자랑할 만한 뛰어난 과학자일세. 이 과학자가 몇 주 전에 세상을 떠났다네.”
“살인 사건인가요?”
“아닐세. 나이가 들어 죽은 거야. 여든두 살이거든. 자네가 알아봐야 할 것은 류비셰프가 죽은 이유가 아니야.”
“그렇다면?”
“류비셰프의 연구와 관련된 의문을 푸는 것일세.”
이건 도대체 무슨 소리일까. 보통 사건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생략)
글쎄, 류비셰프가 죽고 난 뒤에 그의 집에서 1만 2천5백여 장의 논문과 수많은 연구 자료가 발견되었다지 뭐야. 1만 2천5백여 장이라면 책을 100권도 더 만들 수 있는 분량이거든. 류비셰프가 살아 있을 때 쓴 책만으로도 입이 떡 벌어질 지경인데 그것보다 더 많은 자료가 발견되었으니 그야말로 놀랄 노 자였지!
“그 많은 것을 혼자 했을 리가 없어. 분명 우리가 모르는 사실이 숨어 있을 거야. 류비셰프는 사기꾼이었던 게 분명해. 여럿이 한 일을 자기가 혼자 한 것처럼 꾸몄을 거야. 반드시 밝혀내야 해.”
--- pp.70-72
1590년, 왕자가 두창에 걸렸다. 약을 써서 두창을 치료하라는 임금의 명령에 내의원들은 쩔쩔맸다. 이때 허준이 나섰다.
“제가 치료해 보겠습니다.”
허준의 말에 내의원들은 놀라서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도대체 무슨 약을 쓰겠다는 건가?”
“두창신을 화나게 해서 좋을 것 없네.”
“괜히 나서서 자네 목숨까지 잃으려면 어쩌려고 그러나?”
두창은 전염병이라 환자를 가까이 하면 병이 옮을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왕자를 치료하겠다고 나섰다가 왕자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큰 벌을 받게 된다. 허준이 자기 몸을 사리는 사람이었다면 이럴 때 절대 나서지 않았을 것이다.
이때 허준은 나이가 쉰두 살이었지만 어의도 아니었고, 왕자의 건강을 책임져야 할 자리에 있지도 않았다. 그런데 굳이 나선 까닭은 무엇일까? 고통 받는 환자를 먼저 생각했기 때문이다. 환자가 죽음을 눈앞에 두고 괴로워하는데 의원으로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바라만 볼 수는 없었던 것이다.
--- pp.102-103
그러던 어느 날, 교수님 한 분이 내 작업실에 들어와 그림들을 죽 둘러보더니 불쑥 이렇게 말하더구나.
“멋진 사람만 그리는군요. 그런데 이 많은 사람 가운데 왜 당신은 없나요?”
처음에 나는 그게 무슨 뜻인지 얼른 알아듣지 못했어. 그러자 교수가 다시 덧붙여 말해 주더구나.
“당신은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나요? 이 사람들과 다른가요?”
그제야 나는 무슨 말인지 알아챘어. 그리고 정신이 번쩍 들었지. 그때까지 나는 한 번도 내 몸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어. ‘내 몸은 어떻지?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볼까? 나는 아름다운 것을 그리고 싶어. 장애를 가진 사람도 아름다울 수 있을까?’
그 질문들이 머릿속을 맴도는 동안 나는 아무것도 그릴 수 없었단다.
‘나는 아름다운가? 아름답다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내 질문에 답을 찾기 위해 도서관에 틀어박혀 이 책 저 책 마구 뒤졌어. 그러다 마침내 눈에 확 뜨이는 사진을 발견했단다. 바로 밀로의 비너스 사진. 고대 그리스 시대에 만들어진 양쪽 팔이 없는 여성의 대리석 조각상. 어쩜 그렇게 내 몸과 똑같던지!
그때부터 나는 내 몸을 주제로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어.
--- pp.141-142
나는 어떻게 죽어야 할까?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살다 당당하게 죽고 싶었다. 그렇다면 궁형을 받고 부끄럽게 살기보다 사형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선뜻 사형을 선택할 수는 없었다. 끝내지 못한 너무나 중요한 일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께서 세상을 떠나기 전에 말씀하셨다.
“아들아, 나는 원래 역사책을 쓸 생각이었다. 그런데 하늘이 나에게 책 쓸 시간을 주지 않고 데려가시는구나. 그러니 아들아, 네가 내 꿈을 이루어 주려무나.”
나는 아버지께 반드시 그렇게 하겠노라고 약속하였다. 그리고 약속을 지키기 위해 하루도 마음을 늦추지 않았다. 아버지가 모아 놓은 자료와 세상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이야기들을 그러모아 꼼꼼하게 살폈다. 그리고 그것들을 정리해 일의 처음과 끝, 성공과 실패, 흥하고 망하는 원리를 찾아 끼리끼리 나누고 묶었다. 그런 뒤 그 이야기들 속에서 하늘과 인간의 관계를 엿보고, 과거와 현재를 꿰뚫어 나름대로 내 생각을 담으려고 했다. 그런데 초고를 마치기도 전에 형벌을 받게 된 것이다.
‘그래, 어차피 한 번 죽을 목숨, 수치스럽더라도 하던 일을 마저 끝내고 죽는 것이 옳다. 살아서 역사책을 쓰자!’ 나는 궁형을 택했다.
--- pp.163-164